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강이관]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을 새롭게 바라보고 싶었다
2008-10-15
글 : 이영진
사진 : 오계옥
4년 만에 개봉한 영화 <사과>의 강이관 감독

<사과>의 개봉을 앞두고 강이관 감독은 그동안의 마음고생은 싹 잊은 듯했다. 알려졌듯이, 4년 전 촬영을 끝내고 후반작업까지 마쳤지만 <사과>는 곧바로 국내 관객과 조우하지 못했다. 제작사와 투자사는 개봉 시기를 정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으나, 결과는 언제나 미정 혹은 연기였다. 그러는 사이 <사과>는 토론토국제영화제,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등에서 수상했다.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제외하고는 국내 관객과 만나지 못한 상황에서 그가 해외영화제 수상의 기쁨을 만끽했을 리 없다. 대학 시절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14기)와 <세친구>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등의 연출부를 거친 뒤, 뒤늦게 데뷔전을 치르는 강이관 감독. 개봉을 일주일여 앞둔 10월8일 압구정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리고 지난 4년 동안의 마음고생보다 지난 4년 동안 숙성시킨 <사과>에 대해 물었다. 그것이 오랫동안 관객과의 만남을 갈구한 감독과 <사과>에 대해 궁금증을 품어왔던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본 관객이 감독의 얼굴을 본다면 좀 놀랄 것 같다.
=그게 무슨 뜻인가. 지난번 기자간담회 때도 액션배우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이 멜로영화를 만들었다고 누가 썼더라. 그때는 정말이지 머리도 짧고 스트레스 때문에 마구 먹어서 살도 굉장히 많이 찐 상태였다. 그 기사 보고 충격받았지.

-첫 촬영날을 기억하나.
=2004년 8월24일이다. 너무 취조 분위기다. ‘잘못했습니다, 선처 바랍니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웃음) 촬영은 2004년 12월에 끝났고, 애초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2005년 5월쯤에 관객과 만났을 것이다.

-개봉이 미뤄지면서 외려 배우들과 친해졌다고 하던데.
=지난 4년 동안 계속 그랬다. 봄에 개봉한다고 해서 모이면 가을에 하기로 했다고 하고, 가을에 모이면 이듬해 봄으로 밀렸다고 하고. 우리는 매번 모여서 개봉 언제 하냐, 에이 술이나 먹자. (웃음) 영화가 제때 개봉하고 헤어졌으면 이렇게 함께하지 못했을 거다.

-국내 개봉이 밀린 사이 해외 나들이를 많이 했다. 산세바스티안,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고.
=영화제 진출은 생각도 안 했다. 처음부터 상업영화 바운더리 안에서 만든 영화이고. 그런데 애초 개봉 시점에 칸영화제가 열렸고, 기회가 주어져서 마켓 시사를 하게 됐다. 거기서 토론토, 도쿄, 멜버른 등에서 온 해외 영화제 관계자들이 <사과>를 본 거다. 영화가 제 시기에 보여졌고, 나도 그 이후에 다른 작업을 했다면 그만큼 해외 영화제에 안 갔겠지. 그런데 시간이 중간에 뜨니까 부르면 부르는 대로 가게 됐다. 대개 제작 관계자들과 같이 가는데 나는 한두군데 간 것도 아니어서 그럴 순 없고. 초청한 영화제쪽에서도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온 나를 보고 여러 번 당황했다. 영화제 가서는 한국 영화인들 만나면 슬쩍 숟가락 하나 얹는 식으로 요기 많이 했다. (웃음)

-편집을 수차례 했다.
=편집의 경우, A부터 J버전까지 나왔다. 그 이후에 2005년 가을쯤에 극장 개봉용 버전을 만들었고, 지금 상영될 버전은 2006년 가을 버전이다. 해외 영화제를 다니면서 나라마다 각기 다른 관객의 반응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은 좋았다. 웃는 타이밍만 해도 천차만별이니까. 편집실에서 혼자 죽어라 쳐다보면 뭐가 나오겠나. 천차만별인 반응들이 영화를 여러 번 정리하고 수정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개봉이 결정된 이후 가장 기뻤했던 사람이 누군가.
=어머니다. 주변에서 ‘네 아들이 영화를 만들긴 만들었느냐’는 힐난을 너무 많이 들으셔서. 이번에도 말씀드렸더니 ‘진짜 하긴 하느냐’고 재차 물으시더라.

-<사과>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다.
=중학교 친구들과 굉장히 친하다. 이 친구들이랑 어렸을 때는 만나면 정말 지치지도 않고 여자 이야길 했다. 어떻게 하면 관심을 끌 수 있는지 매일 고민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친구들과 만나니까 그런 이야길 전혀 안 하더라. 부인이든 여자친구든 상대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원만하게 풀 것인가, 지금 사랑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바뀌어 있더라. 그러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겨운 로맨틱 말고. 사실 로맨틱영화 보러 갔다가 나온 커플들이 극장에서 나와서는 팝콘 먹을 때 왜 그렇게 소리를 크게 냈느냐고 싸우잖나. 시사회 반응을 보면, 반응들이 좀 제각각이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서 다 다르고. ‘개봉 못하면 비디오로 풀라’고 했던 중학교 친구들도 얼마 전 영화를 봤는데 보고 나서는 너는 누구 타입이다, 너는 또 누구 타입이다 하더라. 그런 반응들을 보면서 행복했다.

-소재나 줄거리만 놓고 보면 배우들이 처음부터 관심을 보이진 않았을 텐데.
=시나리오를 건네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한국은 기성 배우들이 오디션을 보는 경우가 흔치 않다. 내 입장에서는 일단 만나봐야 이 배우의 다른 면모가 무엇이구나 알고, 내가 그걸 끌어낼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할 수 있을 텐데, 일단 만나는 것조차 힘들었다. 1년 내내 얼굴 한번 보여달라고 했는데 못 본 배우도 있다. (웃음) 출연작만으로 함께 일할 배우를 골라야 하는 상황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문소리, 김태우, 이선균 세 배우를 어떻게 만났는지 더 궁금해진다.
=문소리씨가 가장 먼저였다. 소리씨가 김태용 감독하고 친분이 있다. 내가 자주 들르던 김태용 감독 작업실이 대학로에 있었다. 하루는 하이퍼텍나다 앞에서 소리씨랑 딱 마주쳤다. 그때까지 내가 봤던 문소리는 <박하사탕> <오아시스> <바람난 가족>의 문소리였다. (웃음) 그런데 실제 보니까 ‘아, 정말 예쁘다’ 싶은 말이 절로 나왔다. 태용이 형 이야기까지 더하고 보니 무척 총명하고 매력적인 배우라는 생각이 들고. 전전긍긍하다 시나리오를 한번 건네보자. 걱정 많이 했는데 연락이 바로 왔다. 만나보자고. 그러고 보면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김태우씨는 칸영화제 갔는데 시나리오를 읽었다면서 먼저 만나보자고 연락이 왔다. 남자배우 캐스팅이 반년 넘게 밀린 상황에서 후보 중 한명이 연락이 왔으니 당연히 나야 좋지. 그런데 처음 봤는데 너무 영화배우 같은 거다. 붉은 카펫을 밟고 오는데 기골이 저렇게 장대할까. 정말 잘생겼다. 귀는 이따만하고, 코도 엄청 오똑하고, 입체적인 얼굴인 거지. 그래서 ‘너무 영화배우 같다’는 말부터 했다. 물론 김태우는 ‘나 영화배우 맞다’고 기분 나빠하고. 자연스러운 연기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다면 너무 잘생겨서 포기할 뻔했다. 이선균씨는 윤재연 감독의 영상원 졸업작품 <사이코 드라마>를 보러 갔다가 반한 케이스다. 상업영화에 와서는 과거 단편에서 보여줬던 색깔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다.

-<사과>는 여성 인물의 시점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보기 드문 영화다.
=한국영화 중 여자가 메인이 돼서 영화를 끌어가는 경우가 많지 않았고, 그래서 해보고 싶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영화가 활황이었다고 하지만 남성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의 영화들이 대부분이었고. 왜 그런 거 있잖나. 우리 너무 힘들잖아, 그래도 가는 건 가는 거야, 하는 식의. 흥행 스코어 전쟁을 하면서 영화들이 터프해지고, 세지고. 반면 관객은 다른 영화들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여자주인공이 리드하는 영화를 찍고 싶었던 마음도 거기에서 비롯됐고. 현정은 모든 신에 다 등장한다는 원칙을 세워둔 것도 그런 것과 무관하지 않다.

-현정의 시점에 따라 카메라가 이동한다. 감독과 배우가 촬영 이전부터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소통이 어려웠을 것 같다.
=남자배우 캐스팅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는 8개월 동안 문소리씨와 만나서 김태용 감독 작업실에서 시험공부 하듯 했다. 대사를 나눠 읽으면서 많이 싸웠다. 대사가 이상하다. 뭐하러 이 신을 넣었느냐. 나야 의미가 있었으니까 넣었지라고 우기고. 그때만 해도 말을 되게 못했다. 말 안 한다고 배우한테 지적받고, 여자를 너무 모른다고 지적받고. (웃음) 극중에서 현정이 상훈에게 화내면서 ‘나 원래 이래’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대사를 놓고서도 꽤 다툼이 있었다. 나야 현정이라는 인물이 확 벗어나는 인물이길 바라지 않았고, 문소리씨는 그런 반응을 충분히 보일 수 있다는 쪽이었고. 어쨌든 그때 나눴던 대화들이 나중에 현장에서는 큰 도움이 됐다. 따로 뭔가 지시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김태우, 이선균 두 배우는 왜 문소리한테는 아무 말 안 하면서 우리한테만 이러느냐고 불만이었다. (웃음)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두 차례 현장에 갔다. 두 차례 모두 어수선했다는 기억만이 남아 있다.
=이전에 <세친구>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조감독을 했다. 두편 모두 신인감독, 신인배우들과의 작업이었다. <사과>는 달랐다. 경험 많은 배우들 사이에서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영화라는 게 결혼과 비슷하다. 촬영 시작되면 다들 본색이 드러난다. (웃음) 물론 다들 더 좋고, 옳은 판단을 내리기 위한 고집들이지만. 능숙한 감독이라면 그걸 쉽게 조정했을 텐데 초반에는 커뮤니케이션에 미숙했다. 기자들이 온다고 했던 날도 여유가 없을 때였고, 그래서 좀 불편했다. 잘 보세요, 잘 찍고 있습니다, 할 자신이 없었던 거지. 게다가 전체를 핸드헬드로 가니까. 스탭들도 힘들어했다. 조명을 하려면 한면만 하는 게 아니라 풀 세팅을 해야 하고. 배우 따라서 카메라가 휙 돌면 스탭들이 숨느라 정신없고. 때론 30분 만에 촬영을 끝내고 이동해야 했던 상황도 적지 않았고.

-클로즈업이 굉장히 많은 영화다. 인물을 타이트하게 잡다보니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들이 모두 갑갑해 보이더라.
=설정 숏이 하나도 없다.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 안 했다. 마스터 숏 제시하고 인물들을 따고 들어가는 방식이 요즘 관객의 관람 패턴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봤고. 인물을 잡고 액션이 시작되면 공간과 배경은 자연스럽게 보여진다고 봤다. 인물의 심리가 표정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관건인 영화이기도 했고. 물론 그 때문에 미술감독님한테도 욕 많이 먹었다. 풀 세팅 장면을 안 찍은 것도 아니고, 나중에 영화를 보니 인물 클로즈업으로 처리돼 있고. 처음부터 클로즈업만 찍겠다는 식으로 계산이 서 있었다면 내가 거장이었겠지.

-사랑이든 결혼이든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결합이라기보다 불완전한 발명품이라고 단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극중 인물들은 왜 끌리고 또 왜 떠나가는지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싫어하는 이유는 분명한데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치 않다. 상대가 나를 좋아하니까도 내가 상대를 좋아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고. 어쨌든 영화 속 남녀들은 나란 놈이 실제로는 이상한 놈인데 너는 그런 나를 알고 좋아하고 있는 거니, 라고 서로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현정의 가족은 개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현정의 사랑에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사랑은 부모, 종교, 친구, 이성과의 관계들이 모두 혼재되어 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을 이성과의 사랑과 비교하는 것을 종종 보지 않나. 결혼 뒤 낳은 아이에게 집착하는 것을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하고. 가끔 그런 생각한다. 여자들은 결혼을 도박처럼 하고, 남자들은 대학 가듯이 한다고. <사과>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우리의 관념에 대해 곱씹어볼 수 있는 기회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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