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액션 영웅들의 찢겨진 생살
2008-08-28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다크 나이트>와 <다찌마와리>에서 드러나는 남성 육체에 새겨진 상처의 의미

1.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에서 이상했던 것은 개들의 등장이다. 맹견 로트와일러들은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해 배트맨(크리스천 베일)에게 덤벼들고 다리의 살점을 뜯는다. 이후 배트맨, 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펜트하우스로 돌아가 물린 자국을 보여주며 집사의 간호를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갑옷, 배트맨 복장의 아킬레스건을 보완해 달라고 부탁한다. 개들에게 물린 상처를 드러내 보이는 배트맨의 이렇게 다치고 약한 모습은 이후 영화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후 조커와의 거리 싸움에서 쓰러지지만 이렇게 생살을 드러낸 ‘상처 받기 쉬운’ 모습은 아니다.

고담시 정상의 자본가이며 유능한 집사 알프레드(마이클 케인)와 고도의 기술을 갖춘 무기 발명 및 경영을 도와주는 조력자(모건 프리먼), 하이테크 갑옷. 그리고 그 유명한 배트맨 자동차 등에 둘러싸인 천하무적 웨인. 그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증거처럼 개들이 그의 몸에 남긴 상처가 고스란히 재현되는 것이다. 생살이 보이고 상처엔 피가 엉켜 있다. 영화 끝 무렵 다시 셰퍼드를 주축으로 한 경비견들이 등장해 흑기사 배트맨을 쫓고 그는 어둠 속으로 쫓겨간다. 자본과 기술의 유능한 운용자로서의 모습이 영화 전편을 채우다가 마지막 부분, 개들에게 쫓기며 어둠으로 사라지는 이 모습은 그러나 말 그대로 코믹스다.

<다크 나이트>를 아이맥스로 본 사람들은 홍콩의 빌딩에서 배트맨이 하강할 때의 디지털적 짜릿함을 토로하는데, 영화의 삼위일체는 그야말로 기술, 자본, 스펙터클이다. 이러한 슈퍼 모던의 휘황함의 한편에 영화의 배경 도시인 고담시 자체가 발산하는 고딕, 전근대로 향해가는 어둠이 있으며 또 다른 한편에는 배트맨의 피로 엉킨 생살의 상처가 있다. 고층 빌딩에서 급하강하고 박쥐의 날개를 펴 날고, 온갖 무기를 갖춘 하이테크 배트카가 전소하고 배트 바이크가 굴러도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지만 개들에게 물린다.

개들의 이빨 자국이 드러나는 배트맨의 생살, 그 상처의 등가물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조커(히스 레저)의 찢긴 입이다. 그러나 조커의 경우, 그 연유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다르게 설명하는 바람에 우리는 그 찢긴 입의 진짜 사연을 결코 알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입가 상처는 조커 특유의 입 꼬리를 치켜세워 웃는 입으로 변양된다. 조커의 상처는 억지춘향의 웃음이 된다. 조커는 레이첼 도스(매기 질렌홀)에게도 나이프를 입에 들이밀고 입을 찢을 것이라고 협박한다.

배트맨이 상처 입는 과정은 명백히 재현되는데 반해 조커의 상처도 명백하나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전히 이상한 점은 맹견의 동원이다. 이전, 은행갱단을 보여주면서 훔친 돈의 지분을 더 갖기 위해 서로를 차례로 죽이는 살상전이 보였다. 자로 잰 듯 정확한 계산 속에서 조커는 스쿨버스의 대열 속에 끼어 경찰의 눈을 속여 도망간다. 이러한 영화의 도입부 이후 배트맨의 가짜 대역들이 등장하고 예의 개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조커의 치밀한 은행털이와는 달리 가짜 배트맨들 개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막대한 자본과 기술을 소유한 배트맨과 심리전에 사통팔달, 사통오달한 절대악 조커의 이런 찢긴 생살, 혹은 생살 찢기는 블록버스터 고딕 액션영화, 그 남성 영웅들의 피 뿜는 상처에 근접한 대용물이다. 예컨대 매끈한, 글로시한 블록버스터의 논리로 영화의 세트와 소품, 미장센을 도배할 수 있지만 자본가나 절대악에 이를 만한 초인이 아닌, 다중 계층 관객이 밑바닥으로부터의 연민과 정감을 쏟아붓게 하고 이 영웅, 반영웅들과의 어떤 동일시, 반동일시에 이르게 하는 것은 이들의 ‘인간’다운 상처다. 그러나 고딕적 기괴한 비극성을 배트맨 복장을 한 채 휘감고 있음에도 웨인의 트라우마에 접속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의 대역인 두명의 완벽에 가까운 보호자이자 조력자를 두고 있어 심리적으로 방패를 두르고 있는 셈이며(이전에는 배트맨의 심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나왔다 말았다 하지만 이번 <다크 나이트>에서는 그런 악몽을 갖고 있지 않다), 레이첼이 사실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무엇보다 고담시 전체를 지배하는 완벽한 감시 장치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재력, 기술력, 지력이 있다. 최상급 자본가인 것이다. 이런 그가 개들에게 물리고 개들에게 쫓기며 물린 상처를 전시하는 방식은 원시적이고 조야하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상처가 대중영화의 감정의 핵을 구성하는 것이다.

여하간 웨인의 상처는 이윽고 아물지만 조커의 상처는 그 상처가 표현할 수 있는, 학대와 폭력이라는 기호와 정확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보인다. 조커가 그 상처와 관련해 들려주는 두 가지 버전 모두 끔찍하다. 그중 하나가 ‘어머니가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칼을 들었고, 그것을 본 아버지가 웃으면서 어머니를 여러 번 찔렀다. 그리고 내게 와 슬픈 표정 짓지 말고 웃으라고 하면서….’

어떤 버전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제 크게 중요하지 않다. 조커가 칼을 상대방의 입 속에 집어넣어 찢으려는 순간, 이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살을 찢는 고통이 웃는 표정, 희열의 표정으로 얼굴에 영구적으로 각인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조커의 얼굴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배트맨이 개에 쫓기고 물리고 하는 것이 비주얼한 설득력이 떨어지는 반면 , 조커의 버전은 그 버전이 증식하더라도 설득력이 있다. 트라우마적 상황을 절묘하게 재구성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배트맨의 생살 상처는 억지로 영화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느껴지는 반면, 조커의 생살 상처는 영화적으로 극적 버전으로 제시되지만 실재적이다. 이렇게 보자면 배트맨의 생살 상처는 일종의 거짓 표식이다. 곧 아무는, 잠정적 상흔인데 비해 조커는 영구 상흔이며, 또 그것이 상흔임을 정반대로 부정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두 남성간의 계급 차이다. 조커에 대한 기록은 영화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조커가 재구성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미국 인디영화에서 주로 다루는 노동계급 가정에서 자라난 폭력에 얼룩진 남자아이의 성장 실패담이다. 그래서 액션 블록버스터로서의 <배트맨>의 관객의 조커에 대한 감정 투자는 그의 지능적인 은행털이 및 배트맨 잡기 심리전, 그 방향으로도 움직이지만, 은연중에 드러나는 그의 아메리칸 트래지디 특히 미국 폭력 가정의 비극의 서사에 ‘홀린다’. 이렇게 액션보다는 감정적 리액션(reaction),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로서는 드물게 액션과 일부 병행하는 혹은 그것을 거스르는 리액션 블록버스터가 된다. 허문영의 지적처럼 백기사가 오지 않는다는 슬픔과 은밀한 즐거움이 양가적으로 교차하는 ‘리액션 블록버스터’가 되는 것이다.

2. <다찌와마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이 영화 기자시사회에서 감독 류승완이 흥미로운 말을 건넸다. “만일 자기(관객)가 웃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웃고 있지 않으면, 웃는 게 맞는 것이니 웃어라. 만일 자기는 웃고 있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웃으면, 웃는 게 맞으니 웃어라.” 재미있게 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난 재미있게 보았다. 영화는 194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기보다 설정하고 있고, 다찌와마리를 진지하게 채택한다기보다 역시 설정하고 있다. 다찌와마리가 액션이라는 뜻으로 충무로에서 사용되기 전 이 용어는 연쇄극에서 싸움장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연쇄극 연구자 우수진에 따르면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한 신파 극단이 적의 군함에 어뢰가 명중해 침몰하는 해전장면에서 어느 외국 해군의 훈련장면을 담은 실사영화 필름을 스크린에 영사해 높은 평판을 얻었고 특히 싸움장면이, 다찌마와리가 인기를 끌었다. 야외 촬영한 싸움장면을 스크린으로 보여주다가 영사가 끝나면 다시 밝아진 무대 안에서 같은 배우가 연극을 계속하는 것이다(<연쇄극의 근대 연극사적 의미>).

<다찌와마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는 이러한 다찌와마리의 계보를 쫓는다기보다는 주인공 임원희에게 다찌와마리라는 이름을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옥행 급행열차표를 준다. 이 영화는 1976년 배우 박노식이 감독했던 여러 편의 액션영화 중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에서 부제를 가지고 올 뿐만 아니라 1970년 <홍콩서 온 마담 장>에서 정혜선이 했던 마담 장 역할을 오지혜가 하고 있다. 오지혜의 연기는 이 영화의 톤을 일러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서두의 짧은 출연이지만 완벽한 포스를 남긴다.

이어, 1975년 <여형사 마리>의 루비나가 했던 마리 역할은 박시연이 그리고 홍콩 감독 장철의 1968년작 <금연자>의 정패패 역은 공효진이 금연자라는 이름으로 해내고 있다. 또한 장철의 1967년 걸작 <독비도>의 장면- 고난을 당한 뒤 집의 가보로 남겨진 무술 책을 연마해 거듭난다- 과 서극의 그에 대한 오마주 <서극의 칼>에 대한 이중의 오마주가 있다. 당시 스파게티 웨스턴만이 아니라 <007> 시리즈의 영향을 받은 만주 웨스턴, 특히 <쇠사슬을 끊어라>의 스키장면에 대한 인용도 보인다. 위의 <다크 나이트>에 대한 고찰에서 이야기했듯이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액션영화에서 남성 육체가 상처받기 쉬운 장면을 재현할 때의 동기화 부분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상처보다는 굴욕에 가까운 방식으로 재현되는데 다찌와마리가 독비도로 거듭나는 장면이다.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을 겪는 그는 자신을 쫓는 왕서방(김병옥)과 국경 살쾡이(류승범)패에 엄청나게 짓밟힌다. 이런 굴욕 속에서 그는 예의 독비도처럼 가보로 남겨진 무술책으로 무술을 다시 익힌다. 곧 밝혀지는 바 육체적 굴욕 속에서 그는 다찌와마리의 기억을 되살린다. 알려진 대로 <독비도>는 한국에서는 각종 외팔이, 외다리 시리즈 선풍을 불러왔던 작품이다. 이 독비도 시리즈는 일종의 불가능성을 전제로 하다가 불굴의 힘을 다해 그것을 잠재태로 바꾼 뒤 또 그것을 최대치의 가능태로 만든다. 예컨대 왕우는 한팔을 잃지만, 그래서 액션 영웅의 기반을 잃어버린 듯 보인다. 그러나 그는 무술교본을 보고 열심히 ‘쿵후(말 그대로 공부)’하여 팔을 잃기 전보다 더 강한 무술을 구사하게 된다. 훼손된 남성 신체가 역으로 무술 공부를 통해 더 견고해지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당시 홍콩의 식민 혹은 조차 상황에서 독비도의 왕우는 한번 망가졌지만 더 강하게 일어설 수 있다는 알레고리적인 독해를 제공하기도 한다. 뭐 전제했듯이 워낙 재미있자고 만든 영화라고는 하지만 <다찌와마리…>는 당대의 문제들이나 과거의 문제들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영화자족적 패러디와 오마주로 일관하느라 다찌와마리의 굴욕적 상처도 그 회복도 ‘생살’이 이루어내는 액션의 호방함과는 거리가 멀다. 다찌마와리, 진정 쾌남으로 돌아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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