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태현이 돌아왔다. 눈가와 입꼬리를 포물선 모양으로 만들며 씩 웃는, 소년 같은 미소는 그대로인데 양손에는 딸과 손자를 잡고 돌아왔다. 12월4일 개봉하는 <과속스캔들>에서 차태현은 ‘중3 때 실수로 낳은’ 딸이 미혼모가 돼 집으로 찾아오면서 시련을 겪는 인기 DJ 남현수를 연기한다. 2005년까지 대개 아름다운 아가씨의 수더분한 연인이었던 그의 행보는 이제 종잡을 수 없다. 서른셋, 스스로의 나이를 “배우 하기 애매모호한 시점”이라 말하는 차태현은 그럼에도 트로트 가수(<복면달호>)로, 어수룩한 바보(<바보>)로, 돈 많은 시한부 인생(<꽃 찾으러 왔단다>)으로 변신하며 미래를 위한 대비를 게을리하지 않있다. “요즘은 때마다 무얼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는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 있을까. 한 시간 반 동안 그 일부를 훔쳐보았다.
아빠가 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이가 나오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멜로도 하고 코미디도 하고 음악영화도 했는데 이건 한번도 안 해본 거니까. 그렇다고 애 둘 키우는 남자, 이런 역할은 ‘너무 아빠’라서 부담스럽고. 그때 <과속스캔들> 시나리오를 받았다. 사고쳐서 낳은 아이 때문에 소동이 벌어지는 건 이미 많이 나온 얘기인데,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아 함께 유명 DJ인 친아버지를 찾아온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솔직히 재밌겠다는 생각보다 힘들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으며, 가수를 꿈꾼다는 노래 잘하는 딸내미 역할은 또 어디서 구해? 그런데 촬영에 들어가니 신기하게도 그런 조건들이 맞아떨어지더라. 딸 정남이(박보영)와 손자 기동(왕석현)이와의 호흡이 굉장히 잘 맞아서, 이 영화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잘 나오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주인공이라고? <과속스캔들>의 주인공은 보영이다. 시나리오 받았을 때부터 그 생각을 했다. 나는 자주 나오기만 했지, 힘든 건 다 보영이가 했다. 아버지 쫓아다니고, 애 키우고, 노래 부르고…. 나는 그 역할을 잘 받쳐주면 그만이었다. 이 영화로 뭘 더 얻으려는 건 아닌데, 보영이는 다르다. 앞으로 갈 길이 먼 신인이다. 그래서 강형철 감독에게 이런 얘기를 정말 많이 했다. 보영이 많이 신경써줘야 한다고, 이 영화 잘돼서 꼭 신인상 타게 해야 한다고. 내 생각만 하며 살기는 싫다. 어차피 살다보면 도와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도움받는 사람도 있는 거니까.
남현수는 내 이름을 그대로 써도 될 만큼 나와 비슷한 캐릭터다. 나도 음반을 2집까지 낸 가수고, 라디오 DJ 경험도 있다. 그래서 편하고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대사나 설정도 내 경험대로 살짝 고쳤는데 아무래도 시나리오보다는 더 리얼하겠지? 그런데 라디오 DJ는 배우가 꾸준히 할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배우는 새로운 걸 준비해서 보여줄 시간이 필요한데, 매일매일 두 시간씩 라디오하다보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바닥까지 드러나니까. 그래서 올해 6월로 마친 <안재욱 & 차태현의 미스터 라디오>도 1년2개월밖에 못했나보다. 두명이 했는데도 라디오는 힘들어, 힘드러어어어….
<과속스캔들>은 음악이 중요한 영화다. 내가 노래하는 장면도 있고, 보영이만 해도 벌써 네곡을 부르는데, 이건 쉽게 넘어갈 부분이 아니다. <복면달호>를 찍어서 노래를 부르고 녹음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 그런데 감독님은 이번 영화가 데뷔작이라 음악에 대해 잘 모르시더라. 처음에 음악 리스트에 유명 올드팝들이 쫙 올라 있기에 얘기했지. 감독님, 그거 안돼요. 외국곡 그렇게 마음대로 못 써요. 그랬더니 몹시 괴로워하며 그중 한곡을 골랐는데, <워킹 온 선샤인>이라고 영화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웃음) 노래 고를 때 많이 도왔다. 내가 부른 노래는 (윤)종신이 형 9집에 있는 <비코즈 아이 러브 유>고, 보영이 노래 중 <아마도 그건>도 내가 추천했다. 개인적으로 <과속스캔들>은 가족영화보다 음악영화에 가깝다고 봤기에 음악을 망치면 이 영화는 완전히 끝이라고 생각했다.
신인감독과의 작업이 두렵지는 않다. 내가 이제껏 해온 작품이 다 그랬으니까. 신인감독, 오랜만에 재기하는 감독…. 그런 분들과 계속 일해서 그런지 요즘엔 한번만 봐도 이 감독님은 어떤 분이구나 딱 알 것 같다. 심지어 그런 감독들에게 내가 우상이라는 소리까지 들었고. 하지만 앞으로 노련한 감독과 일하며 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싶기도 하다. 이준익, 박찬욱 감독 같은.
결혼하고 많이 변하긴 했다. 이젠 밝은 영화가 좋다. 어두운 영화, 잘 만든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내가 끝까지 해야 할 작품은 밝은 영화란 생각이 점점 더 든다. 코미디영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슬프고 어두운 소재도 밝게 다루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승룡이를 연기했던 <바보>가 좋았다. 이런 영화로 인정받고 싶고 상을 받고 싶다. 멜로나 신파, 일부러 감동주려는 영화는 이제 안 끌린다.
아들 생각이 많이 났다. <과속스캔들>을 찍으면서. 기동이를 맡은 꼬마가 여섯살인데 촬영장에서 완전히 왕이었다. 기동이 졸리면 스톱, 컨디션 안 좋으면 쉬었다 갑시다…. (웃음) 우리 수찬이는 지금 11개월인데 막 걸어다닌다. 금방 클 텐데 미운 여섯살이 되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어떻게 혼내야 할까…. (웃음)
영화가 끝나고 드라마 <종합병원2>를 찍고 있다. 처음엔 왜 나를 레지던트로 캐스팅했나 궁금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유가 있었다. 내가 만날 하던 그런 캐릭터다. 말만 의사지, 여기저기서 사고 치는 애. (웃음) 의학드라마 <해바라기>에서 상대역을 맡았던 (김)정은이 누나도 나온다기에 ‘어, 그래요?’ 하며 그래도 괜찮을까 30분쯤 생각을 하다가 ‘하면 너무 재밌겠다’는 생각을 더 오랫동안 했다. 보통 비슷한 역할은 피하는 게 정석이지만, <해바라기>는 의학드라마이면서도 멜로의 비중이 높았다. <종합병원2>는 70% 이상이 병원 얘기라 부담이 덜했다. 의사를 다시 맡으니 가끔씩 <해바라기> 때 연기들이 나오는데, 굳이 그걸 피하려고 하진 않는다. 사람들이 변신, 변신 하는데 누구나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를 버리지 않는 선에서 충분히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 강호 형님 보면 <우아한 세계>랑 <넘버.3>랑 기본 톤은 같거든. 일부러 비슷한 모습을 피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