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봉준호] 메시지를 따지자면 서로 만지자, 뭐 이런 얘기다
2008-10-22
글 : 문석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옴니버스영화 <도쿄!>의 봉준호 감독

봉준호 감독은 초췌해 보였다. (평소에도 그렇긴 하지만) 머리는 정돈되지 않았고, 수염은 웃자라 있었으며, 볼살도 홀쭉한 상태였다. 이런 그의 모습은 그리 낯선 게 아니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촬영하던 당시에도 그의 꼴은 비슷했다. 외모를 통해 보내는 신호처럼 그는 김혜자, 원빈과 함께 신작 <마더>를 촬영 중이다. 인터뷰를 가진 10월15일에도 그는 일정을 모두 마친 뒤 경남 고성으로 내려가 이 영화의 12회차 촬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날 봉준호 감독을 만난 건 <마더> 때문이 아니었다. 이날의 ‘공식 주제’는 미셸 공드리, 레오스 카락스와 함께 만든 옴니버스영화 <도쿄!>였다. 봉 감독이 만든 <흔들리는 도쿄>는 집 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한 히키코모리에 관한 30분 남짓한 영화다. 인터뷰를 위해 배정받은 시간 또한 이 영화 러닝타임과 비슷했던 터라 곧바로 딱딱한 질문을 던져야 했다.

-히키코모리라는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히키코모리라는 용어는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는데, 언젠가 씨네콰논의 이봉우 대표와 이야기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대표님은 <올드보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최민식이 15년간 갇혀 있는 설정에 대해 “일본에는 히키코모리가 매우 많고 15년 동안 방 안에서 만두도 먹고, TV도 보고 하는 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 일로 뭐 복수까지 하냐”고 하시더라. (웃음) 어느 도시나 외롭고 고독한 느낌은 있겠지만, 도쿄에는 그곳만의 위축된 느낌 같은 게 있잖나. 지하철 같은 데서 보면 사람들이 서로 닿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느낌이 있다. 닿지 않으려면 오그라들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사람들과 닿지 않으려는 세계의 궁극은 뭘까 하다보니 히키코모리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히키코모리를 주제로 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그러한 것을 표현하려다 보니 히키코모리가 동원된 느낌이다. 일본의 사회문제로서 히키코모리를 다루려는 건 전혀 아니니까.

-영화를 만들기 전, 당신은 사람이 한명도 없는 도쿄 거리의 사진들을 담은 <도쿄 노바디>라는 사진집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영화에 그런 장면도 실제로 나오더라.
=<도쿄 노바디> 또한 이 영화를 만드는 데 강한 자극을 줬다. 텅 빈 시부야, 신주쿠 같은 거리를 보면 기분이 묘하다. 그런데 만약 도쿄 시민 모두가 히키코모리가 되면 이런 광경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스토리가 그렇게 막 엮이게 되더라.

-그 사진집을 찾아봤는데 신기하긴 하더라.
=그게 CG가 하나도 사용되지 않은 거란다. 나카노 마사타카라는 작가인데, 그는 매년 1월1일 텅 빈 거리에 나가서 그런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그럼 이 영화의 텅 빈 거리 장면은 어떻게 찍었나.
=CG의 도움을 약간 받았다. 우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골목길 장면은 행인을 통제해서 찍은 것이다. 큰 거리 장면은 모두 사람과 자동차가 가장 적은 월요일 새벽에 찍었다. 일요일 새벽은 토요일 밤부터 술을 마신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 안 된다고 하고. (웃음) 시부야의 하치코마에와 거기서 멀지 않은 도심에서 촬영을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찍힌 사람과 자동차는 한국 CG업체에서 지워줬다.

-아오이 유우의 몸에 버튼이 달려 있는 게 굉장히 특이했다.
=시나리오 초고에는 버튼이 없었는데, 2고부터 만들었다. 히키코모리는 집 안에만 살지만 요즘 세상에선 모든 게 집에서 가능하잖나. 인터넷도 있고 전화도 있고. 하지만 유일하게 불가능한 것은 접촉이다. 그런데 이건 11년간 집에 있던 자존심 강한 히키코모리를 신체적 접촉으로 한방에 무너뜨린다는 이야기다. 가가와 데루유키는 사람과 닿는 게 싫어서 히키코모리가 된 사람이라 웬만하면 접촉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문신으로 그려진 버튼은 이 사람을 접촉의 세계로 유도하는 수단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버튼은 대개 감정상태에 관한 것이다. ‘히스테리’, ‘글루미’… 뭐 이런 식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자세히 보면 ‘히스테리’처럼 나쁜 감정은 정지 버튼이 그려져 있고 ‘러브’처럼 좋은 것은 플레이 버튼이 그려져 있다.

-30분이라는 시간적 제한이 제약이 되진 않았나.
=나의 예전 단편영화 <지리멸렬>이 30분이었다. 이 영화도 30분이지만 이야기의 밀도는 나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야기의 밀도가 허전한 것은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래서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층이나 스펙트럼이 두텁지는 않지만 ‘현미경으로 찍는 영화’라는 느낌으로 찍었다. <마더>도 그렇지만, 요즘은 버라이어티한 것이 싫다. 주제건 형식이건 뭐가 됐건 하나였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이 영화에는 육체적 접촉이 두번 나오는데, 가가와 데루유키는 접촉을 통해 변화를 겪는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건 아니라고 하건 상관이 없다. 하여간 마지막에 아오이 유우를 집 밖으로 끄집어내려고 하니까 사랑이라 말해도…. 사실 애초 시나리오에는 두 사람의 좀더 강한 접촉장면이 라스트신에 있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두 사람 사이에서 뭔가 시작되려고 할 때 또다시 온 천지가 흔들리면서 끝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게 30분짜리 영화의 호흡에도 맞을 것 같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지진은 일본의 자연현상이라기보다는 가가와의 내면과 연관된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마음이 흔들린다고 하잖나. 글쎄 일본 사람들이 보면 기분 나빠하려나. 자기들에게는 정말 대재앙인데 말이다. 어쨌거나 라스트신, 라스트컷, 라스트숏의 지진은 정말 물리적인 지진과 마음의 흔들림의 경계선이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는데 어떻게들 느꼈는지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나면 감독 자신이 사람들에게 ‘집 밖으로 나와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 굳이 억지로 메시지를 따지자면 서로 만지자, 뭐 이런 얘기다. (웃음)

-가가와 데루유키를 캐스팅한 이유는 뭔가. 아오이 유우에 어울리는 꽃미남 배우를 선택했을 수도 있는데.
=이를테면… 오다기리 조? 아니 그렇게 생긴 사람이 왜 히키코모리가 됐겠냐. (웃음) 사실 나는 <유레루>를 보고 가가와에게 한눈에 반했다. 특히 주인공 캐릭터가 히키코모리이다 보니 혼자 있는 장면이 많다. 당연히 몸짓이나 작은 표정 하나로 표현할 부분들이 많지 않겠나. 그런데 <유레루>에서 가가와가 너무 훌륭했다. 법정장면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손동작, 빨래를 개며 오다기리 조를 바라보는 묘한 자세와 눈빛, 감옥에 간 뒤에 혼자 체조를 하는 쓸쓸하면서 이상한 몸짓 등등. 한마디로 저 배우는 몸을 쓸 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점이 확신을 갖게 했다.

-아오이 유우를 짝으로 내세운 것은.
=골수 히키코모리를 한방에 파괴해버릴 수 있는 위력, 그렇다면 역시 아오이가 아니겠는가. 또 그런 아오이 대신 누군가 피자를 배달해주는데 누가 와야 뜨악하고 경악스러울까, 그건 당연히 다케나카 나오토가 아닌가. 그런 순차적인 과정으로 캐스팅을 했다.

-이 영화를 찍는 데 얼마나 걸렸나.
=22일이다. 그중 21회차를 찍었다. 일본 현장은 원래 잘 안 쉰다더라.

-<도쿄!> 속 다른 감독들의 영화도 봤나.
=칸영화제에서 처음 봤다. 공드리의 영화는 자기 여자친구의 만화영화 원작을 갖고 만들었는데, 원래 그 원작은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일본이나 도쿄와 연관된 특별한 지점은 없었지만, 공드리다운 소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님 영화는 굉장히 궁금했다. 사실 그가 나와 옴니버스영화에 함께 묶였다는 것도 굉장히 초현실적이고 이상하다. 내가 고등학생 때 <나쁜 피>를 봤고, 대학교 2학년 때 <퐁네프의 연인들>을 봤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분은 9년 동안 영화를 못 찍었잖나. 칸에서 셋이 함께 인터뷰하고 그럴 때 짬짬이 시간이 나면 그 양반이 그러는 거다. “야 미셸이랑 봉, 너네는 내가 9년간 영화를 쉴 동안 데뷔했더라. 나는 그동안 영화가 계속 엎어졌는데.” 그러면서 굉장히 긴장하더라. 9년 전 칸에서 <폴라X>를 상영했을 때 프랑스와 유럽 언론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기억 때문인 것 같았다. 그분은 솔직하게 그러더라. 사실 자기는 도쿄라는 도시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오로지 9년 만에 영화를 찍어서 긴장되고 초조하다는 말만 하더라. 상영을 한 뒤 프랑스 매체에서 좋은 리뷰가 나오고 반응이 좋으니까 기분이 풀어져서 그 다음날부터 어찌나 친절하게 대해주시는지…. (웃음)

-이 바쁜 와중에도 <미쓰 홍당무>에 출연했다.
=내가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서 3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첫째가 임필성 감독의 <멋진 신세계>다. 아직 덜 만들어진 <인류멸망보고서>라는 옴니버스영화 중 한편인데, 거기에 ‘보복 캐스팅’당했다. <괴물> 때 임필성 감독을 뚱게바라로 출연시켰잖나. 그래서 내가 거절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임필성 감독이 사이비 시민운동단체 관계자 역할을 시켰다. 그 영화에서 나는 수염을 기르고 개량한복을 입은 채 심야토론에 나가 기타를 친다. <미쓰 홍당무>는 이경미 감독을 워낙 잘 아니까 출연하게 됐다. 영상원 때 내 수업도 들었던 친구고, 미쟝센단편영화제를 통해서도 봤고, <괴물> 때 연출부를 할 뻔했던 친구다. 처음에는 피부과 의사 역할을 하라고 했는데, 그건 너무 역할이 커서 작은 쪽으로 가게 됐다. 또 <비열한 거리>의 조명감독이자 <살인의 추억>에서 조명 퍼스트를 했던 강대희라는 친구가 단편영화를 찍었는데 거기서는 한강 잠수교에서 자살하는 역할로 나왔다. 아, 이제 출연은 안 할 거다.

-아니 왜? 연기를 잘하던데.
=무슨 말이냐. 이젠 민폐를 그만 끼쳐야겠다. 어쨌든 출연을 하다보니 공부가 되는 것 같다. 감독이 내게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는데 어떤 얘기는 귀에 쏙 들어오지만 어떤 얘기는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 돌이켜보면 철렁하는 거다. 나도 만날 저런 소리를 했는데….

-<마더> 촬영은 잘되고 있나.
=총 84회차인데 어제까지 11회차 촬영을 했다. 현재까지는 날씨도 잘 도와주고 스케줄대로 잘하고 있다. 김혜자 선생님도 합류하셔서 촬영 중이다.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촬영하는 게 너무 좋다고 하신다. 현재 예정으로는 내년 1월30일 촬영을 마칠 예정이다.

-이번에도 <살인의 추억> 때처럼 전국을 순회하면서 촬영한다던데.
=<살인의 추억> 때 촬영장소가 50몇 군데였다더라. 이번에는 세보니까 23개더라. <살인의 추억> 때는 촬영지가 거의 다 전라도에 흩어져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국을 다 아우르고 있다는 게 어려운 점이긴 하다. 장소 이동을 하면서 스탭들의 피로가 쌓일 텐데. 고유가 시대라 이동하는 데 드는 비용도 걱정이다.

-당신은 항상 한 영화를 찍으면서 이후 만들 영화를 구상해왔다. 지금은 <설국열차> 외에 어떤 영화를 구상 중인가.
=<설국열차>는 너무 오래전에 발표해놓아서 괜히 마음이 급해지는 게 있다. 사람들이 왜 그걸 아직도 안 찍고 있냐고 자꾸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일단 SF소설가를 기용해서 대본을 썼는데, 본격적인 시나리오는 <마더> 끝난 뒤 내가 쓸 계획이다. 아무래도 SF소설가이다 보니 과학적인 기초가 탄탄하더라. 이를테면 외부온도가 영하 50도라면 기차 내부온도는… 뭐 이러면서 굉장히 과학적이다. <설국열차> 이후의 프로젝트도 구상 중인 게 있는데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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