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터뷰]
[가상인터뷰] <눈먼자들의 도시>의 안과의사
2008-12-03
글 : 김도훈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라니까

-도대체 그 병이 뭐였을까요.
=글쎄요. 저도 알 수가 없죠.

-어쨌든 당신은 의사 아닙니까.
=현대의학의 위력을 맹신하진 마십쇼. 의사도 모르는 건 모르는 겁니다. 안과의인 저로서도 눈앞이 갑자기 하얘지는, 게다가 전염까지 되는 병의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병은… 그러니까. 그런 병은 말이죠….

-그런 병은?
=그냥 도덕적인 페스트 비슷한 거 아니었겠습니까.

-세상에. 당신은 어쨌든 안과의예요. 의사라고요. 도덕적인 페스트라니. 이젠 의사들도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시대인가요. 과학자들은 철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혹은 마술사가 될 수도 있죠. 과학은 결국 어떤 면에서는 마술과 비슷하니까요. 하지만 의사들은 그래서는 안된다고요. 가장 냉철해야 하는 직업이 의사 아닙니까.
=하지만 의사들조차도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아니,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질문에 부딪히곤 합니다. 저희들에게 언제나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으라고 몰아세우는 건 무리입니다. 게다가 의학 역시 어떤 면으로는 마술과 비슷한 구석이 있지요.

-하긴. 어떤 의학은 연금술이랑 비슷하더라고요. 가난한 환자들을 황금으로 만드는 연금술 말입니다.
=꽤나 시니컬하시군요. 병원 갔다가 바가지라도 쓴 적 있으신가봐요.

-바가지는 제가 바가지를 썼는지 안 썼는지 구분을 할 줄 알아야 바가지죠. 병원에서는 그게 바가지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잔뜩 쫄아붙은 마음으로 돈을 내게 마련이니까 알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래도 당신은 전국민 의료보험제 혜택이라도 누리고 있잖아요. 그에 비하면 저 미개한 제3세계 대륙에는 전국민 의료보험제도가 없다죠. 의약회사와 의사들 로비 때문에.

-아프리카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북아메리카요. 아니, 캐나다 빼고 미국.

-그나마 제정신으로 보이는 대통령이 권좌에 올랐으니 그 동네도 어쩌면 문명국이 되겠죠 뭐. 다시 주제로 돌아옵시다. 그래서 그 병의 원인이 뭔가에 대한 연구는 계속 하고 계십니까?
=도덕적 페스트라는 말을 다시 하고 싶어요. 알다시피 인간에게는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있잖습니까.

-정말요?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요. 아니, 최소한 우리는 그렇다고 믿으면서 살 만한 의식은 있는 존재잖아요.

-그럴까요?
=당신은 믿을 수 없는 비관론자로군요.

-제 유전자 때문인가 봅니다. 한국에서 한 30년만 살아보세요. 아니, 한국에 지난 1년만 살아보셨다면 자연스럽게 사전에서 ‘낙관’이라는 단어를 도려내게 될걸요.
=그거야 한국만 그런 건 아닙니다만. 토달지 말고 들어보십쇼. 어쨌든 인간들은 선과 악에 대한 최소한의 자각은 가지고 살아갑니다. 아니, 그렇게 길러지고 교육받습니다. 하지만 눈이 머는 순간 모든 것은 달라집디다. 우리의 윤리의식조차도 오감이 없으면 와해되고 마는, 모래성 같은 거였어요.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던 거죠, 두려움 때문에 눈이 멀어버린 겁니다.

-아니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요. 의학박사로서 당신이 내릴 수 있는 의학적 추론이 뭔가를 알고 싶다는 겁니다.
=그야 저도 모르죠. 신이 내린 징벌일지도. 우리의 윤리적인 아노미 상태를 단호하게 꼬집으려는 신의 징벌 말입니다.

-결국 병의 실체는 신이 내린 징벌이고 당신은 어쨌든 마누라 몸 팔아서 벌어온 음식을 먹고라도 살아남아야 했다는 거?
=말이 안 통하는군요. 왜 그렇게 악착같이 시니컬하십니까.

-무심한 듯 시크하게 냉정과 냉담 사이를 오가는 도덕적 페스트에 걸렸나보죠. 기도로 좀 고쳐주시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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