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이렇게 옥체를 알현하게 되어 정말 영광이옵니다.
=그래, 그대가 일하고 있는 ‘영화전’에서 훈민정음으로 주간서책을 만들어 백성들의 교양과 학문을 살찌우고 있다지? 정말 기특하고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모든 게 다 전하와 같은 성군을 둔 백성들의 홍복입니다. 그러하온데 전하! 여쭐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래, 무엇인고?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
-소인이 듣자하니 화약국에서 그 위력이 막강한 살상병기를 개발 중이라고 들었사옵니다.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폭음과 함께 15발의 화살이 동시에 발사되고 무려 5리가 넘게 날아가 적진을 초토화시키는 실로 귀신같은 무기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옵니까?
=신기전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그래, 내 오래전부터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느니. 얼마 전에는 설계도인 총통등록을 명나라 밀정들에게 뺏겨 식겁했느니.
-(식겁…?) 다행히 그 총통등록을 다시 찾아 얼마 전 드디어 신기전을 완성했다고 들었사온데, 전하께서는 인명을 ‘어여삐’ 여기는 성군 아니시옵니까? 어째서 인명을 해치는 그런 무서운 무기를 만드신 건지 이해가 안 되옵니다.
=내 오로지 애꿎은 인명을 해치자고 신기전을 만들었겠느냐? 그리고 짐이 무슨 야심이 있어 명나라를 침략하고자 그 신기전을 만들었겠느냐? 내 신기전을 만든 것은 고려 왕조, 아니 멀리는 신라 왕조 때부터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던 중국 왕조에게 겁이나 좀 주고자 함이었느니라. 달포가 멀다하고 말들을 바치고, 사냥 잘하는 매들을 바치고, 요리 잘하는 처녀들을 바치고, 심지어 멀쩡한 아이들 불알까지 까서 명나라에 내시로 바치는 것도 한두해여야 말이지. 염병할!
-(헉!) 저…, 전하의 옥음을 오늘 처음 접하온데… 전하의 구중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심히 당황스럽사옵니다. 어찌 그런 상스러운 말을 하시옵는지….
=허허, 짐도 사람이니라. 홍문관 관리들이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도 왈왈대서 내 항상 점잖은 척을 했지만 짐도 성깔이 있고, 곤조가 있느니라. 그리고 다들 짐을 골방에서 책만 파는 서생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짐은 활쏘기를 좋아하고 육식도 즐기며, 그리고 색도 밝히느니라. 내 자식들이 괜히 18남7녀겠느냐.
-(삐질삐질!) 그…, 그래도 전하를 따르는 신하, 아니 옥체가 미령하신 세손 저하께서 전하의 그런 모습을 알고 충격이라도 받으시면….
=니미럴! 내 어릴 적부터 꽉 막힌 구중궁궐에서 숨도 못쉬고 살아온 게 너무나 싫었느니라. 내 어린 세손에게만큼은 그런 삶을 살게 하긴 싫도다. 아무튼 짐이 아까 신기전 이야기를 어디까지 했던고?
-“명나라에 내시로 바치는 것도 한두해여야 말이지, 염병할!”까지 말하셨사옵니다.
=그래, 짐은 심지어 명나라 황제, 아니 명나라 사신에게조차 절을 해야 한다 해도 참을 수 있느니라. 하지만 명나라의 핍박으로 인해 우리 백성들이 끌려가고 살육당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느니. 내 그래서 비밀리에 신기전을 개발한 것이다. 신기전은 ‘살인(殺人)무기’가 아니라 ‘활인(活人)무기’인 것이니. 혹자는 신기전이 다른 발명품인 훈민정음, 측우기, 혼천의, 자격루 등과 이질적인 것이라 하는데 사실은 모두가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 만든 것이니라. 짐이 왕이라면 백성들은 황제인 것이니….
-오~! 역시 전하는 제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성군이 맞으시옵니다. 멀리 불란서에는 “짐이 곧 국가다”라며 백성 알기를 똥으로 아는 왕도 있는데….
=그런 왕이 있다니 정말 ‘염병할’ 왕이로구나. 그런 왕은 임금할 자격이 없나니. 내 우리 세자에게는 세자로 책봉될 때부터, 그리고 어린 세손에게도 백성 알기를 하늘로 알라고 가르쳤느니. 짐이 죽어도 우리 백성들은 인자한 왕들 밑에서 자자손손 태평성대를 이루겠지. 허허허!
(울컥!) 저,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가 세종대왕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세종이 붕어한 뒤 세자인 문종은 단명하며, 세손인 단종은 삼촌인 세조(수양대군)에게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정녕 역사는… 뒤바꿀 수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