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한국 코미디, 이만큼만 만들자
2008-12-25
글 : 변성찬 (영화평론가)
뻔뻔함으로 확실하게 웃겨주는 <과속스캔들>

“올 연말, 의외의 적시타(!)” 누군가의 이 20자평(정확히 말하자면 9자평)은,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홈런’에 ‘만루 홈런’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사실 방점은 ‘의외’라는 단어에 찍혀 있을 것이다(라고 내 맘대로 짐작해본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기대 이상’이 있었다. 좀 까칠하게 말하자면, ‘의외’였기 때문에 ‘적시타’고 ‘홈런’이고 ‘만루 홈런’으로 보였던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영화 홍보 컨셉에는 다소 철지난 유행어 같은 썰렁함이 있었고, 그래서 기대를 한껏 낮추고 영화관에 들어갔는데, 영화는 정말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과속스캔들>의 최대 장점은, 정말 확실하게 ‘웃겨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의 비결은, 일종의 ‘뻔뻔함’에 있다. 영화는 현실적인 ‘그럴듯함’(plausibility)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리고 다양한 장르와 영화를 아주 뻔뻔하게 인용하고 뒤섞고 비틀면서 자유롭고 귀엽게 ‘논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영화적인 ‘그럴듯함’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바로 이 점이 한때 봇물을 이루던(지금은 많이 뜸해졌지만) 대부분의 실패한 한국 코미디영화들과 <과속스캔들>이 확실히 구별되는 점이다. 한때, 과장된 설정과 설익은 개그로 ‘잡탕’을 만든 뒤, 스스로 민망한 듯 막판에 (주로 가족애, 의리 등이 주성분인) ‘감동’ 조미료를 뿌려 더욱 짜증나게 하던 많은 ‘코미디’들이 있었다(앞에서 홍보 컨셉 운운했던 것은 <과속스캔들>이라는 제목이 그 많은 ‘코미디’들에 대한 기억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었다. 오죽 했으면, “제목 빼고 다 훌륭하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과속스캔들>은 그 ‘코미디’들만큼이나 과격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또 그것들만큼이나 ‘잡탕’이기는 하지만, 그 맛을 조화시키는 멋진 조미료 또는 개성적인 손맛이 있다.

멋진 리듬과 강약의 ‘뮤지컬 코미디’

무엇보다 멋진 것은, 매력있는 캐릭터의 창조다. 남현수(차태현) 얘기가 아니라 황정남(박보영)과 황기동(왕석현) 얘기다. 당돌함과 순진함을 나눠 가진(또는 공유하는) 이 부녀는, 말하자면 ‘30대 중반 키덜트에게 어느 날 들이닥친 재앙’인데, 놀라운 건 그들이 보여주는 ‘바이러스’ 같은 생명력(감염 능력+적응 능력)이다. 그들은 어른-애를 한편으로는 감염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 적응할 줄도 아는, 일종의 애-어른이다. 그들은 이 영화의 현실적으로 ‘과격한 설정’을 영화적인 ‘그럴듯함’으로 역전시키는 일등공신이고, ‘미혼모’라는 무거워질 수 있는 모티브를 경쾌하게 뛰어넘게 만드는 지렛대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 영화의 ‘수호천사’다. 모든 것(화려한 노출신, 액션신, 그리고 그림들)이 있었지만 지루하고 밋밋하기만 했던 <미인도>의 실패는, 무엇보다 뻣뻣하기만 했던 캐릭터들에 있었다(이건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라 그들에게 판을 만들어주지 못한 영화의 뻣뻣함에 대한 불평이다).

<과속스캔들>이 만들어낸 영화적인 그럴듯함의 세계는, 일종의 ‘뮤지컬 코미디’의 그것이다(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백스테이지 뮤지컬’이라는 영화적 자산을 창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영화 전체에 은근하면서도 감칠맛이 돌게 하는 조미료로 만들고 있다). 예닐곱번 등장하는 ‘무대 공연’의 선곡들도 내러티브 전개의 터닝 포인트로 절묘하게 사용되지만, 현수-정남-기동이라는 이 ‘과속삼대’가 주고받는 ‘티격태격’의 대사들과 연기 또한 멋진 리듬과 강약을 갖춘 일종의 ‘뮤지컬 넘버’였다. 사실 ‘뮤지컬 코미디’는 일종의 ‘뻔뻔함’을 자신의 무기로 하는 장르이고, 때로는 그 ‘뻔뻔함’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스스로의 ‘퇴행성’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계’의 정서를 만들어내기도 했던 장르다. <과속스캔들>에 미혼모가 마주쳐야 할 현실적 난관들에 무관심하다는 혐의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미혼모에 대한 통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서(또는 윤리적 태도)를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또는 그렇게 믿고 싶다).

<미인도>가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참 ‘미스터리’한 현상이다. 나는 <미인도>의 성공(?)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나 <음란선생>과 같은 신선했던 ‘퓨전사극’이 열어놓은 길에 ‘무임승차’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200만 속에 많은 실망과 불평이 있었다면(나는 그럴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그것은 곧 ‘장르’의 쇠퇴를 의미한다. 한때 화려했던 ‘한국형 코미디’라는 장르는 그런 과정을 거쳐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과속스캔들>의 작은 성공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러고보니 올 한해 영화(특히 코미디영화) 보며 웃었던 기억이 별로 없다. “한국 코미디영화, 이만큼만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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