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묵배미의 사랑 Lovers in Woomuk-Baemi
장선우 | 한국 | 1990년 | 114분 | 컬러 | 장선우-전
서울 변두리를 전전하던 재봉사 배일도(박중훈)는 난곡의 조그마한 미싱 공장에 취직한다. 그는 새 직장에서 “눈빛으로 말하는” 민공례(최명길)를 만나게 되고 첫눈에 반한다. 손이 느린 민공례를 대신해 솜씨를 발휘하며 환심을 산 배일도는 그녀에게 접근하지만, 그때마다 민공례는 배일도의 마음을 밀어낸다. 두 사람의 사이가 서먹해질 무렵 배일도는 민공례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날 이후 민공례는 배일도에게 먼저 데이트를 신청한다. 변두리 치정극이라고 부를 수 있을 <우묵배미의 사랑>의 시작은 좀 난데없다. 영화는 첫 대목에서 배일도의 목소리를 통해 이미 두 남녀의 불륜이 잠깐 타올랐다 금새 식었음을 일러준다. 민공례에 대한 배일도의 순정은 그저 애틋한 기억으로만 존재할 따름이다. “모든 인생에는 샛길이 있다”는 배일도의 말에 민공례는 “넓고 환한 길은 재미가 없잖아요”라고 답하지만, 사랑의 밀어가 이내 책임지지 못할 거짓말로 변할 것임을 둘은 직감한다. 야간열차를 타고 끊임없이 도주하지만 해가 뜨기 전 두 사람은 여관에서 나와야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미싱대 앞에 앉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묵배미를 배경으로 우리 이웃의 삶과 사랑을 그리려 한다.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출몰하고, 분노와 좌절이 해학과 능청이 뒤엉키고, 가난하지만, 화려하고, 화려하면서도 동시에 깊은 헐벗음이 써늘하게 느껴지는 그런 모습으로 이 작품을 그리려 한다.” 개봉 당시 장선우 감독의 연출의도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배일도만의 추억이 아니다. 배일도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던 영화가 중반부 이후 화자를 바꾸는 것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모두 근대화의 자장에서 밀려났고, 그래서 더욱 외딴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밑바닥 군상들의 마지막 판타지를 애도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