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봅시다]
[알고봅시다] 아무도 모르게 촬영해주시오
2008-11-20
글 : 장영엽 (편집장)
<눈먼자들의 도시>가 원작자 사라마구의 허락을 받아 제작되기까지

<눈먼자들의 도시>는 포르투갈 태생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이 인간 본성에 대한 묵시론적 성찰을 담은 걸작인데다 사라마구가 소설의 영화화를 강력하게 반대해온 만큼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속사정을 소개한다.

1. <눈먼자들의 도시>는 어떻게 영화화되었나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1995)는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대표작 중 하나다. 눈을 멀게 하는 전염병이 순식간에 온 도시에 퍼지고, 오직 한 여자만이 눈멀지 않은 채 도시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목격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환상문학의 살아 있는 교과서’로 불리는 사라마구의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소설에서 평범한 소시민들은 하루 아침에 눈먼 자로 변해 생지옥을 경험한다. 도시에는 쓰레기가 넘쳐나며, 군인들은 눈먼 자들에게 린치를 가하고, 악당들은 격리된 수용소에서 사람들의 몸과 재물을 착취한다. 휴머니즘이 말살된 도시에서 사람들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가까스로 삶을 이어나간다. 이처럼 상상력 넘치고 신랄하며 메시지 뚜렷한 소설을 영화 제작자들이 그냥 두고 볼 리 없다. <시티 오브 갓>의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와 우피 골드버그, 배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차례로 이 소설의 ‘판권을 주십사’ 사라마구를 찾아갔지만,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사라마구는 “이 책은 타락한 사회와 강간에 대한 폭력적인 책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내 소설을 오역하는 걸 원치 않는다”며 <눈먼 자들의 도시>의 영화화를 단번에 거절했다.

원작자의 단호한 태도를 누그러뜨린 건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충성스러운 프로듀서, 니브 피치먼과 시나리오작가 돈 메켈러(영화에서 ‘자동차 도둑’으로 출연하는)였다. 이들은 사라마구가 사는 카나리아 제도의 작은 섬, 란사로테를 기습적으로 방문해 사라마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판권이 결국 이들에게 넘어가면서 피치먼과 메켈러의 ‘삼고초려’는 성공했지만, 노작가는 영화화 조건으로 두 가지를 내세웠다. 하나, 어떤 사람도 알아볼 수 없는 곳에서 촬영할 것. 둘, 소설에 등장하는 ‘눈물의 개’는 반드시 몸집이 커야 할 것. 제작진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떤 사람도 알아볼 수 없는’ 곳이 도대체 어디냐고? 브라질의 상파울루와 캐나다 토론토의 작은 마을이다.

2. 영화만의 시각적 은유, 피터 브뤼헬의 <장님의 우화>

<장님의 우화>

눈을 안대로 가린 성상, 태초의 인간을 연상시키는 ‘벌거벗은 세 여인의 목욕장면’ 등 원작 소설에는 주제 사라마구가 교묘하게 심어놓은 신학적 알레고리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는 플랑드르 출신 화가 피터 브뤼헬의 1568년작 <장님의 우화>를 영상으로 재현함으로써 그림에 감춰진 의미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브뤼헬의 <장님의 우화>는 앞사람에 의지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장님들이 차례로 구덩이에 빠진다는 내용을 담은 그림이다. 이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는 마태복음 구절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눈먼 사람들은 브뤼헬의 그림 속 인물처럼 역시 눈이 먼 앞사람의 어깨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기다 봉변을 당한다. 이들은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부인을 지도자로 내세운 수용소 제1병실 사람들의 모습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3. <눈먼 자들의 도시>의 원작자 주제 사라마구

주제 사라마구

대기만성형 작가. 예순한살에 <수도원의 비망록>(1982)으로 단숨에 유럽 문학계의 스타 작가 반열에 오른 주제 사라마구를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1922년 포르투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사라마구의 첫 직업은 용접공이었다. 그는 스물여섯살이 되던 해 <죄악의 땅>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으나, 공산당에 들어간 뒤 19년 동안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마구의 다채로운 이력은 소설가로서의 자양분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조국 포르투갈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조국의 독재와 혁명, 아프리카에서의 잔혹한 식민지 전쟁을 지켜본 사라마구에게 사회와 개인의 갈등은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개인을 압박하는 권위와 억압, 점점 사라지는 현대인의 윤리 의식 등을 문제삼으며 인간 본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보수적인 포르투갈 사람들은 사라마구 특유의 도발적인 문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라마구가 1991년 발표한 <예수의 제2복음>은 예수를 타락 가능한 존재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가톨릭 교회와 보수집단으로부터 맹비난을 받았다. 포르투갈 정부는 1992년 유럽문학상 후보로 사라마구를 추천하기를 거부했고, 한시도 조국에 대한 걱정을 멈추지 않았던 노작가는 결국 부인과 함께 포르투갈을 떠나 카나리아 제도의 조용한 섬, 란사로테에 머물게 된다. 포르투갈을 떠난 뒤에도 주제 사라마구는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1998년 포르투갈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2002년에는 스페인의 <뉴욕타임스>, <엘 파이스>에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이스라엘 정부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2006년 레바논 전쟁이 시작되자 노엄 촘스키, 해럴드 핀터 등과 함께 반전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86살의 노작가는 여전히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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