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 오디세이]
[걸작 오디세이] 서양인도 놀랄 만큼 서구적인 동양영화
2008-08-28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라쇼몽> 羅生門, 구로사와 아키라, 1950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구로사와 아키라가 <라쇼몽>(1950)으로 황금사자상을 받음으로써 동양영화는 본격적으로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구로사와는 일본뿐 아니라 동양영화 전체에 큰 가능성을 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그 누구도 구로사와의 베니스 수상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감독도 아니었다. 당시는 오즈와 미조구치의 시대였다. 이탈리아영화를 일본에 수출하던 이탈리아 영화인의 소개로 <라쇼몽>은 베니스에 전달됐고, 구로사와는 자신의 작품이 베니스에 출품된 줄도 몰랐다. 이제 갓 마흔을 넘긴 감독이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세계에 이름을 먼저 떨친 것이다.

압도적인 도입부 장면

구로사와(1910~98)보다 12살이 많았던 미조구치는 <라쇼몽>의 수상 소식을 들은 뒤 자존심도 상했고 충격도 받았다. 그 길로 그는 술을 끊었다. “새까만 후배가….” 미조구치는 일생의 예술품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일했다. 그 결과 <오하루의 일생>(1952)으로 그도 베니스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바야흐로 베니스의 바다에 일본영화 열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라쇼몽>은 첫 장면부터 관객을 압도한다. 절 앞의 반쯤 파괴된 거대한 문, 그리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등으로 세상은 지옥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가 잘 보이도록 물에 잉크를 섞었다는 바로 그 비다. 이곳에 승려와 나무꾼이 앉아 혼이 빠진 표정으로 “알 수 없어”라는 말을 반복한다. 무언가를 봤는데, 도무지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태도다. 부랑자 한명이 끼어들어 무엇을 알 수 없는지 얘기하라고 조른다. 두 남자의 플래시백이 시작되는 것이다.

퍼붓는 비의 이미지는 곧바로 빛나는 태양의 숲으로 바뀐다. 나무꾼이 도끼를 들고 숲으로 들어가는 장면인데, 구로사와 특유의 트래킹은 나무꾼과 거리를 두고 옆에서 따라간다. 베니스쪽의 설명대로 “카메라가 이렇게 깊게 숲으로 들어간 적도 별로 없고, 또 이를 트래킹으로 찍어 닥쳐올 사건의 긴장감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사례도 이전에는 드물었다. 나중에 구로사와는 ‘숲의 트래킹’을 더욱 발전시켜 <거미집의 성>(1957)에선 숲속을 말을 타고 달리며 더욱 빠른 속도의 트래킹을 보여주기도 한다.

동양영화라면 시대에 뒤처진 무성영화의 형식일 것이라고 예상한 서구 관객에게 도입부의 장면들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서양의 영화형식에 대한 깊은 이해가 화면의 곳곳에서 목격됐다. 특히 소비에트 몽타주의 영향이 돋보였고, 도브첸코의 <대지>(1930)에서 보는 듯한 하늘이 세상을 압도하는 장면들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11세기, 부부가 산을 가다, 도적을 만났고, 신부는 겁탈당했으며 신랑은 죽었다. 도적(미후네 도시로), 신부(교 마치코), 신랑(모리 마사유키), 이 세 사람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초점은 누가, 무슨 이유로 신랑을 죽였냐는 것이다. 사실을 알기 위해 모두 네개의 플래시백이 동원된다. 장소는 범인을 가리는 야외 법정에서다. 그런데 네개의 플래시백을 다 들어도 범인이 누구인지, 동기가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는 채로 영화는 끝난다.

고정된 하나의 진실은 존재할까?

도적, 아내, 그리고 죽은 남편(그는 영혼을 부르는 무당의 입을 빌린다) 등 현장에 있던 세 사람은 모두 자기가 살인자라고 증언한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남편은 자살했다고 주장). 똑같은 사건을 놓고 모두 자기를 미화하는 쪽으로 설명하고 있다. 도대체 진실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사건을 모두 봤다고 주장하는 나무꾼도 플래시백을 펼친다. 그는 두 남자가 명예로운 결투가 아니라 시정잡배들처럼 막싸움을 벌이다 눈 감고 휘두른 검에 신랑이 죽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이 진실에 가까워 보이지만 사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보듯 나무꾼은 그런 싸움을 바라보지도 못할 겁쟁이다. 결국 관객은 네개의 증언을 모두 들었지만 여전히 진실은 알 수 없는 채로 남는다.

세련된 영화형식에 놀란 관객은 내용에 또 놀랐던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동양문화에 대한 근거없는 우월감에서 나온 반응이기도 한데, 어쨌든 서양의 모더니즘 계열 문학에서 보던 부조리의 드라마가 매끈하게 표현돼 있는 것을 목격했다. 특히 이탈리아 현지의 반응이 무척 좋았다. 구로사와의 작품에서 자기들의 문학적 보석이었던 루이지 피란델로의 모더니즘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피란델로의 소설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명인 어떤 사람>(1926)처럼 정체성의 불확정성을 유희처럼 다루는 솜씨에 탄복했다.

그런데 <라쇼몽>으로 구로사와는 스타감독으로 등극했지만, 이후 오랫동안 비평적으로는 홀대당하는 불운도 겪는다. 특히 프랑스 비평계가 일본영화의 ‘진짜’ 작가로 오즈와 미조구치를 꼽고, 이들에게 비평적 관심을 집중함에 따라 구로사와는 흥행감독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7인의 사무라이>(1954), <요짐보>(1961) 등으로 1950, 60년대를 화려하게 보냈지만 그가 다시 유럽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라쇼몽> 이후 무려 29년이 지난 1980년이다. 그해 구로사와는 코폴라와 루카스가 제작자로 참여한 <카게무샤>로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 거장의 귀환을 다시 전세계에 알린다.

다음에는 법정영화의 또 다른 고전인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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