[전영객잔]
[전영객잔] 2008년 한국 블록버스터의 신풍경
2008-08-14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할리우드에 대한 각각의 반사된 욕망이 드러난 세편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 <님은 먼곳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하 <눈눈 이이>)가 한주 간격을 두고 차례로 개봉했다. 세편의 영화가 올 여름 한국영화의 흥행 도미노를 겨냥하고 나섰음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놈놈놈>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175억원이라는 거대 제작비로 탄생한 초대형 블록버스터이고 거기에 못 미쳐도 <님은 먼곳에>의 70억원이라는 제작비는 적지 않으며 <눈눈 이이>는“2008년 한국 블록버스터의 자신감을 입증할 최강 프로젝트”라고 보도 자료를 냈다. 흥행 추이를 놓고 보면, 7월 말 현재 <놈놈놈>이 500만 관객을 넘어설 것이라는 건 기정사실이다. 흥행 결과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겠지만 여름 시즌에 한판 붙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각자가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놈놈놈>은 김지운의 신작이라는 관점을 이미 넘어서서 올 여름을 지킬 한국영화라는 자리에서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말해져왔다. <놈놈놈>이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재점화시킬 물건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때 <놈놈놈>이 무언가로부터 한국영화를 지키기 위한 기대주라면, 그 무엇이 유럽영화나 아프리카영화가 아니라 초대형 할리우드영화인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할리우드영화와 한국영화라는 대당의 설정 아래 관객은 이 영화에 기대를 걸어왔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그때에 잠시나마 우리의 공공의 적이 된다.

차이가 있지만 할리우드영화와 대립각을 세우고자 하는 의견은 <님은 먼곳에>와 <눈눈 이이>에서도 접할 수 있다. <님은 먼곳에>의 이준익은 “베트남전쟁을 그린 대중영화는 전부 할리우드영화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각은 다 할리우드적이라는 얘기다. 베트남전쟁을 미국식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전쟁을 우리의 시각으로 반성해보자는 의미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씨네21> 663호)고 말했다. 더 강경하며 현재적이고 직접적인 발언은 <눈눈 이이>의 시사회장에서 곽경택의 무대인사로 들을 수 있었다. 곽경택은 할리우드영화의 침공에 맞서 한국영화라는 성곽을 사수해야 하는 것에 비유하며 <눈눈 이이>를 소개했다.

이렇게 보면 어떤 방식으로건 할리우드영화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며 한국영화의 주적은 혹은 한국영화가 탈피해야 할 모델은 할리우드인 것 같다. 그리고 세편의 영화가 똘똘 뭉쳐 할리우드의 침공으로부터 지금 한국영화를 힘겹게 방어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들이 한국영화의 이름으로 흥행성을 지켜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영화적 지향을 따져볼 때 할리우드적 감성 및 전술전략의 도입까지 밀쳐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단언하기 어렵다. 그건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혹은 그럴 경우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현존이라는 게 지금 상황에서 가능하기는 한가, 되묻게 된다.

한국의 영화 문화는 어떤 국가 못지않게 할리우드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일례로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 시절에 활동한 신화적 스타들을 잠시 상기하면 된다. 할리우드영화에서 제임스 딘이 어깨를 실룩거리는 걸 본 다음 한국영화에서 신성일의 어깨를 볼 때, 오드리 헵번의 모던한 헤어스타일을 본 다음 엄앵란의 헤어스타일을 볼 때, 거기에는 늘 일정한 영향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걸 들여다보는 걸 외면하고 전격적으로 밀어내거나 끊어내야 할 대당으로 할리우드를 설정하면 불화가 생기고 모순이 늘어난다. 이미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영화계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꿈꾸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의도적인 유사 형태를 만들어왔고 그에 대한 갖가지 논의까지 있지 않았던가.

나의 관심은 지금 여기에 있다. 세편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혹은 대중 장르영화가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점화하려고 할 때 어떤 구조적 매력으로 할리우드로부터 방어한 뒤 우리를 한국영화의 애정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것인가의 문제다. 그런데 이 점에서 세편의 영화는 할리우드 대중영화의 표현 영역을 모방, 번안 혹은 무의식적 회귀함으로써 그 역설 안에 놓인다. <놈놈놈>과 <님은 먼곳에>와 <눈눈 이이>는 할리우드가 대중을 사로잡은 그 정서와 기술에 오히려 깊게 매혹되어 있으며 또한 의식, 무의식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 세편의 영화가 산업적으로는 할리우드의 괴물(?)들을 물리치기 위한 충무로의 새로운 전사일지언정 그 대항마로서 갖는 욕망, 구조, 무의식은 차라리 할리우드적인 것과 깊은 교분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앞으로도 복잡한 논평을 요구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간과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를 지적해내는 게 급선무일 것이다.

할리우드영화와의 혼성모방을 드러낸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개봉 순서와는 반대로 한번 말해보자. <눈눈 이이>가 셋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다. 안현민(차승원)과 백성찬(한석규)이라는 범인과 형사의 두뇌싸움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이 많다. 만약 그렇게 느낀다면 그건 관객의 탓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의 심중은 할리우드 특정 장르영화들의 혼합적 모방에 있으며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해도 이미 그 영화들을 본 관객의 환기에 적극적으로 의존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감독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뚜렷하게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오션스 일레븐>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는 점은 이미 알려진 바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분할기법으로 펼쳐지는 범죄장면은 <오션스 일레븐>뿐 아니라 미국 드라마 <24시>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강력한 두 인물의 대치와 그로 인한 서사 발생이라는 점에서는 마이클 만의 영화 특히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의 <히트>에 강하게 빚지고 있다. 의도가 아닐지라도 백성찬의 회색 머리칼은 <콜래트럴>의 톰 크루즈를 떠올리게 하며, 갑자기 많아진 사람들 틈 속에서 상대방을 놓치는 장면은 최근의 예만 생각해도 <본 얼티메이텀>에서 이미 본 적이 있다.

<눈눈 이이>에 서사보다 더 강력한 요소가 있다면 관객의 기억을 자극하는 신호다. 그 신호가 언제 켜지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사실 이 영화가 나아가는 동력은 그 어떤 서사의 정확한 결합이기보다는 영화가 제공하는 장면을 따라 제때 그 자리에서 관객의 기억 신호가 켜질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이며 대부분의 장면들이 그것을 위한 주의환기의 연쇄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매끄럽고 흥미로운데도 어딘지 박진감이 부족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기호들은 이미 접수된 것들이라 재인지시키기는 쉽지만 그만큼 쉽게 술술 빠져나간다. 영화는 관객을 목적지까지 인도하지만, 애초에 갖고자 했던 화끈한 대결의 정점은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눈눈 이이>는 할리우드영화의 혼성 모방을 통해 관람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끌어모으고 있는데, 대신 번안하려는 입장은 취하지 않는다.

할리우드의 드라마적 정서를 번안한 <님은 먼곳에>

<님은 먼곳에>가 이른바 할리우드의 장면을 흉내내지 않고 할리우드의 드라마적 정서를 번안하려 한다. 그런데 번안의 의도 자체는 의미있는 것일지라도 텍스트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바깥의 의미를 돌연 첨부하면서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이 지금 이 영화의 문제가 되고 있다(순이가 상길의 뺨을 때리는 라스트 신과 그에 대한 해석). 이준익은 스스로 할리우드의 구조적 시나리오 작법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드라마를 만들어왔고 이 영화 역시 그러하다고 말했는데, 비교컨대 그 할리우드의 구조적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성공적인 영화 <왕의 남자>가 <님은 먼곳에>와 다른 지점은 연산/공길/장생/녹수(혹은 초선)가 그레마스의 기호학 사각형의 꼭짓점처럼 작용하는 것에 비해 <님은 먼곳에>의 순이/정만을 비롯한 밴드부원들/상길/시어머니(혹은 제니)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집약된 서사 관계 안에 있지 않고 사라지거나(시어머니, 제니), 순이와는 다른 시퀀스의 세상에서만 동떨어져 존재(상길)한다.

나는 지금 캐릭터가 아니라 캐릭터의 관계성을 말하는 중인데, 이준익이 캐릭터의 관계를 맺어주는 방식은 한 집단의 성격을 짊어지는 대표자를 상정한 다음, 그 인물에게 모든 대표성을 부여한 뒤 역시 다른 대표성을 부여받은 인물들과 관계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아마도 그게 이준익이 말하는 할리우드 구조주의의 핵심일 것이다. 이때 순이는 70년대 여인의 대표가 되고, 시어머니는 전근대적 여성의 대표가 되고, 상길은 20세기 남성의 대표가 되고, 밴드부원들은 나쁘지만 끝까지 나쁘지 않은 소시민들의 대표가 된다.

이 대표성의 부여가 영화에 즉각적인 문제를 불러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왕의 남자>에서 그 점은 오히려 여러 가지 읽기를 허용했다. 그런데 <님은 먼곳에서>는 라스트신에 갑자기 한국의 역사적 상징성을 개입시키는 순간, 할리우드 드라마적 정서의 자리에 한국의 역사적 맥락이 들어가 모든 걸 균열시킨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할리우드 대중영화가 그토록 사랑하는 소시민의 성공 스토리이자 바로 그녀의 어드벤처 장르이자 (그 모든 공연 장면이 불편하기는 해도) 마치 한 스포츠 영웅의 성공담처럼 보였는데, 마지막 따귀 한방과 그에 대한 해석으로 설명 불가능한 하이퍼 멜로드라마로 변신한다.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들간의 드라마를 흥미롭게 진전시키는 건 할리우드 대중영화의 오래된 기술 중 하나다. 그 안에서 영웅도 악인도 탄생되어왔고, 역경 극복의 훌륭한 드라마들도 있어왔다. <님은 먼곳에>는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번안의 시도였으나 동시에 부정교합의 흔적도 남겼다. 첨언을 하나 할 수 있다. 따귀, 순이의 그 따귀에 의미가 있다면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따귀에도 당연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님은 먼곳에>에는 한번의 따귀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도합 세번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정만이 제니를, 또 정만이 순이를 때린다. 그렇다면 정만과 제니, 정만과 순이 사이에 오간 두번의 따귀는 또 무엇을 대변하는 것일까.

할리우드의 감수성을 혼종과 과장으로 세공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놈놈놈>은 훨씬 더 긴 설명이 필요하다. 김지운이 스파게티 웨스턴을 만주에서 만든다고 했을 때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생각한 건 그가 지닌 창작의 태도가 이 재료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영화를 무언가 채워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그의 미학적 욕망과 이미 헐어낸 것으로서 전설이 되어버린 스파게티 웨스턴의 장르적 성격이 만났을 때 어느 쪽이 그 주도권을 쥐게 될지 궁금했다. 결과적으로 김지운은 장르로 들어가지 않고 자기 안으로 장르를 포함시켰다.

사석에서 많은 평을 이미 접한 뒤에 뒤늦게 이 영화를 보았고, 김지운이 제시한 오락영화라는 측면에서라면 즐겼다. 그런데 보고나서 이상한 점 한 가지가 있다. <놈놈놈>이 웨스턴의 계보 안에 있으며 수정되고 변종된 웨스턴이라는 점에 관해 꾸준히 들어왔는데 나는 아직 그 점에 관해 다른 상상을 한다. 이 영화는 알려진 것처럼 웨스턴인가? 혹은 수정된 웨스턴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이 영화를 즐겼다고 할 때 그건 웨스턴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즐겼다는 입장에서 그러하다.

극장을 나서며 내가 정리하려 했던 생각의 일부를 다른 두 사람이 이미 지적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김혜리는 “온갖 민족과 문화가 찌개처럼 들끓는 <놈놈놈>의 공간과 의상, 소품은 1930년대 만주의 재현보다 <스타워즈>의 타투인 행성이나 <블레이드 러너>의 포스트모던한 미래를 연상시킨다”라고 썼고, 김소영은 “수정주의 무협극 <칠검>의 펑크적 태도”를 지적하는 한편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로망 등이 각 시퀀스들을 야심차게 넘나든다. 슈퍼, 하이퍼 장르영화다”라고 지적했다. 두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니까 사막과 황야, 즉 만주라는, 역사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나 상상적으로는 백지에 가까운 미지의 땅을 배경으로 한 SF 혹은 무협지라고 말해야 이 영화에 적확한 자리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놈놈놈>이 웨스턴이라면 하이퍼 웨스턴이겠지만 그보다는 만주 SF에 더 가깝고 무협이라면 펑크 무협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영화의 본령이 혼종과 과장됨이라고 이해한다. 할리우드적 감수성을 하이브리드와 하이퍼의 결합으로 세공해낸 지금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최전선이 <놈놈놈>처럼 보인다.

혼종되고 과장된 결합의 전시장으로서 <놈놈놈>을 설명할 때 매우 흥미로운 설정은 의복이다. 옷이 이들의 혼종과 과장됨을 한눈에 설명하는 기호적 짜임새다. 나는 패션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의복의 기호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우선 도원의 매끈한 몸매에 어울리는 긴 코트는 말 그대로 수정주의 웨스턴의 상표와도 같은 망토를 연상시키지만 훨씬 더 정장에 가까우며 신사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알려진 것처럼 껑충한 키의 소유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몸에 둘러쳐진 망토는 그를 얼마간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했으며 정통 영웅상에서 비뚤어진 영웅상이라는 걸 한눈에 인지시키는 데 성공적인 기호였다. 만약 도원에게 그 망토를 입혔다면 그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속물의 위치에 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의 옷은 훨씬 현대적으로 재단한 것처럼 보이며 그건 싸움을 위한 옷이 아니라 실은 싸울 때 멋있게 보이기 위한 옷이다. 혹은 싸우는 그의 기량과 인성에 상관없이 그를 좋은 놈으로 과장되어 예측하게 하는 기호가 된다. <놈놈놈>에서 정우성의 동작은 아름다우며 기계적인데 의복과의 그 합일에서 나오는 것 일거라 추측한다.

창이의 의복은 웨스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사이버펑크와의 혼종성에서 온 것 같다. 이병헌이 제안했다는 화장법과 헤어스타일은 그를 만주로 들어온 사이버펑크의 기계전사 혹은 아키라의 현신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가 말을 달 릴 때 그건 말이 아니라 사이보그 전사의 최신식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창이의 의복은 도원처럼 몸과 의복의 이상적인 결합이 아니라 언뜻 맨몸의 파괴성을 감추는 가리개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가 지네에게 칼을 던질 때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데도 웃통을 벗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순간 그는 의복의 기호를 던지고 사이버펑크의 전사적 육체를 전시한다.

이상한 놈 태구가 입은 옷이 가장 이상하긴 하다. 속칭 깔깔이라는 누더기 솜옷과 항시 쓰고 다니는 안경. 하지만 이 옷의 의뭉스러운 기호성은 이 영화의 정체성에 관한 상징적 마크에 가깝다. 어딘가 부족한 것처럼 보이지만 비기를 감추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보이는 허허실실의 전법이 태구의 전법이자 김지운의 전법이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매칭을 통한 혼종과 과장. 어쨌거나 이 세 인물의 의복은 심지어 기후를 예측하기 어려운 용도를 지닌 것 같고, 그래서 한 지역에서 같이 입고 돌아다니는 게 가능 한가 하는 질문이 들 정도인데, 그 때 의복이 기후와 상관없이 스타일의 경연장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기호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의복의 기호를 보면서 말한 대로 한편의 영화를 떠올렸다. <스타워즈>. 그리고 <스타워즈>의 오래된 인기몰이를 같이 생각했다. <스타워즈>는 영화의 훌륭함을 뛰어넘어 스타일의 파격적인 제시로 신화의 저편으로 위치했다. 황야를 우주로 치환한 뒤, 서부의 영웅을 우주의 제다이로 귀환시킨 영화다. 다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행성마다 문화권을 만들어낸 뒤 그 경연장이 될 만한 스타일을 제시한다. <놈놈놈>은 <스타워즈>를 볼 때의 그 시각장의 기억을 되살려낸다. 그러므로 <놈놈놈>이 흥겹다면 그건 웨스턴과는 다소 무관한 성과다.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의 가면과 전자검을 태구의 깔깔이와 박창이의 칼자루와 등치시켜 우리가 환호한다고 해도 큰 문제를 겪을 것 같지는 않다.

영화적인 측면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볼 수도 있다. 김지운은 텅 비어 있거나 한없이 늘어지는 숏과 숏의 지속, 텅 빈 공간의 방치를 용납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비워서 미학을 만드는 창작자가 아니라 채워서 완성하는 쪽에 가깝다. 귀시장의 스펙터클한 장면을 예로 들 수 있으나, 그 밖에도 쉬지 않고 새로 등장하는 인물들과 요소들을 생각해볼 수 있으며 마침내 카오스적인 추격전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도 된다. 이를테면, 인물이 부리는 유머이건 프레임을 장악하는 시각적 장치이건, 신마다 새로 열리는 광경이건, 일단 그 자리에 무언가 채워져야 한다. 채워야 할 뿐 아니라 포화되어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누아르가 여인의 발목과 비정한 총부리만으로도 가능한 것처럼 웨스턴은 노을진 석양과 사나이의 흙 묻은 어깨만으로도 가능한 장르다. 나머지가 모두 비워져도 성립한다. 혹은 꼭 그것들이 아니더라도 다른 몇개의 모티브만 있으면 된다. 그들은 침묵해도 되고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손 인사를 하며 떠나기만 해도 된다. 후기 웨스턴이 점점 더 치중한 것은 세상을 풍성하게 해줄 영웅들이 아니라 곧 말 위에서 떨어질 것처럼 속되고 치정어린 그리고 노쇠한 영웅들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더 복잡한 웨스턴의 길이 있지만, <놈놈놈>이 참조한 스파게티 웨스턴이 정통 서부극에서 빌려와 유독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낸 표식이 있다면 그 미니멀리즘의 가능성을 더 밀고 나간 점이다. 그게 스파게티 웨스턴의 수정주의다. 스파게티 웨스턴은 죽어 있는 시간, 지속하는 숏의 물리적 빈칸을 만들어 즐기는 장르였다. 총격전이 아니라 그 앞과 뒤, 그들이 흘리는 붉고 더러운 땀방울과 더러운 시가와 겁먹은 듯한 눈초리의 오래된 정지상태의 기나긴 포즈로 성립된다.

<놈놈놈>도 후반부에 그런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어딘가 키치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웨스턴을 키치적으로 이해하여 우주로 나아간 <스타워즈>, 그리고 그것을 다시 상기시키는 <놈놈놈>이라는 식으로 이 영화를 일견 받아들이게 된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미니멀리즘 대신 <스타워즈> 식의 포화상태로 넘쳐나는 <놈놈놈>인 셈이다. <스타워즈>는 결국 무협의 정신과 무기까지 포스와 전자검이라는 방식으로 키치화하여 포함시킨 다음 지금껏 신화를 유지하고 있는 SF의 대중적 전범이자 포화상태다. 지금 <놈놈놈>의 무의식이 거기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짧게 첨언해야겠다. 2008년 7월에 당도한, 세편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혹은 한국 대중 장르영화는 기존의 할리우드 대중 장르영화 혹은 블록버스터에 관해 세 가지 반사된 욕망을 보여준다. 한편은 모방하고 있고 또 한편은 번안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혼종과 과장됨을 무의식적으로 공유한다. 너무 직접적인 첫 번째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두 가지 방식은 좀더 흥미롭게 주시할 여지가 있다. 이것이 지금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신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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