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사파리’가 아닌 ‘동물원’이었다
2009-01-01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통속적 내러티브 아쉬운 <오스트레일리아>…제발 스토리에도 강박증을 가져주길

캥거루가 야행성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실제로 호주 사막을 달리다가 캥거루를 만나게 되는 것은 거의가 늦은 밤,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아스팔트 위에서다. 그들은 집단서식을 하기 때문에, 일단 한 마리가 발견되면 근방 1km 이내에 수백 마리의 캥거루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혹여 속도라도 내다간 캥거루 머리가 자동차 위로 날아가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과도하게 집중된 앞부분의 디테일

바즈 루어만의 신작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에서 호주로 전입 신고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녀는 토착민 아보리진의 혼혈아를 입양하고, 귀족이 아닌 드로버(drover)와 새 가족을 이룬다. 루어만은 이 영화를 통해 호주의 태생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자신이 이룩한 이른바 ‘바로크 앤 롤’(baroque n roll) 영화 세계의 정점을 찍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오면서 드는 생각은 ‘캥거루 보러 오스트레일리아까지 갔다가, 시드니 동물원에서 왈라비랑 사진 찍고 돌아나온’ 기분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영화를 멈추게 만들었는지, 그것이 궁금해졌다.

3시간짜리 영화의 중반부, 관객은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 소년의 내레이션과 함께 종결되었던 사건이 다음의 사건으로 연결되는 것, 지금까지 이어진 이야기가 다만 ‘만남-변화-정착-전쟁-해후’의 다섯 챕터 중 앞의 두 부분, 즉 만남과 변화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 새라는 남편을 찾아 호주에 도착하지만 남편이 죽고, 드로버란 남자를 다시 만난다. 얼마 뒤 전쟁이 터지자 이들은 흩어지는데, 전쟁과 동시에 불화로 고민하던 두 사람이 결국 화합해 상황을 극복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시드 필드의 개념으로 시나리오를 분석할 때, 이 시놉시스는 호주 정착을 결정하는 다윈에서의 ‘자선파티’ 신을 중심으로 두 부분으로 분리된다. 즉, 자선파티는 일종의 중간점이다. 하지만 이 중간점에 이르기까지 ‘발단과 전개의 앞부분’이 너무 꽉, 단단하게 조여져 있는 것이 문제다. 어느 한 장면 공들이지 않은 것이 없는 전개부, 관객은 비교적 쉽게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를 읽겠지만, 반대로 이는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전반부의 챕터는 극 전체 구조와는 별개로 자체적 플롯을 숨기고 있다. 즉, 새라의 정착기가 너무나 구체적이고 강렬하다. 심지어 소떼를 끈 새라 일동이 다윈시에 도착한 후반부가 갑자기 축약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사막을 건너는 앞부분이 밀도있게 묘사된다. 물론 부분만 놓고 보면 좋다. 하지만 이 때문에 관객은 뒤로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는데, 심지어 앞부분을 재편집하는 편이 흥행에 더 좋았을 것이라는 의견까지 나오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지금의 구조대로라면 <오스트레일리아>는 전과 후 ‘정착과 전쟁’ 두 가지로 분리되어 독립적 완결성을 가진 이야기의 합(合)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부분이 아닌 전체로 보면 ‘만남’과 ‘해후’ 이 두 가지는 양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간부를 통해 연결됐어야 하는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루어만이 실패한 것은 전체 구조를 염두에 두지 않고 세부 묘사에 치중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막 횡단부의 독립적 완성도를 느슨하게 했더라면, 혹은 혼혈 눌라의 신비스러움을 ‘가족의 탄생 혹은 전쟁의 발발’보다 약한 것으로 치장했더라면, 이야기의 전개가 조금 더 설득력을 띠었을지 모른다. 마치 배 앞 둥치에 무거운 짐을 적재한 유람선이 바다 중간에서 뒤집어진 격으로, 과도하게 집중된 앞부분의 디테일이 영화 전체의 구성을 망가뜨렸다.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은 화면 구성이 지나치게 촘촘한 대신 감정의 디테일이 너무 통속적 플롯을 따랐단 점이다. 바즈 루어만을 떠올릴 때 ‘그는 내러티브가 중요하지 않은 감독 중 하나다’라고 말하는 것은 핑계다. 이번 역시 그는 중간점을 넘기면서 이른바 ‘디테일과 구조의 양보없는 싸움’에 집중하는데, 원작이 있던 이전과 달리 지금에 이르러 플롯에 느슨하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선택이다. 작은 대야에 담긴 잉어 두 마리를 보는 불편한 기분, 결국 구조와 디테일의 ‘불편한 구겨넣음’이 둘 모두를 모두 망치게 한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지는 감독의 스타일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구조가 결정할 문제다. 잉어 두 마리를 위해선 더 큰 욕조를 준비하거나, 더 세밀한 작전을 짜거나, 혹은 적절한 크기의 붕어로 교체했어야 한다.

루어만 영화의 단점이 총정리돼

스토리 플롯의 전체적 흐름, 즉 골격의 문제에서 루어만의 필모그래피는 ‘미니멀리즘’이란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물랑루즈>의 경우 이런 플롯의 단순화가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원전(原典)의 유세(有勢) 덕분인데, 이야기가 어떻게 흐를 것이란 걸 짐작하는 관객은 이 경우 비극성보다 오히려 유려한 화면에 집중하게 된다. 역시 플롯보다는 화면-도드라지는 원전 해석, 의상, 그리고 색의 구성이 이전까지 그의 강점이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 이를 온전히 살리지 못한 것은, 어떤 면에서 <오스트레일리아>가 루어만 영화의 단점을 총정리한 영화라는 것을 말해준다. 후반부, 즉 정착 이후 전쟁과 해후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통속적 내러티브는, 기계적 반복에 의한 이야기 재생이 얼마나 품위없는지를 드러내는 지표가 될 정도로 형편없는데, 이야기의 타입에 의존했던 과거의 버릇, 즉 장르영화의 포석으로부터 그가 출발했음을 알리는 이러한 분석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장르적 정책에서도 실패했음을 이른다.

굳이 ‘액션’과 ‘멜로드라마’, ‘로맨틱 대서사시’라는 표면적 목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가 과거 <타이타닉> 등의 영화가 지향했던 다층적 목표지점에서 기인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르영화’란 작가의 상상력을 어떤 계기에 도달하기까지 밀어올리는 힘의 창조적 한계를 규정, 즉 그 범주를 상정하는 영화의 분류이다. 따라서 그 규범의 까다로움을 충족하기 위해 장르영화 작가는 한 장면을 평이한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도록 스스로가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는데, 루어만 감독처럼 독특한 방법일 경우 이는 더 절실하다. 뻔하게 진행될 줄 알았던 부분, 혹은 너무나 평이하게 느껴졌던 플롯이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포장되고 변형되는 과정이 바로 이 채찍질을 통해서이고, 장르영화에서 눈에 익지만 ‘이 영화만의 것’ 혹은 ‘새롭다’라고 느끼는 지점은, 이렇듯 플롯보다는 작가의 개성에서 나온다. 세트에서 로케이션으로 벽을 깨고 나오면서 <오스트레일리아>가 길을 잃은 것은 이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장르를 망각하는 실수를 범했다.

풀이 듬성듬성 난 건기의 초원, 황토빛 자연이 스크린을 장악한다. 전편에서의 붉은 풍차, 줄리엣의 붉은 심장을 떠올릴 때 이는 일단 너무 의외적 선택이다. 우기(雨期)를 거치면서 색감 변화가 느껴지지 않은 것을 살피면, 이는 비단 선택의 실패가 아니라 표현의 실패였음을 알게 되는데, 나타내야 할 것과 감추어야 할 것, 이를 구분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감독의 역량문제다. 예를 들어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를 떠올릴 때는 이런 비교가 가능하다. <피아니스트>에서 폴란스키는 주인공이 놓인 2차대전의 상황을 숏마다 풀숏 크기 이하로 제한하는데, 주인공의 절망이 극대화되는 중간점 이전까지 그는 절대 익스트림 롱숏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반부 전쟁의 규모와 유대인 주인공의 위치는 역사에 녹아 그 절박한 뼈대를 드러내는데, 결국 숏의 장대함과 역사, 혹은 개인의 운명과 사건이 단순히 숏의 크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이 영화는 방증한다. 즉, 지루한 색감이 정서를 환기하는 데 실패한 것, 그리고 커다란 화면이 장대한 정서와 바로 연결되지는 않은 것이 <오스트레일리아> 실패의 또 다른 요소다.

플롯에만 너무 기대지 말라

바즈 루어만은 ‘멜로드라마’가 사랑의 감정과 필연적으로 연계되는 것이 아니고, ‘웨스턴’이 개척정신이나 우월의식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란 걸 잊은 듯 보인다. 이의 성공을 위해 장르의 적절한 혼합의 강약 조절, 그리고 변형이 뒤따라야 했는데, 이 부분에서 <오스트레일리아>는 구조에서 드러냈던 문제를 고스란히 장르에서도 드러낸다. 즉, <오스트레일리아> 속 장르는 포화되어 있다. 작은 옷가방을 던지니 가득 튀어나왔던 새라의 속옷, 따지고 보면 그 가방에 들어가기에 그 옷들은 너무 많지 않았나? 하는 지점, 한 군데에 더 집중해야 했고 하필 그것이 이 영화의 경우 루어만의 약점인 스토리텔링 위주 ‘서사드라마’였단 점은 아쉽다. 위험에 노출된 주인공을 보는 동시에 사건이 해결될 것 같아 안도하게 되는 영화, 아무리 많은 사람이 창에 맞아 쓰러져도 슬픔이 이입되지 않는 이 영화의 관객은, 차라리 캥거루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놀람’의 반복이 나았을 거란 불평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부분들을 쓰다듬는 루어만의 솜씨는 여전하다. 간극이 큰 숏이 세련되게 연결되는 장면은 이번에도 자주 목격되는데, 특히 로앵글과 직부감의 사용이 돋보인다. 눌라의 엄마가 죽는 물탱크에서의 직부감 숏은 운명의 힘을 자의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보여주는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다.

흔히 테크닉이 뛰어난 감독들은 자의식을 표출하면서 스스로 성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제 루어만도 동물원에서 벗어나 적어도 사파리 정도는 갈 때가 되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를 통해 호주 북부를 달리길 바라던 내 기대는 무너졌고, 그가 내민 것은 너무 작고 촘촘한 동물원의 우리였다. 플롯의 기본에 충실한 것은 좋다. 하지만 너무 과도하게 기대지는 말자. 작더라도 균형잡힌 초원, 그러니 제발 이젠 스토리에도 강박증을 가져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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