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왜 식민지 모던보이의 슈트는 더럽혀질 수밖에 없는가
2008-10-23
인물의 상징적 변화로 식민시대의 계급성을 나타낸 <모던보이>

식민도시 경성이란 꽤 매혹적으로 비칠 수 있는 공간이다. 도쿄와 상하이가 교차하고 제국의 엑조틱한 시선에 반응하며 세계(비록 언제나 제국이 매개되어 있었으나)와 호흡하던 그곳은 적어도 1980년대까지의 서울보다 훨씬 국제적인 도시였다. 서울이 끊임없이 이질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봉쇄시키며 스스로를 단일한 것으로 만들어나갔다면, 이미 그 자체로 이질적인 것들이 분리된 채 그러나 서로를 욕망하며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던 식민도시(경성에 대한 총독부의 정책은 시종일관 분리주의였다. 일본인 거주지역과 조선인 거주지역은 엄격하게 나눠져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 두 거주지역 사이에는 무수한 월경자들이 출현한다)는 결코 하나로 통합될 수 없는 다채로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모던보이>는 바로 그 풍경을 재현해낸다. 이 영화에 대한 평들이 한결같이 경성이 얼마나 잘 재현되었는가, 얼마나 매혹적인가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자신이 재현해낸 풍경에 매혹당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매혹적 전시는 또한 이 영화가 맞닥뜨리고 있는 곤혹과 연결되는 것이다. 다소 성급하게 말하자면 정지우는 공들인 CG의 덕택으로 그 스스로가 창조해낸 1937년의 경성이 매혹적이면 매혹적일수록 어떤 부채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 영화가 ‘이미지’로 남는다는 지적에 대해 그렇게 봤다면 이 영화는 완전히 실패라고 말한다. “사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아직도 위태로운 기분이 든다.” 이 말이야말로 바로 이 곤혹과 마주했던 자의 진심일 것이다). 이건 단지 일제강점기라는 표현이 여전히 유효하게 유통되는 이곳에서 저 엄혹한 시대를 절반의 코미디로 만들었다는, 혹은 반짝이는 소비의 이미지로 만들었다는 데 대한 가책, 그리하여 그 결과 친일파 총독부 관리가 여자친구의 대의를 이어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한다(이 부분은 원작과 가장 다른 부분이다)는 결말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정지우 감독이 맞닥뜨린 곤혹은 현재 이곳에서 식민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재현하려는 자들, 이른바 식민지 ‘모더니티’를 탐구하고자 하는 자들의 곤혹과 맞닿아 있는데, 그것은 이 작업이 이중으로 수행될 수밖에 없는 데에서 기인한다.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표상들, 그 자체로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를 만들고 다져간 이 확고부동한 표상(말 그대로 대표, 재현의 의미에서의 representation)에 흠집을 내고 그것을 해체한다. 배제된 것들의 목록 열거. 아무리 꼼꼼한 고증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객관적인 재현이란 불가능하다. 선택과 관련되어 있는 한 재현 자체가 이미 언제나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재현된 표면은 제국이 그토록 과시하고 싶어했던 근대화된 식민도시의 이미지와 겹친다(이를테면 이 영화의 초반부에 우리를 압도하며 다가오는 경성역은 제국의 철도청이 발행한 엽서에서 가장 많이 반복된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겹치는 이미지들 속을 탐사하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게 과연 가능이나 한 걸까?

먼저 말해두건대 이 영화와 같은 시간대를 서성거려본 자로서 나 또한 이 곤혹에 공감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따라서 곤혹의 공감대 위에서 쓰여진 이 글은 이 영화에 관한 해설로서도 평가로서도 부족한 것이다. 나는 다만 풍경을 재현하며 동시에 그 재현과 저항해야 하는 이 딜레마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고자 한 자취를 더듬어봄으로써 우리 앞에 놓인 곤란을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를 희망할 뿐이다.

끊임없이 더럽혀지는 모던보이의 의장과 몸

모던한 풍경을 만들어내면서 어떻게 동시에 이 풍경에 저항할 수 있는가. 이 까다로운 과제에 답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모던보이>는 명실공히 볼거리를 과시하는 영화이다. 비록 주의 깊은 고증과 세심한 인서트컷이 마치 코멘트처럼 배치되어 있지만(이를테면 조선경찰서 앞을 일군의 일본군들이 열을 지어 행군할 때 그 뒤를 한 어린 조선 소년이 일장기를 흔들며 따라간다) 관객의 주의란 그렇게 섬세하지 않으며, 얼마나 잘 재현되었는가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는 것은 영화관에서가 아니라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뒤적거리는 순간에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답은 서로 상반되는 풍경들을 모두 선택하는 것이다(이를테면 정지우 감독이 언급하고 있는 토막촌).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그러지 않았고 이 영화를 매끄러운 표면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대신에 그는 이미지가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의 변화에 집중해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게 이 영화의 전부라고까지 말한다. 이 언급을 바탕으로 이 영화의 핵심을 추리자면 총독부 도시계획과의 서기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아버지의 땅투기를 돕는 경성 제일의 바람둥이 이해명이 사랑하는 여인을 찾는 모험 끝에 독립투사로 ‘변모’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너무 단순한 게 아니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이야기가 그리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배우들의 감정의 동선이 그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그의 전작들을 생각해서 더더욱 으레 할 법한 이야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이야말로 식민지 공간을 재현하는 순간의 곤혹에 직면한 그가 그것이 성공했든 실패했든 정말로 진심으로 ‘인물’들을 통해서 이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리고 그것은 근사한 흰색 슈트를 차려입고 일본어로 환담하던 자가 ‘몸’과 직면할 수밖에 없는 순간의 이야기라고 이해한다. 이 슈트는 곧 엉망으로 더럽혀질 터인데, 그것은 이 매끄러운 재현의 표면을 상처입히는 결정적인 순간들을 제공할 것이다. 이 ‘더러운’ 장면들이 남자주인공의 변화와 관계맺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감독의 언급에 대한 방증이리라.

이 영화의 (혹은 원작에 있어서도) 매력은 바로 저 ‘엄혹한’식민지 시대를 통과하는 자가 ‘소년’이라는 데에 있다. 이해명은 식민지 남성 지식인(또는 이후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이라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표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한마디로 이 미숙한 소년은 금욕주의자도 아니고, 계몽주의자 남성 엘리트도 아니다. 그럼으로써 이 이야기는 댄스홀과 저항을 하나로 묶어서, 금욕의 영역을 모던의 미끈거림으로 교배시키고, 그리하여 급기야 꺼칠한 변비환자들의 묵적지근한 아랫배를 녹여준다. 그러나 이걸로 끝은 아니다. ‘내면의 변화’에 주목해 달라는 감독의 말처럼 소년은 성장해야 할 터인데 그것은 의장 속에서 몸을 발견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 영화에서 박해일이 줄기차게 밝은색 슈트를 고집하고 있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어떻게 이 옷들이 더럽혀지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이 옷과 구두들은 몽땅 도둑맞는데 그 덕에 그는 도처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양복이며 구두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혹은 더럽혀질 수밖에 없는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럽혀짐은 내부로부터 그리고 외부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말 그대로 물리적 오염이다. 그는 쇠똥밭을 구르고, 숲에서 여자와 물어뜯으며 난투극을 벌이고, 취조실에서 자신의 피로 셔츠를 더럽힌다. 쇠똥밭을 구르는 그와 마주친 이 순간 이후 눈물과 콧물과 침과 피가 이 남자의 슈트를 엉망으로 만드는데, 이 액체로 흥건한 두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모던한 풍경 한가운데로 분비물을 내뿜는 몸이 끌려들어오는 결정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숲에서의 난투신. 섹스신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자와 여자의 몸이 맞닿는 이 장면은 말 그대로 러브신이다. 그것이 비록 주먹과 발길질과 물어뜯는 이라고 해도. 취조실. 형사 둘이 번갈아가며 해명의 뺨을 치고 그의 귀를 가른다(솔직히 나는 이 장면이 좀더 길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해명의 대학동창,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신스케가 뺨을 때린다.

이 장면들이 중요한 이유는 해명이 비로소 이 순간 최고의 옷감과 재단으로 감싸여 있던 자신의 몸이 멍들고 피 흘리는 연약한 육체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조난실의 몸과 맞닿는 동시에 형사들의 고문에 찢겨지는 몸. 이 장면을 전후로 배우의 제스처는 미묘하게 달라진다(이 순간의 박해일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은 참 신나는 일이다). 제국대학 출신의 총독부 관리인 조선 최고의 엘리트는 형사들 앞에서 그리고 친구 앞에서 시종일관 ‘움찔’거린다.

그리하여 이윽고 해명은 그의 소년적 우정의 상대였던 신스케에게 다음과 같이 이별을 고한다. “우리는 피가 다르니까.” 이를 해명의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오해일 것이다. 이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것은 해명의 고문장면 직후에 배치되어 있는 명동성당에서의 오가이와의 만남이다. 조난실의 행방을 알기 위해 오가이를 찾아온 해명은 이 정신나간 남자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 오가이의 시선이 문득 해명의 고문으로 상한 귀에 머문다. 그의 귀 또한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다. 오가이와 해명은 상처입은 귀로 같은 ‘피’가 된다. 그런데 이 오가이는 원작에서 일본인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영화에서는 그가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고문이라는 경험이며 그 속에서 발견할 수밖에 없었던 ‘몸’이다. 따라서 신스케에게 이별을 고할 때 등장하는 ‘피’는 민족보다 조금 더 넓은 내포를 지녀야 마땅하다. 그건 어떤 비유도 상징도(이를테면 같은 피를 나눈 민족 운운) 아닌 말 그대로 ‘피’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함이 마땅하리라.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의장과 일본어에 의지했던 해명의 위장이 그가 날 것의 몸을 지닌 한 끝장날 수밖에 없음을, 혹은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그의 욕망이 바로 그 몸의 존재로 배반당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사실 “저는 일본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는 이 남자의 욕망은 그리 과장이 아니다. 이해명이 조난실이라는 미로에 빠져드는 1937년이라는 시간은 미묘하게도 제국의 이등신민이 드디어 제국의 ‘신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대두한 시기이기도 하다.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로부터 1년 뒤 조선에는 지원병 제도가 선포되고, 병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속에서 (일군의) 조선인들은 이를 근대와 함께 식민지가 도착한 이래로 그들을 주박했던 식민성으로부터의 탈피라는 기회로까지 인식해냈다. 그때 일본군이 되기를 열망했던 이광수의 한 아들은 우리에게도 조국을 주세요, 라고 울부짖기도 했음을 기억하자. 그런데 조국이란 언제나 죽음을 걺으로써 획득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국-국민이라는 상징을 내걸고 제국이 식민지인에게 요구한 것은 진짜 죽음이었으며, 국민의 가능성이라는 언설은 불현듯 대거 날것의 조선인들의 신체를 (병사라는 육체를 매개로) 불러온 것이다(해명의 의장을 벗어난 몸, 저 ‘움찔’거리는 신체를 1937년 이후의 이 일련의 과정에 대한 메타포로 읽어내는 것도 가능하리라).

만약 이 영화가 의장 속에서 몸을 발견하는 이야기, 혹은 그로 인한 성장의 이야기라면 바로 그 의장의 최고봉 연미복이 폭탄이 된다는 설정은 의장과 몸의 극적인 합치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해명을 바꿔버린 조난실은 옷을 짓는 여자이고 또 노래부르는 여자이기도 하다.

무대 뒤에 서는 여자로 대변하는 식민성

이해명이 옷입는 남자라면 조난실은 노래부르는 여자이다(사실 원작에서 조난실은 가수가 되고 싶어하지만 노래는 못하는, 그러나 춤 하나는 끝내주는 여자로 등장한다). 이해명이 거울 앞에 서는 남자라면 조난실은 무대 뒤에 서는 여자이다. 그녀가 무대 뒤의 여자라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이다. 테러리스트이자 여자로서(그녀는 테러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스스로 만들고 그 뒤에 서 있어야 한다) 조난실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비가시의 영역을 두어야 한다.

식민지 시대 대부분 사회주의자들로 점철되었던 저항자들의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예외없이 그들이 체포, 구금되는 순간들이다. 신문에 실리는 소식 한자, 혹은 특검의 공판기록. 그러니까 정확히 이들이 실패한 순간에야 그것도 법의 언어로만 그들은 가까스로 흔적을 남길 뿐이다. 게다가 거의 대부분이 남성인 이들 옆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역할이란 조력자이거나 기다리는 자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조난실이 너무 많은 이름과 너무 많은 직업 사이에서 스스로를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리라. 그런데 조난실을 정말로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그녀가 실제로 무대 뒤에 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조난실을 찾아 헤매던 해명이 이시다 료코의 야외 콘서트장에서 무대 뒤의 그림자를 보는 장면일 것이다. 일본어로 노래 부르기를 거부한 조난실은 얼굴 없는 가수, 그녀의 목소리는 이시다 료코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이 장면은 마지막, 해명과의 승강이로 난실의 노래가 끊기고 일본 가수가 말 그대로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장면과 대응한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이유는 여기에 이르러 이 영화의 미덕인 정치적 올바름이 식민지 공간의 재현을 넘어서 그 속으로 개입해 들어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코믹함은 갑자기 텅 비어버린 목소리를 채우지 못하는 식민자의 당황에서 비롯된다. 피식민자의 ‘모방’(mimic)의 메커니즘은 거꾸로 된 형태를 얻는다.

이 개입은 김혜수가 부르는 노래의 선곡에서 분명해진다. 구태여 1970년대의 한국 노래를(이 노래는 알다시피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부쳐 1972년 정미조에 의해 유명해진 <개여울>이다) 시침 뚝 떼고 일본어로 번역해서 1937년의 일본 노래인 척 부르다가 한국어 원문으로 돌아오는 이 일련의 과정은 그렇게 의도적으로 시간을 뒤섞음으로써 1937년의 시간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노래를 멈추고 폭탄 연미복을 입고 처음으로 무대 앞으로 나선다. 젠더와 피식민의 위치 속에서 비가시의 영역에 머물러야 했던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의 전면적 등장이다. 그녀는 그렇게 사라질 터이지만, 한번 가시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흔적으로서나마 결코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애써 재현된 식민도시 경성이 폭파된다. 뼈대만 남은 잔해들. 이 마지막 장면 이후 에필로그처럼 붙어 있는 유격대원 이해명의 장소가 경성이 아니라 어떤 산골처럼 보이는 것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경성은 이미 조난실에 의해 폭파되어버렸으니까. 물론 조난실이 자살 테러를 감행한 장소는 콘서트장에 불과했지만(조금 불평을 하자면 나는 이 장면이 훨씬 과격한 폭파가 되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공들여 완성한 저 매끄러운 표면은 그렇게 와장창 깨져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재현된 것은 과연 그 스스로를 배신할 수 있는가? 재현된 것이 재현된 것의 표면을 거스를 수 있는가? <모던보이>는 아마도 이에 대해 정면으로 답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우회적인 답변 또한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하나의 카드임에는 분명하다.

p.s 식민지 최고의 엘리트가 하루아침에 저항군이 된다는 이야기가 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데뷔작 <빛 속으로>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까지 오른 이중어 작가 김사량은 평양 갑부의 아들이자, 도쿄제국대학 독문과 출신이었으며, 그의 형은 총독부 고위관료였다. 1945년 학도병 위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간 김사량은 연안으로 탈출해 팔로군 조선의용군에 가담한다. 누군가는 해명이 유격대가 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김일성으로 유추되는 인물이 슬쩍 끼여 있었다면 더 현실감이 있었으리라고 주장했는데, 100% 동감이다.

이영재| 도쿄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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