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리 고헤이 감독이 한국에 왔다. 국내에선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 <잠자는 남자>의 연출자로 조금 알려졌을 뿐이지만 오구리 감독은 1980년대 쇼치쿠 누벨바그 시대에 등장해 독창적인 영화 화법으로 주목받은 일본의 거장 중 한명이다. 데뷔 이후 28년이 지났지만 연출작은 단 5편. 시대를 천천히, 그리고 진중히 관찰하며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해온 오구리 감독을 만났다. 11월6일부터 12일까지 아트하우스 모모에선 그의 전작을 상영하는 ‘오구리 고헤이 감독 영화제’(주최: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주)영화사 백두대관)가 열린다.
-2001년 광주국제영상축제에서 네번째 작품인 <잠자는 남자>까지가 상영된 적은 있지만 국내에서 당신의 전 작품이 상영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01년 이후 겨우 한편 더 늘었다. (웃음) 사실 일본영화가 한국에서 해금된 지 꽤 지났지만 꼭 봐줬으면 하는 영화들이 보여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른 문화부문에도 양국의 교류가 있지만 뭐든 비즈니스에만 치우치면 제대로 된 교류가 힘들어진다. 이번에 이렇게 내 모든 작품들을 천천히,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서 무척 기쁘다.
-<매목>과 <잠자는 남자>는 예전에 봤었지만 <진흙강> <가야코를 위하여> <죽음의 가시>는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처음 봤다. <죽음의 가시>를 경계로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이 변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죽음의 가시>보다는 그 전작인 <가야코를 위하여>가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진흙강>은 그냥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직설적인 방법으로 했다. 하지만 <가야코를 위하여>를 하면서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알다시피 재일동포 이회성씨의 소설이 원작이다. 그런데 이런 민족적인 이야기, 재일의 문제는 그 절실함이 일본인들에겐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나 역시 일본인이기 때문에(오구리 고헤이의 부친은 일제시대 한국에서 경찰을 한 적이 있으며 그의 모친은 재일동포, 그의 아내도 재일동포다.- 편집자) 이런 이야기를 영화 소재로 택했을 때 그 근거가 무엇이냐는 문제에 부딪힌다. 나아가 영화로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더라. 두 번째 작품을 하면서 생각했던 거다. 그리고 세 번째 영화 <죽음의 가시>에선 확실히 그 변화를 담기 시작했다. 영화는 일본 속담으로 “개도 먹지 않는 부부싸움” 이야기인데 부부싸움이 중요했다라기보다 그 표면적인 것 뒤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에서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 앞과 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 그런 게 키(key)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만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죽음의 가시> 이후엔 이전 영화에서 보여지던 전후 상황, 재일한국인의 문제, 일본의 근대화 등 사회적인 이슈가 표면 뒤로 물러서 있다는 느낌도 든다.
=나는 역사적, 사회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역사적, 사회적인 존재만으로 인간의 내면이 포착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죽음의 가시>에도 사회적인 텍스트가 있고, <잠자는 남자>에도 동남아시아 여성이나 재일한국인 어머니가 등장한다. 이 영화들이 사회, 역사적으로 관련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시대가 이제는 이 모든 걸 말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고 느낀다.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싫을 정도로 영상을 보고 지내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말로 무언가를 전해도 울리지 않는다. 영상에 둔감하게 되었고 느끼는 게 불가능하게 되었다. TV와 영화도 어떤 의미에선 액션·대사만 가득한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고. 그래서 나는 장소로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사회, 역사적인 텍스트로 말하는 게 아니라 그 공간 안에 그냥 있는 거다. 그걸 바라본다. 그래서 롱테이크, 롱숏이 늘어난 거고 대사도 적어진 것 같다.
-지금 이야기를 듣다보니 당신은 작품을 매우 천천히 만들지만 그 사이사이 시대를 진중히 관찰한다는 느낌이 든다. 당신이 느끼는 1980년대, 90년대, 그리고 21세기는 어떻게 다른가.
=20세기를 흔히들 영상의 세기라 부른다. 매우 낙관적이고 기쁨이 담긴 표현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상징이 되어버린 건 9·11 사건의 모습이 담긴 바로 그 영상이다. 이건 낙천적이고 밝은 영상의 세계가 보여준 어떤 끝이다. 사람들은 영상으로 무언가를 배우고 안다고 하지만 그건 모두 거짓말이다. 20세기는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표면으로 찍은 건 어떤 한 문화가 본 일면일 뿐이다. 그 맥락에서 영상의 역할은 다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본다는 건 본래 고독한 거고, 고립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상의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길은 뭔가.
=매우 로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경을 넘기 어려운 것, 그런 걸 찍어야 한다. 사람들은 다 안다고 말하지만 모두 거짓말이다. 모르니까 느낄 수 있는 거고, 영화는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모두 아는 영상으로는 1차원적인 것 이상을 말하지 못한다.
-준비하는 작품은 없나. <매목> 이후 벌써 3년이 지났다.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나. (웃음)
=우선 어디를 향해 영화를 찍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어렵다. 또 찍으려고 마음먹어도 자금의 문제나 다른 조건들 때문에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도 제안받은 영화가 하나 있었는데 결국 안 하는 걸로 됐다.
-이번엔 아시아나단편영화제에 심사위원장으로도 참여한다.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보는 일이 훨씬 많은 생활일 텐데 어떤 느낌인가.
=전체적으로 아트 계열 작품들이 전세계적으로 줄고 있는 느낌이다. 관객도 줄어드는 것 같고. 100년 역사를 가진 영화의 관객이 준다는 거. 무섭다. 일단 영화를 찍는 것 자체는 예전보다 쉬워졌지만 배급이나 상영하는 건 예전과 다름이 없다. 잘 만들어진 엔터테인먼트는 많은데 깊게 사고하는 것들은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