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백기사는 오지 않는다
2008-08-21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슈퍼히어로 서사의 매혹과 함정을 동시에 전시하는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의 초반에 흥미로운 논쟁이 등장한다. 자신이 배트맨임을 감춘 갑부 브루스 웨인, 정의감에 불타는 지방 검사 하비 덴트, 그리고 두 여인이 동석했다.
여인1: 덴트씨, 당신이 진짜 영웅이에요. 영웅 놀이가 아닌 진짜 법의 수호자지요. 가면놀이를 하는 자경단(vigilante)을 영웅화하는 건 이제 그만두어도 되지 않나요?
하비 덴트: 시민이 불의에 맞서는 게 어때서요?
웨인: 누가 배트맨에게 그런 역할을 맡겼단 말이오?
덴트: 우리지요. 불의가 활개치도록 놓아둔 우리요.
여인1: 덴트씨, 여긴 민주주의 사회예요.
덴트: 위험에 처했을 때 로마는 민주주의를 뒤로하고 한 사람의 수호자를 임명했지요. 그건 명예가 아니라 봉사로 여겨졌죠.
여인2: 그 마지막 수호자는 시저였고, 그는 권력을 결코 양도하지 않았어요.
덴트: 영웅으로 죽거나 오래 살아 악당이 되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지금 브루스 웨인은 시치미 뚝 떼고 또 다른 자기를 비난하는 쪽에 가담해 있고, 법의 집행자인 검사는 반대로 초법적인 영웅을 옹호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웨인은 덴트를 떠보는 것이지만, 이 대화는 이후의 사건 전개를 깊이 암시한다. 여인들은 이 영웅이 필요하지만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덴트는 그가 위험하지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필요와 위험 사이, 그 모호함의 어둠 속을 암흑의 기사(Dark Knight)가 누구도 임명하지 않은 이 도시의 자경단을 자처하며 떠돌고 있다.

1. 퍼즐의 급류

<다크 나이트>는 제동장치 없는 폭주기관차 같다. 한번 가속이 시작되면 어디를 경유하는지 짐작할 수도 없는 미친 속도로 질주한다. 우리가 두 시간 반이나 달려와 거의 탈진했다는 사실은 열차가 가까스로 멈춘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감히 다시 올라타기는 망설여지지만, 이건 선수들의 솜씨다. 이 빛나는 오락을 빚어낸 당대의 장인들의 세공술을 일일이 거론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일 것이다. 다만 이 롤러코스터에는 전적으로 새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남다른 장치가 있다. 그것은 퍼즐의 중첩이라는 서사 장치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퍼즐에 매혹된 사람이다. 그는 시퀀스마다 퍼즐을 내고 그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음 시퀀스에서 그것이 해결이 아니라 더 복잡한 퍼즐의 입구임을 알게 되는 퍼즐의 중첩으로서의 서사 만들기를 즐긴다. 그를 스타로 만든 <메멘토>는 이런 중첩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퍼즐은 절망적이다. 마지막 매듭조차 종결을 향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메멘토>의 퍼즐은 다 풀리는 순간, 해결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황량한 원점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고스란히 <다크 나이트>의 서사이기도 하다. 악취 나는 닫힌 세상, 음모와 광기의 발작과 저지의 안간힘, 그러나 불가능한 진전, 어둠의 영원한 순환으로서의 서사. 그의 영화가 어둠과 음모의 폐쇄회로에 몰두하는 필름누아르의 자장 안에 있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배트맨 비긴즈>(2004)는 흥미롭지만 엉성했는데, 대신 그는 여기서 대작의 시청각적 스타일을 통제하는 방식을 충분히 익힌 것 같다(<프레스티지>(2006)는 실망스러웠다. 두 가닥이 엮인 퍼즐이 상대적으로 단선적인데다 중간쯤 되면 결말의 윤곽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크 나이트>에선 스펙터클의 난폭한 급류가 퍼즐의 섬세한 회로와 만나는 길을 찾아냈다. 이 영화의 아찔한 속도감은 질주와 폭파와 추락이 조합된 개별 장면들의 시청각적 자극의 효과(이것에 의존한 영화는 너무 많다)라기보다, 두 기사를 암흑의 심연으로 내던지는 듯한 끝없는 퍼즐의 중첩이 만들어내는 서사의 효과다.

그러니까 <다크 나이트>는 조커의 영화다. 이 퍼즐의 총지휘자가 조커이기 때문이다. 흑기사 배트맨도 백기사 덴트도 그리고 치밀하고 양심적인 경찰 고든도 결국 조커의 손바닥 안에 있다. “계획? 난 그런 거 혐오해. 너의 계획도, 경찰의 계획도, 갱의 계획도. 모든 계획이 다 싫어. 나는 계획자가 아니야. 그런 계획이 얼마나 한심한 건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지”라고 덴트에게 말하지만 조커는 실은 그 모든 걸 환히 꿰뚫고 계획한다. 배트맨과 덴트와 고든이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들은 곧 자신의 해결이 조커의 더 크고 사악한 음모의 부속품으로 기능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조커의 계획은 불가능한 계획이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첫 시퀀스에서 탈취한 은행 돈을 실은 그의 노란 스쿨버스가 은행 벽을 뚫고 나와 같은 모양의 다른 스쿨버스들 사이에 끼기 위해선(그래야 출동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다) 은행금고 털이에 필요한 시간뿐만 아니라 그날의 교통체증 여부까지 초단위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시계를 들여다본 적조차 없다. 혹은 후반부에 고든 서장 일행이 몇초 늦게 도착해 레이첼을 구하는 데 실패하고, 배트맨은 거의 1초의 여유도 없이 덴트를 구출하기 위해선(그래야 조커는 덴트를 복수심에 불타는 악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치밀한 계획 정도가 아니라 초인적인 예지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예를 누구나 10가지 정도는 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커는 불가능한 능력의 소유자다. 영화의 거의 전체를 지배하는 그의 계획이 그의 불가능한 능력을 전제하는 것이라면 <다크 나이트>는 말이 안 되는 영화다. 어떤 관객은 실제로 이 점이 불만족스럽다고 <씨네21> 온라인 사이트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과 평자들은 이 점을 전혀 주목하지 않거나 극히 사소하다고 보는 것 같다. 세계 최대의 온라인 영화 자료실인 IMDb에서의 <다크 나이트> 관객평점은 영화사상 최고인 9.3이며, 지금 미국에서 모든 흥행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미국 저널들도 홀린 듯 찬사를 쏟아냈다.

정말 홀려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논리의 공백을 짚어볼 여유를 한순간도 주지 않는, 그래서 어디까지 떠밀려왔는지도 짐작할 수 없는 퍼즐의 폭포수 위에서 조커의 ‘계획’의 전모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도취를 크리스토퍼 놀란의 현란한 트릭 때문이라고만 말하는 건 어쩐지 부족하다. 우리의 도취는 말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생성되는 게 아니라, 어쩌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생성되고 강화되는 것은 아닐까.

2. 초월자 혹은 절대악 조커

조커에게는 몇 가지 다른 층위가 겹쳐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악마나 괴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초월적인 존재 혹은 신에 가깝다는 뜻이다. 그래야 말이 안 되는 그의 계획이 성립한다. 이 이상한 사태에, 조커를 맡은 배우 히스 레저의 죽음이라는 영화 외적 사건이 부분적이지만 은밀히 개입한다. 히스 레저는 이 영화를 완성하고 나서 올해 1월22일에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지독한 악역을 맡은 적이 없으며, 우리는 오히려 고독하고 과묵한 단독자의 이미지로 그를 기억한다. <다크 나이트>의 첫 시퀀스에서 그가 허수아비 복면을 벗고 조커의 얼굴을 드러냈을 때, 나는 이상한 느낌으로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영화에서 뛰어난 악역 연기를 보고 나서, 그 연기의 초텍스트적 수행자로서의 뛰어난 배우를 곧잘 떠올리지만, 이 경우엔 그런 연상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건 팀 버튼의 <배트맨>의 조커(잭 니콜슨)을 볼 때와도, 히스 레저가 캐릭터 연구의 교본으로 삼았다는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말콤 맥도웰)을 볼 때와도 다른, 말 그대로 귀신을 마주한 느낌 같은 것이다. 더구나 그는 지금 가면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며 맨 얼굴도 아닌 분장과 화장으로 뒤범벅된 제3의 얼굴이다. 배우의 갑작스런 그리고 뚜렷이 인지될 만큼 최근의 죽음, 초유의(그리고 최후의) 괴이한 배역, 맨 얼굴을 짐작할 수 없는 분장이라는 사태가 배역/배우의 안정된 상응성을 허물면서, 히스 레저를 중첩된 괄호 안으로 밀어넣는다.

이렇게 뒤집어서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의 다른 중심인물들은 모두 (배역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오직 조커만이 맨 얼굴이다. 집사 알프레드는 브루스 웨인에게 “배트맨의 가면이 당신의 진짜 얼굴이고, 당신의 맨 얼굴이 가면”이라고 말하는데, 이 재기 넘치는 대사는 조커에겐 무력하다. 그는 극중의 어떤 인물과도 다른 차원에 있다. 조엘 슈마허의 민망한 두 <배트맨> 영화를 제외하면, <배트맨> 시리즈의 악인 중에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만 연원이 없다. 그는 극중에서 자기 얼굴의 ‘새겨진 웃음’의 연원을 두번 설명하는데(세 번째 설명은 배트맨에게 저지당한다) 전혀 다르다. 모두 지어낸 것이다. 물론 그에겐 가족도 이름도 거처도 어떤 사회적 기록도 없다.

그러니까 조커는 앎의 대상이 아니다. ‘말이 된다’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존재다. 그는 <다크 나이트>의 세계 안에서 재현이라기보다 온전한 현전(現前)에 가깝다. 그가 불가해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텍스트 안에서의 그의 특별한 존재성이 우리에게 그의 전지전능함을 추인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 ‘홀린다’라고 표현한 상태에 담긴 또 다른 양상일 것이다. 텍스트 안팎의 모든 사태들이 감독도 ‘계획’하지 않은 귀기를 <다크 나이트>에 불어넣으며 조커를 초월적인 존재로 감지하게 한다. ‘계획’이라는 이름의 이성이 그의 손바닥 안에서 맴도는 건 당연한 결과다. 이 퍼즐의 마지막 해결 역시 닫힌 출구의 확인이다.

조커에겐 물론 다른 층위도 있다. 그는 또한 절대악의 재현이다. 알프레드는 버마에서의 체험을 떠올리며 “세상에는 돈에도 명예에도 권력에도 무관심하고 오직 세상을 불태워버리고 싶어하는 존재가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절대악을 가장 세속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비슷한 영화 속 인물을 최근에 우리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에게서 만난 적이 있다. 그것이 조커의 전능성까지 해명하지는 않지만, 대신 조커가 배트맨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된다.

물론 조커는 마지막 한 가지에서 실패한다. 각기 다른 배에 탄 ‘선량한’ 시민들과 죄수들의 선택. 어느 쪽도 기폭 버튼을 누르지 않음으로써, 조커가 기대한 살육의 불꽃놀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유일하게 희망적이고 인간적인 장면처럼 보이지만 실은 미봉에 불과하다. 시민도 죄수도 한번도 주체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갑작스런 등장과 아름다운 선택은 이 서사에서 거의 무의미하다. 그들의 선택과 관계없이 고든이 자인하듯 “조커가 이겼다”. 지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덴트를 악마로 추락시켰기 때문이다. 조커는 “의인을 악인으로 바꾸는 데는 ‘조금 미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명제를 걸고 벌인 이 지독한 내기의 최종 승리자다.

이 층위의 조커에 대한 묘사가 특별히 흥미롭지는 않다. 선악 경계의 모호성에 관한 한 영화에서 더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조커가 절대악으로 등장하는 순간 조커보다는 오히려 자경단 영웅의 딜레마가 더 깊이 드러난다. 앞서 말한 최후의 대결에서 조커는 초월자나 절대악이기를 멈추고 단순한 악당으로 하강한다. 동시에 그의 존재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토록 전능하던 자가 갑자기 자기 손에 든 기폭 장치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하고 배트맨에 의해 경찰에 넘겨진 뒤, 배트맨과 덴트와 고든이 등장해 고뇌에 찬 대결을 벌이는 마지막 시퀀스에선 그림자도 어른거리지 않는다.

마지막 시퀀스는 중대한 결함처럼 보이지만(덴트는 약혼녀의 살해 주범을 더이상 문제 삼지 않고, 협박에 못 이겨 살해에 조력한 형사의 상관이자 정의의 동지였던 고든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죽이려 하고 있다. 거의 황당한 이 선택은 조커의 표현을 이용하면 ‘엉뚱한 자의적 복수심’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초반의 논쟁장면에서 제기된 자경단 영웅의 오랜 딜레마로 돌아오는 것이다.

3. 자경단 영웅

공적 권력이 무력하거나 이완된 곳에 ‘공동체 수호’라는 명분으로 자경단이 조직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근대국가가 성립된 뒤에도 자경주의가 끈질기게 살아남은 곳은 서방에선 미국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근대국가 성립 이후에 자신의 영토 안에서 민간인들이 앞장서 피투성이의 서부 개척을 완성한 역사적 체험에 기인할 것이다. 야만은 여전히 내부 혹은 아주 가까이에 있고, 공적 권력이 그것으로부터 방어해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가 자경주의(vigilantism)를 낳는다. 물론 서부극은 그 공포를 최초로 그리고 가장 잘 활용한 영화 장르이고 수많은 후예들이 뒤를 이었다. 서부의 멋진 총잡이들, 그리고 슈퍼맨에서 배트맨에 이르는 수많은 슈퍼히어로들은 그런 공포로부터 태어난 자경단 영웅이다.

이들은 기능적으로 국가 권력의 대행자, 혹은 보완자들이다. 무능하거나 부족한 경찰력과 군사력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시대 이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경험해온 우리에겐 이런 영웅이 현실에서든 허구에서든 잘 등장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에 전형적 영웅담이 드문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의 차이에 기인한다. 물론 홍길동이나 임꺽정, 혹은 지금 영화화되고 있는 전우치 같은 인물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들은 반체제적이고 계급적인 영웅이며, 무능하고 부패한 제도를 비판하지만 결국 현 체제에 봉사하는 미국식 슈퍼히어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른바 과대국가의 슈퍼히어로는 자경단이 아니라 혁명가에 가깝다. 미국 슈퍼히어로영화에 자경단(vigilante)이라는 단어가 종종 등장하지만 자막에서 대체로 삭제되거나 대체되는데(<다크 나이트>의 극장 자막도 예외가 아니며 ‘무법자’로 번역되어 있다) 그 용어가 매우 우리의 정치 역사적 경험에선 생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경단 영웅에게는 피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 그것은 절차의 윤리와 연관된 것이다. 사적 응징은 그 자체가 범법 행위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변호의 기회와 죄에 상응하는 벌이라는 보편적 관념을 그가 폐기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대개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힘에 도취된 인물이다. 그것이 그를 영웅으로 자리로 이끌었다. 따라서 자경단 영웅은 시급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존재다. 그의 광기는 조커의 말대로 약간만 밀어주면 곧 불붙는다. 자신의 위험성을 잘 아는 서부 사나이는 마지막엔 늘 어디론가 떠났다. 강간 미수범도 즉석 총살해버리는 <더티 하리>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형사이지만 그 관념을 부인함으로써 제도와 불화하고 결국 형사 배지를 던져버린다. 이 시급성과 위험성의 딜레마는 많은 미국 영웅담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어왔다.

이 딜레마를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해결한 것이 최근 시즌2가 시작된 <덱스터>다. 경찰서에 일하는 덱스터는 실은 연쇄살인마이지만 미제 살인사건의 악질범만 찾아내 명랑하게 토막낸다. 물론 그의 ‘범죄’ 역시 FBI의 수사 대상이 되지만 법 집행과 자경주의의 분업이 이 정도면 거의 완벽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경단 영웅은 스스로 청교도적 규율을 정하고 그 안에서 법 집행의 보완자 역할을 버텨낸다. 보상 없는 그 규율은 억압적이어서, 종종 영웅들을 자신이 싸워야 하는 악에 도취되도록 하거나(<스파이더맨 3>), 술주정뱅이로 만든다(<핸콕>).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의 규율은 과도하게 보일 만큼 엄격하다. 최후의 대결에서 그가 조커를 죽이지 않는 것은 눈에 띄게 부자연스럽다. 평생의 연인 레이첼을 산산조각냈으며 수십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조커를 배트맨이 처단했다 해도, 그것은 비난받을 수 없는 인간적 감정의 발로이며, 그래도 조커의 승리라는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다. 그러나 배트맨은 그렇게 하지 않고 “넌 평생 감옥에서 썩을 거야”라고 말하며 돌아선다. 조커는 그것을 ‘엉뚱한 자의적 정의의식’(misplaced sense of self-righteousness)이라고 조롱한다.

<다크 나이트>는 이 딜레마를 더이상 밀고 가진 않는다. 대신 별로 말해지지 않았던 문제를 제기한다. 조커는 배트맨에게 “내가 너 없이 뭘 할 수 있겠어”라고 말한다. “절대 타락할 수 없는” 배트맨이 없다면 절대 교화될 수 없는 조커도 등장하지 않았다. 조커의 표현에 따르면 배트맨은 조커를 완전케 하는 존재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조커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브루스 웨인은 가면을 폐기처분하고, 레이첼과 결혼했을 것이다. 둘은 서로가 존재의 이유가 될 운명이다. 결국 조커를 불러낸 건 배트맨이다. 이것은 <배트맨 비긴즈>의 마지막 장면에서 고든이 말한, 강한 법 집행은 더 악랄한 범죄를 부른다는 ‘증폭효과’(escalation)의 최종단계다. 동시에 슈퍼히어로 서사의 딜레마에 관한 자의식의 표현이다. 절대 영웅의 서사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절대악을 불러낸다는 것, 힘의 무한증폭의 최종단계가 파국이라는 것. 그 파국을 미봉으로 모면하고(전능한 조커가 어떻게 실패할 수 있는가), 시민의 선량함을 갑자기 강조하며(불평하는 기자들 외에 시민사회는 없었다), 흑기사를 어둠에 묻고 후계자로서의 백기사를 소망하지만 백기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슬프게 그러나 은밀한 즐거움으로 확인할 때(백기사의 시대가 오는 순간 자경단 영웅은 소멸한다), <다크 나이트>는 슈퍼히어로 서사의 매혹과 함정을 동시에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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