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리>)를 보며 웃다가 눈물이 났다(대단한 걸작 코미디는 아니지만 이 영화에는 배를 잡고 구를 만한 장면이 여럿 있다). 임원희가 죽어가는 동료(정석용)를 부여잡고 울부짖는 대목인데 임원희의 입과 코에서 나온 끈쩍한 액체가 정석용의 얼굴로 쏟아지기 직전이다. 비위 약한 사람은 도저히 더러워서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 흔히 화장실 유머라 일컫는 코미디로 주성치가 <희극지왕>에서 써먹었던 콧물장면을 연상시킨다. <희극지왕>에선 주성치의 콧물이 길게 늘어져 막문위의 입에 닿을락 말락 하는 서스펜스를 클로즈업으로 찍었고 <다찌마와리>는 좀더 거리를 두고 찍었지만 그 양이 압도적이다. 글로 쓰자니 지면이 흥건한 느낌마저 든다. 영화를 보고나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왜 그리 웃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웃음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 장면만 놓고보면 저질 코미디라고 단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친 듯 웃고나서 저질이라 욕할 수는 없는 노릇. <다찌마와리>의 코미디에 변명을 하고 싶어진다. 당연히 임원희의 침과 콧물은 엄청난 과장이고 지나친 과장은 일반적으로 비난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전체가 그런 과장으로 점철돼 있다. 오버도 일관성을 가진 오버일 때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는 게 아닐까. <다찌마와리>는 오버를 부끄러워하거나 주춤하거나 움츠러들지 않는다. 막가파 정신으로 밀어붙이는 힘. 그것은 저 더러운 장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한번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보고 또 보게 만든다. 적정선을 넘어서는 과장과 반복과 지속이 <다찌마와리>의 특징이다.
영화에 관한 평을 보면 엄격한 절제와 과감한 생략을 높이 사는 경우가 많다. 놀라게 하는 음향효과 없이도 무시무시한 공포, 짧게 한두 장면만 나오는데도 인상적인 액션, 슬픔을 강조하는 음악이 없어도 눈물을 멈출 수 없는 로맨스 등 흔히 생각하는 구성요소를 덜 쓰거나 안 썼을 때 오히려 품격있는 영화가 된다. 반응숏이나 시점숏을 생략해서 아름다운 영화도 있고 플래시백에 의존하지 않아 특별해진 영화도 있다. 물론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뤄 완벽한 느낌을 주는 영화도 있다. 황금비로 만들어진 조각이나 건축처럼 견고해서 빈틈이 없는 경우다. 하지만 평범한 많은 영화가 그저 적당해서 문제가 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모든 요소가 평균적인 입맛에 맞춰져 어쩐지 패스트푸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다찌마와리>는 앞의 경우들과 또 달라서 뭔가 넘치는 게 많은데 그런 과잉이 영화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이를테면 한강 다리에서 찍은 두만강, 압록강 장면에서 화면을 가득 메우는 서체의 압박이라니! 주성치의 영화나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 같은 영화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영화를 논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이런 지나침과 모자람에 일반이론을 세울 수 없어서다. 시작한 지 몇분 안에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몇분 즈음에 갈등이 최고조로 달해야 하고 등등 그럴듯한 이론이 등장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런 법칙을 무너트린 영화에 환호하곤 한다. 하긴 사법고시나 수능시험처럼 일반론만 외워서 정답을 맞히는 일이라면 평론가란 직업이 생기지도 않았을 거다. 이번호 20자평을 보면 <다찌마와리>는 만인이 환호하는 종류의 영화가 아니지만 나는 <다찌마와리>가 적당히 미지근한 게 아니라 임계점을 넘어 폭발해서 좋았다. 영화에선 넘치려면 과감히 넘치는 편이 적당한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다.
P.S. 최하나 기자가 <씨네21>을 떠난다. 언제나 남보다 먼저 마감하고 글도 잘 써서 편집장에게 지적당할 일도 없었던 친구다. 좋은 추억이 많았다니 다행이고 삶의 다음 목적지에도 행운이 함께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