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구치 겐지는 구로사와 아키라와 더불어 1950년대 일본영화가 서구로 소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감독이다. 시발점은 구로사와의 베니스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라쇼몽>(1950)이다. 그리고 미조구치가 뒤를 이어 <오하루의 일생>(1952), <우게츠 이야기>(1953), <산쇼다유>(1954)로 베니스에서 3년 연속 본상을 수상, 일본영화는 서구에서 큰 유행을 몰고 왔다. 구로사와와 미조구치는 여러 면에서 대조된다. 구로사와는 서구적이고 동적이고 남성적인 반면, 미조구치는 매우 일본적이고 정적이고 여성적이다. 미조구치는 특히 멜로드라마를 잘 만든다. 서구인이 구로사와의 작품에서 서구보다 더욱 서구화한 미학을 목격하고 놀랐다면, 미조구치의 작품에선 ‘일본적인 미학’의 현시를 목격했다.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일본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우게츠 이야기>(1953)는 여기에 답하는 걸작이다.
아름다움의 분위기가 압도하는 순간
먼저 이 영화에는 도공(모리 마사유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일본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기에 더없이 적절한 직업이다. 그는 많은 도자기를 만들어 아내(다나카 기누요)와 아들과 함께 좀 넉넉하게 사는 게 꿈이다. 나라는 전쟁으로 잿더미로 변해가지만 그는 오히려 이런 기회에 돈을 더 벌 수 있다며 돈벌이에 더욱 열심이다. 부자가 된 도공, 그가 꿈꾸는 미래다.
도공의 작품이 평범한 그릇이 아니라, 예술임을 가르쳐주는 인물이 산속의 저택에 사는 와카사(쿄 마치코)라는 미지의 여인이다. 도공은 감히 쳐다볼 수 없는 귀족의 딸이 자신의 그릇을 숭배의 대상으로 격상하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게다가 그녀는 도자기에 반한 마음을 사람에게까지 전이하여, 도공에게 결합하자 요구한다. 고향에서 기다리는 처와 아들이 눈에 밟히지만, 도공은 와카사의 미모에 정신을 잃고 에로스의 향락을 즐긴다. 예술가가 된 남자가 자신의 예술을 숭배하는 아름다운 여성과 함께, 속세와는 아주 먼 곳에서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찬미하고 살 수 있는 조건에 들어간 것이다.
도공이 와카사와 산속의 저택과 부근 호수에서 펼치는 20여분은 미조구치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다. 미조구치의 유명한 ‘원숏 원신’에 가까운 길고 긴 롱테이크의 이 장면은 오로지 일본적인 표면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다. 기하학적인 선이 돋보이는 목조건물, 영국식 정원처럼 인공미가 돋보이는 일본의 정원, 어둠을 밝히는 단아한 촛대, 선과 선의 단순미로 구성된 다다미방과 방문들,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침묵하듯 노래하고, 정지하듯 춤추는 와카사의 신비한 몸짓, 그리고 이 모든 풍경을 감싸는 침묵의 분위기까지….
약간의 무서움마저 느끼게 하는 이 장면은 미조구치의 ‘아름다움의 분위기’가 압도하는 순간이다. 오로지 아름다움을 잡기 위해 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연출돼 있다. 한때 화가를 꿈꿨던 미조구치는 “그림에서 빛이 중요하듯, 영화에선 분위기가 중요하다”며, 그런 분위기를 잡아낸 화가로 베르메르를 꼽았다. 그래서 미조구치는 공간의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컷’을 잘 외치지 않았으며, 클로즈업하지 않고 멀리서 연기자들을 잡았다. ‘롱테이크와 클로즈업의 배제’라는 미조구치의 미학은 그런 까닭에 선호됐다. 넓게 보면 이런 태도는 앙드레 바쟁의 리얼리즘과 맞닿아 있다. 미조구치의 미학은 자크 리베트 같은 바쟁주의 비평가들에게 극찬을 받았고, 이들의 미조구치 상찬은 그를 서구에서 ‘작가’로 거듭나게 했던 것이다.
꿈과 현실을 상징하는 두 여성
와카사는 귓전을 때리는 요염한 웃음소리로 도공의 혼을 뺀다. 호숫가에 큰 양산을 펼치고, 두 남녀가 사랑을 노래할 때는 도공의 말대로 이곳은 ‘천국’이다. 이런 천국이 실재했으면 좋으련만 뒤늦게 도공은 자신이 몸은 없고 목소리만 있는 여성, 곧 유령과 사랑에 빠졌음을 알아챈다. 자신의 이름을 애달프게 부르는 와카사의 목소리를 간신히 물리치고 도공은 꿈에서 겨우 깨어난다.
미조구치의 아이콘인 다나카 기누요가 연기한 아내의 세상은 와카사와 모든 면에서 대조된다. 그녀는 현모양처다. 가족에게 희생하고 헌신한다. 아내는 남편이 예술가라기보다는 도공이라고 여긴다. 예술보다는 기능이 더욱 강조돼 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겐 에로티시즘이란 없다. 도공은 죽음의 세상에서 빠져나온 사실 자체에 감사하며 가까스로 고향에 돌아온다. 역시 아내는 자신을 기다리며 자는 아들 옆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 다음날 아침, 도공은 지난밤의 아내와의 만남도 헛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귓가에 남아 여전히 그의 곁을 지킨다.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혼자 물레를 돌리면 아내의 목소리는 곁에 찾아와 “나는 당신과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라며 작업을 독려한다.
두 여인이 상징하는 세상은 도공의 꿈과 현실이 대조되는 곳이다. 와카사와의 만남이 꿈이라면, 아내와의 삶은 현실이다. 산속의 저택에선 매일이 전쟁인 속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예술을 찬미한다. 반면, 아내와의 삶, 곧 가족과의 일상은 매일이 전쟁이고 숙제를 마쳐야 하는 현실이다. 꿈에서 돌아와 현실을 받아들인 도공이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노동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다음에는 서구에 동양영화를 본격적으로 알린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을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