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우리도 양미숙과 놀고 싶다
2008-11-06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진정으로 관객들과의 공감대를 허락하지 않는 <미쓰 홍당무>

2008년 하반기 한국영화계의 주목할 만한 데뷔작으로 이경미의 <미쓰 홍당무>를 꼽는 추세다. 호평은 이어지며 이론(異論)은 찾아보기 힘들다. 몇몇 평자는 이 영화의 결함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단서를 단 뒤 다시 가치의 복권을 위해 애쓰는 편이다. <미쓰 홍당무>는 사실 기발한 인물의 출현 자체보다는 인물과 그 역을 맡은 배우의 조화가 돋보이는 영화다. 그렇지 않고 시나리오상에서 성립된 캐릭터만 두고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오래전에 이미 <엽기적인 그녀>가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양미숙 정도의 캐릭터 설정은 매일 밤 텔레비전 앞에만 앉으면 볼 수 있는 시트콤 드라마에서도 있어왔다. 간단하게 김병욱의 시트콤에 출연한 배우 박영규의 역할을 상기하면 된다(그는 양미숙에 버금가는 자뻑과 진상과 콤플렉스의 캐릭터이며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변덕이 죽끓고 화를 자주 내서 같이 있기 불편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미쓰 홍당무>에 공감할 만한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공효진이라는 본능적으로 뛰어난 배우가 양미숙이라는 기발한 인물에 놀랄 만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경미는 그 대신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에 얼마간 깃들어 있던 자기의 중요한 무엇을 잃고 새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기이한 영화였다. 거기에는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을 영화의 형식을 빌려 시도하고 있었다. 칼을 품고 있던 나를 누군가가 툭 치고 지나가서 내가 다친 것이라면 그건 어설프게 칼을 품고 있던 나의 잘못인가 나를 쳐서 다치게 한 그 누구의 잘못인가. <잘돼가? 무엇이든>의 꿈장면에서 제기되었던 화두다. 이 영화에서 이경미는 두 여성의 아이러니한 경쟁심과 연대감을 끌어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려고 애썼다. 어떤 답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 영화적인 간절함이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즉각적인 인상으로 말하자면 이경미의 장편 데뷔작 <미쓰 홍당무>에는 그 간절함을 지키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으며 어떻게든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구조를 진전시키는 데 더 급급하다. 간절함의 부재가 뭔가 영화 전체를 의미심장한 코미디가 아니라 시끌벅적한 단순 소동극으로 그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쓰 홍당무>의 공감대는 대략 세 가지 점에서 형성된다. 장르영화 안에서 여성들의 심리와 담화를 잘 풀어냈다는 점과 돌발적이고 유별난 캐릭터 양미숙이 있다는 점과 그녀를 포함한 다른 인물이 연합하여 폭발적인 웃음을 끌어내는 코미디라는 점이다. 이때 여성성의 문제는 따로 떼어 말할 수 있지만, 캐릭터는 코미디라는 범주 안에 있는 핵심이기 때문에 둘은 함께 말해져야 할 것이다.

그녀는 과연 여성성을 대변하는가

먼저 이 영화가 여성성의 무엇인가를 획기적으로 대변한다고 인식되는 건 무척 모호한 구석이 있다. 다른 어떤 분석에 앞서 이 영화의 서사를 생각해보면 된다. 고등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던 양미숙은 좌천되어 중학교 영어 교사로 내려간다. 그녀가 학생에게도 선생에게도 인기가 없는 왕따이기 때문이다. 외양이 그다지 호감을 주는 편이 아닌데다 자기의 콤플렉스를 공격적이고 비꼬인 방식으로 내지르는 성격이다. 또 그만큼 위축됐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서종철을 좋아한다. 서종철은 양미숙의 고3 당시 선생이었다. 수학여행 때 반 아이들 모두가 양미숙을 따돌릴 때 오직 서 선생만이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뒤로 양미숙은 서 선생을 좋아하게 됐고, 같은 학교로 부임한 다음에는 계속 그를 짝사랑한다. 하지만 서 선생은 관심이 없고 양미숙만 그렇다. 양미숙은 같은 러시아어과 선생이었던 이유리가 서 선생과 내연의 관계라는 걸 알게 되자 중학교에 다니는 서 선생의 당돌한 딸 서종희와 한팀이 돼서 둘을 갈라놓으려고 한다. 이것이 <미쓰 홍당무>의 대강의 스토리 라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 영화에는 없는 황당한 가설을 제안해보자. 만약 양미숙이 일하는 학교 옆에 남학생들만 다니는 중·고등학교가 있다고 치자.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남자 선생 양미석이 있다고 치자. 그는 왕따다. 학생도 선생도 모두 그를 꺼린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수학여행 때 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때 미모의 여자선생님이 그를 챙겨주었다. 그 뒤로 양미석은 그 미모의 선생님을 사랑하게 됐고 같은 학교에 선생으로 부임한 뒤에도 계속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여선생은 동료 젊은 남자 선생과 바람을 피우는 중이다. 양미석은 그 둘을 떼놓고 싶어하고, 마침 이 학교에 다니는 그 여선생의 아들과 함께 방해공작을 펼치기로 한다.

사람이 비상식적인 예를 들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미쓰 홍당무>의 여성성을 설명하는데 왜 이런 황당한 치환이 필요하겠는가. 여성주인공을 남성주인공으로 치환하는 이 설명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무엇보다 이 가설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감성의 디테일 문제에 있을 것이다. 여성적 감성의 디테일이 남성적 감성의 디테일로 결코 변환되지 못할 것이라는 데 있다. 그건 구조로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 문제는 <미쓰 홍당무>에 여성성에 대한 화두나 담화가 충분히 있다는 가정하에서만 그러하다. 그런데 <미쓰 홍당무>에 그와 같은 여성적 감성의 디테일에 대한 탐구가 정말 있는가. 이 영화의 수다나 담화를 여성 심리의 전유물로 볼 수 있지만, 양미숙과 서종희 사이에 오가는 몇몇 대화란 특별할 게 없으며 그걸 여성성의 화두에 걸맞게 더 깊이 파내려가지도 않는다. 나는 지금 양미숙과 서종희가 여성 짝패로서 어떤 여성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걸 남성 짝패로 바꾸어도 이 영화가 거의 손실을 입지 않음을 말하는 중이다.

<미쓰 홍당무>는 여성적 감성의 디테일과 그걸 보장할 만한 요소를 그다지 중요하게 강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번 시작된 이야기는 끝없이 반전을 거듭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때 이 영화는 감성의 디테일이 아니라 대사가 꼬이고 인물이 폭발하고 신이 서로 부딪치는 코미디 구조에 더 천착한다. <미쓰 홍당무>가 그 구조를 빌려 제기하는 문제라면 성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우리’와 ‘쟤들’이라는 이분 범주의 문제다. 이 문제는 다시 말해져야 할 것이다.

이 영화가 강력한 코미디라고 할 때 캐릭터가 핵심이자 요체인 건 분명하다. 양미숙이 중심이다. 그리고 양미숙이 주로 하는 짓은 알려진 것처럼 삽질이며 양미숙의 삽질이 양미숙의 캐릭터다. 양미숙은 히키코모리가 아니다. 히키코모리에 대한 역설이다. 누군가가 양미숙처럼 수세적일 만한 상황에 놓일 경우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가버리는 대신 그걸 공격적으로 드러낸다면 얼마나 재미있게 보일까라는 상상이 이 영화의 애초 전략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양미숙은 그 상상으로 태어난 인물이며 당연히 그에 따른 실천을 한다. “세상이 공평할 거란 기대는 버려. 우리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해”라거나, “종희야 너 착하게 살지 마라. 그럼 사람들이 너한테 못되게 군다. 못되게 굴면 착하게 군다”라고 일장 연설을 한다. 또는 양미숙의 휴대폰에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쓰여 있다. 무엇보다 그 제어되지 않는 비뚤어짐으로 무한 삽질을 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양미숙의 흥미로운 캐릭터다.

억지로 들어와서 노는 언어의 유희들

그런데 <미쓰 홍당무>가 캐릭터 영화로서 성공적이고, 그 캐릭터가 바로 양미숙이라고 할 때 잘 지적되지 않는 이 영화의 매우 중요한 전개 방식이 한 가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미쓰 홍당무>의 구조적 전개를 말할 때 거의 모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양미숙만 삽질하는 게 아니고 등장인물 전부 삽질한다. 그러니까 그 삽질의 정체가 무엇인가 묻는 건 당연하다. 삽질은 착각하는 상황, 착란으로 생기는 믿음에 대한 일종의 은어에 불과할 것이다. 중요한 건 이 영화의 모든 코미디의 동력을 끌어가는 것이 바로 이 착각과 착란이라는 점이다.

착각과 착란이 <미쓰 홍당무>의 코미디를 만드는 기술적인 모든 것이다. 무수히 많은 예가 있지만 몇 가지만 들어보자. 우선 청각적인 착각 기호. 첫 장면에서 우리는 양미숙이 분명 정신 상담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피부과 의사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는 중이다. 또는 시각적 착각 기호. 우선 양미숙이 지금 엉뚱한 짓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을 영화는 실제로 양미숙이 땅을 파고 있는 장면으로 시각화한다. 혹은 영화에서 양미숙과 서종희가 힘을 합쳐 이유리를 놀려먹을 때 그들이 사용하는 것은 주로 메신저와 전화 문자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이 시각적 도구를 통해 이들은 잘못된 정보와 기호를 이유리에게 전달하고 사건은 계속 이어진다.

또는 음성적 착각 기호도 있다. 서종휘는 이유리를 협박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데 그때 이 아이의 목소리는 음성 변조되어 있다. 이런저런 것들이 많지만, 가장 중요하게 웃음의 코드로 유용하게 쓰이는 건 라이터의 러시아 말인 ‘좌지깔까’다. 양미숙과 서종희는 마치 서종철이 러시아어로 라이터(좌지깔까)라고 말해달라고 한 것처럼 이유리를 속인다. 극장에서 관객이 가장 많이 웃는 지점이다. 누가 봐도 “당신은 나의 라이터” 운운하는 이 부분은 좀 억지스럽다. 이 영화는 언어의 유희에 남다른 재능을 갖는데 이 순간만큼은 유치하게도 기어코 어울리지 않는 낱말을 가져온 것이 이상하다. 그건 라이터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무리한 흐름을 인정하면서라도 좌지깔까라는 말을 꼭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는 뭔가 착각과 착란을 위해 억지로 들어와 있는 것들이 있다.

사실 착각과 착란은 양미숙의 모든 것이다. 양미숙은 실은 아무 일도 없었음에도 “제제제작년 고깃집에서의 회식 뒤에 티코에서 있었던 일” 운운하며 혼자 서종철과의 관계를 착각하고 있다. 그때 서종철 선생은 술에 취했고 어쩌다 좁은 티코에서 잠깐 손이 양미숙의 귓불을 스친 것뿐이지만 양미숙은 그게 서로의 사랑의 밀어였던 것처럼 진심으로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건 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심리적 착각 기호인 셈이다. 그리고 양미숙과 서종희는 공연장에서 아이들이 던지는 밀가루와 쓰레기 등을 애써 자기들을 위한 환호로 착각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이 모든 착각의 기호를 날려버리는 것은 어학실 장면이다. <미쓰 홍당무>는 이 장면에서만 거의 20분을 쏟으며, 그동안 이리저리 꼬아놓았던 착각과 착란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으로 설정한다.

감독 이경미는 <미쓰 홍당무>에 관한 어느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찰리 채플린과 어떤 영향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녀가 어떤 의미에서 찰리 채플린을 거론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면 닿는 점이 없진 않다. 채플린이 바로 착각과 착란의 대가다. 예컨대 그의 어느 영화에서 찰리는 아내에게 버림받는다. 카메라는 그때 찰리의 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가득 차 우는 것 같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뒤돌아섰을 때 진실이 밝혀진다. 찰리는 그냥 칵테일을 흔들고 있을 뿐이다! 이건 아주 단순한 예다. 채플린은 이 문제를 더 중요한 쪽으로 끌고 간다. <시티 라이트>에서 장님 소녀가 갑부 찰리와 떠돌이 찰리를 소리의 착각 기호로 오인하고 또 구별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무엇보다 <위대한 독재자>에서 유대인 이발사 찰리와 히틀러를 빗댄 독재자 찰리를 사람들은 그 콧수염 하나 때문에 착각했다. 들뢰즈는 “작은 유대인 이발사와 독재자의 차이는 두 개의 콧수염만큼이나 작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로부터 엄청난 거리를 지닌 두 가지 상황이 생겨나는데 그 둘은 희생자와 도살자의 차이만큼이나 서로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 차이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로 발전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경미가 찰리 채플린의 이런 면모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지는 않다. 뿌리는 다른 곳에 있다.

이경미가 거론하지 않았지만 <미쓰 홍당무>의 구조와 유사한 건 채플린의 영화가 아니라 박찬욱의 영화다. 한국영화에서 착각과 착란으로 영화의 묘미를 만들어내는 대가는 박찬욱이다. 어딘지 모르게 <미쓰 홍당무>를 보고 제작자 박찬욱의 영향력을 말하는 게 다들 상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걸 말하지 않는 게 더 상투적이다(박찬욱은 이 영화의 공동 각본가로도 크레딧에 올라 있다). 박찬욱은 고래와 진달래를 같다고 생각할 때 영화 속 세계가 재미있어진다고 본다. 그것만으로 테마를 꾸려 만든 것이 바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아니었나. 그 밖에도 유사성은 더 있다. <미쓰 홍당무>의 초반부 인물 소개방식과 특히 ‘대단원의 무대화’라는 개념이 그렇다. 둘 중에서도 대단원의 무대로서 쓰이는 어학실신이 특히 그렇다. 이 영화는 어느 모로 보나 박찬욱적인 요소들을 고스란히 가져왔으며, 이때 <미쓰 홍당무>는 박찬욱 영화에 대한 충실한 습작에 가까워진다. 무엇보다 ‘착각과 착란을 따라가다 마주친 판단의 유보’라는 박찬욱의 엔딩방식을 이경미는 거스르지 않고 있다. 어학실에서 양미숙은“사모님 2번 새 출발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이제 서종철에게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는데, 그렇다면 이때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일까?

“괜찮아 괜찮아 착각해도 괜찮아"

<미쓰 홍당무>가 양미숙의 아픔을 치유한 사이코드라마로 이해되고 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물론 양미숙이 치유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미궁에 남겨지는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다. 이 문제는 만듦새와 상관없이 영화 스스로 짜낸 치유의 구조가 마침내 어떻게 마무리되는가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우리는 여전히 그녀 양미숙에 관해 알고 있는 사항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이해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건 당신의 착각이고 착란이다. 우리는 정말 양미숙을 이해했는가?

이경미가 자기의 주인공 양미숙을 소홀히 다뤘다는 뜻이 아니다. 이경미가 양미숙이 처한 상황인 왕따 현상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 영화가 양미숙을 돌보지 않았다는 그런 윤리적 비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 윤리적 비판을 지금 하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영화는 이분의 선택을 강요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와 쟤들의 명확한 구분이 있다. 우리는 서종희를 따돌린 다음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운 리본을 목에 매고 바보 같은 춤을 추는 학생들처럼 쟤들 중 한명일 가능성이 더 크다. 양미숙과 서종희가 우리의 모습 일부인가. 아니 그건 판타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해몽의 삽질이다. 양미숙과 서종희에 공감할 만한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결코 웃지 못한다. 그들이 못 웃기 때문에 우리가 웃는다.

우리가 이때 실컷 웃고 나서도 할 수 있는 비판 한 가지가 있기는 하다. 이경미 당신은 왕따를 윤리적으로 돌보지 않았어, 왜냐하면 그 소재로 우리를 웃겼기 때문이지, 당신은 양미숙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어, 그건 너무 비윤리적이야, 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비판이 비평적 클리셰이며 뻔한 불평이라고 본다(물론 이 비평적 클리셰조차 지금으로서는 거의 아무도 제기하지 않지만…). 왜냐하면 양미숙을 접할 때의 웃음은 재난영화와 공포영화의 괴물을 볼 때의 심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저 괴물이 나의 안방을 넘어 나의 신체를 뚫고 들어오지는 못하리라. 저 찰거머리 같은 인간이 나의 동료, 나의 스토커는 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영화가 사악하다고 말하는 건 너무 뻔한 불평이다. 우리는 장르영화 속 괴물을 보고 나서 저 괴물을 저렇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며 윤리적인 고민을 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의 핵심은 그러므로 이경미가 왕따를 우습게 그린 것이 아니다. 충분히 상상적인 지평 내에서 기발한 방법으로 그려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그걸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경미가 마침내 우리를 향해 너희들은 끝까지 이 왕따를 잘 모를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양미숙은 서종희를 데리고 피부과 의사 박찬욱을 찾아간다. 그를 찾아가 “난 네가 참 마음에 든다” 고 말한다. 서종희의 엄마 아빠, 그러니까 서종철과 성은교가 그 말 한마디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는 걸 양미숙은 들어 알고 있다. 양미숙은 지금 의사 박찬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중이다. 의사 박찬욱이 그걸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양미숙은 그가 그걸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관심사가 아니다. 자기의 심정을 당당하게 고백하면 된다. 물론 이제 양미숙은 자신있게 말한 다음 퇴짜를 맞을 수도 있다. 의사 박찬욱의 표정을 보명 백발백중 퇴짜를 놓을 것도 같다. 그렇다면 양미숙은 이제 그래 알았다며 뒤돌아 나올 것인가. 이 장면의 표면적인 의미는 양미숙이 이제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마지막 장면이 바라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 양미숙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영화적으로 가늠할 수 없는 상태다. 내게는 양미숙이 박찬욱을 찾아낸 다음 거기서 자기의 할 말을 하고 그냥 멈추는 것으로 짜여진 이 영화적 설정이 더 중요해 보인다. 이 때 마지막 웃음을 바라는 이경미의 바람이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삽질의 이유가 아니라 삽질 자체가 중요한 영화입니다, 라고 끝까지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다름 아니라 양미숙의 마지막 삽질에서 끝나는 것이다.

이건 삽질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 고백이라고? 아니 그렇지 않다. 양미숙은 몰라도 우리는 의사 박찬욱이 그녀를 피해 도망갔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양미숙에게는 사랑고백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녀의 삽질이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 담긴 많은 행위를 대표하는 환유로 보인다. 서종희라는 친구가 생겼고 새 출발을 한다는 뜻은 표면적으로만 중요할 뿐이다. 이 영화의 욕망은 어쩌다 슬프게 삽질하게 된 양미숙이 아니라 끝까지 귀엽게 삽질하는 양미숙이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양미숙은 삽질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혼란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서종철을 쫓아다닌 것에도, 혹은 그 밖의 모든 행위에도 정말 이유가 있기는 했던 걸까? 인물 양미숙에게 이유가 있었다면 감독 이경미에게도 이유가 있었을까? 이 영화가 우리에게 설명한 양미숙에 관한 모든 것에 딱히 다 이유가 있기는 한 걸까?

양미숙은 내 생각에 이 영화에서 끝까지 미지의 인물로 남는다. 다만 이런 메아리는 남는다. 괜찮아 괜찮아 홍당무지만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삽질해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착각해도 괜찮아. 오로지 이게 이 영화의 전갈이다. 나는 이 점이 허망하다. 양미숙이 고아였고, 왕따였고, 가난했기 때문에 저러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판단이 유보되고 무효화될 때 그동안의 삽질의 우스꽝스러움은 원인을 상실하고 그 치유성 바깥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그동안 놀림을 받은 건 양미숙이 아니라 삽질의 이유를 모르고, 삽질을 위한 삽질(농담을 위한 농담)을 하는 양미숙을 보며 시간을 허비한 우리가 아닌가. 양미숙이 아니라 시간을 허비한 우리가 왕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게 이 영화의 허망함이다. 한편으로는 비하하면서(비윤리적이라는 지탄을 감내하면서까지),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윤리적이려고 애쓰면서까지) 우리는 웃음 속에 이 영화를 따라왔지만, 만약 비하한 것도 아니고 이해한 것도 아닌 채로 도대체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가 판단을 잃고 말았다면, 우리의 그 웃음은 시트콤 드라마를 보고 나서 채널을 돌리는 그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2시간짜리 시트콤을 극장에 앉아서 보고 환호를 보내야 하는가.

이상하게도 올해 한국영화가 발견한 귀중한 신예라고 하는 두 남녀 감독 <추격자>의 나홍진과 이경미의 <미쓰 홍당무>는 전혀 다른 장르에서 유사한 주인공에 대한 매혹을 갖고 있다. 둘 모두 주인공이 설명되지 않는 괴인이어야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나홍진과 이경미는 둘 다 콤플렉스 덩어리 인물을 내세운 다음 그 원인을 굳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거나 그 행동만을 거듭 보여준 뒤, 그 인물로부터 우리를 차단하고 판단을 유폐한다. 즉, 장르적 규칙성 안에서 어떻게 그걸 두려움(<추격자>) 또는 웃음(<미쓰 홍당무>)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의 기술적 문제에만 오로지 집중한다. 그러므로 이 때 더 시급한 문제는 윤리의 공란이 아니라 그걸 동반하고 찾아오는 형식의 무기력이다. 이 무기력한 웃음의 상영시간을 즐긴 다음 환호하는 건 그래서 아무래도 억울하다. 이경미는 양미숙과 같은 편을 먹고 ‘우리’라고 정한 다음, 끝까지 영화를 보는 우리는 ‘쟤들’로 남겨둔다. 우리도 양미숙과 놀고 싶다. 양미숙, 넌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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