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돌배군, 꺼벙이, 강가딘도 다시 보고 싶다. 하지만 이들을 기억하는 건 80, 90년대 당시 이들이 등장하는 연재 만화를 보던 특정 연령층의 공유된 추억이다. 80년대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대를 아우르며 기억되는 단 하나의 명랑만화 아이콘을 꼽는다면 그건 단연코 둘리다. 빙산 타고 서울 쌍문동까지 둥둥 내려와, 심통맞은 고길동씨네서 구박데기로 살아가는 아기공룡 둘리 말이다. ‘미개한 생물 하나 살려주는 셈치고’ 관대한 외계인들이 초능력을 부여했고(<X파일>보다 앞섰다), 개성 강한 가족들을 적당히 ‘포기’하며 살아가는 미덕을 보여주며(<심슨네 가족들>보다 앞섰다), 도우너와 또치, 마이콜이라는 희대의 괴상한 친구 조합과 함께 어른들의 속을 뒤집어놓고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 열중한다(<짱구는 못말려>와 <사우스 파크>보다 앞섰다). 둘리, 귀여운 둘리야.
잠깐, 그렇더라도 당분간은 ‘요리 보고 조리 보는’ 둘리를 잊어도 좋다. <뉴 아기공룡 둘리>가 지난해 12월25일 특별방송분을 맛보기로 선보였고, 1월8일 오후 4시에 첫 정규방송을 시작한다. <뉴 아기공룡 둘리>의 주제가에 귀기울여보라. “나는 몰라, 너는 아니? 내가 왜 말썽대장인지. 일억 만년 잠자느라 놀지 못해 그런 거야.” 아, 이토록 절절한 ‘놀자니즘’의 선언 앞에서 가슴 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요즘 아이들은 방학에도 학원에서 하루 종일 보낸다지만 이 시간만큼은 ‘본방 사수’의 마음으로 기다려야겠다. 그래서 팬들만큼이나 두근거리며 방송일을 기다리는 원작자 겸 <뉴 아기공룡 둘리>의 총감독 김수정에게 만남을 청했다. 2008년 12월31일, 김수정에게 어린 시절 <보물섬> 시절부터 궁금했던 많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지난 12월25일 특별방송분을 본 시청자 반응이 찬반으로 뜨겁게 갈렸다.
=기자분은 몇살인가? 76년생? 만화세대는 아니고 TV세대네. <뉴 아기공룡 둘리> 보고 나서 좀 충격받진 않았나?
-아니다. 옛날 생각하며 재미있게 봤다.
=<아기공룡 둘리>가 1983년 <보물섬>에서 처음 연재를 시작했다. 그 다음 1987년 KBS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1996년 극장용 장편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이하 <얼음별 대모험>)이 나왔고, 한글과 영어 교육 프로그램으로도 소개가 많이 됐다. 25년의 세월 동안 둘리를 가장 처음 접하게 된 매체가 사람마다 다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둘리의 이미지가 다 다르게 기억된다. <뉴 아기공룡 둘리>를 시작하면서 전부 다르게 기억되는 둘리의 이미지를 어떻게 하나로 가져갈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
-다들 “내가 알던 둘리는…”으로 말을 시작한다. (웃음)
=2년 전 8살짜리 꼬마가 해답을 줬다. 그 친구는 이모가 <아기공룡 둘리>를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덩달아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극장용 장편 모두를 섭렵했더랬다. 그 애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에피소드를 들려주는데, 놀랍게도 25년 전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독자가 가장 좋아했던 부분과 겹치더라. 가만 생각해보니, 만화가였던 내가 애니메이션으로 넘어오게 됐던 이유가 있었다. 그걸 한동안 잊고 있었더라. KBS 방영 애니메이션이 워낙 유명해졌지만, 당시 원작자로선 불만이 많았었다. 애니메이션 자체의 완성도도 기대치에 미흡했고, 둘리도 둘리답지 않고. 그래서 내가 직접 둘리 애니메이션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했었다. 답은 바로 나왔다. 둘리를 가장 둘리답게, 원작에 가장 근접하여 그리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번 방영분을 보고 나온 반응들은, 예상은 했지만 반발이 훨씬 크더라.
-사실은 오리지널로 돌아간 건데도 말이다.
=KBS 시절의 둘리는 너무 귀엽고 순정적이었다. 당시 그 작품을 총괄하던 PD가 여성이었는데, 둘리 이야기를 각색하면서 상당히 감성적인 접근 방식을 많이 취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러면서 둘리라든가 고길동 등 여러 캐릭터들의 개성이 좀 완만하게 바뀌었다는 거다. <뉴 아기공룡 둘리>의 둘리는 좀더 리얼리티가 묻어나는 말썽꾸러기로, 80년대에 내가 즐겁게 그렸던 그 마음 상태로 돌아가서 그렸다. 과거의 둘리와 똑같이 그릴 거면 지금 작업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성우 박영남씨의 둘리 목소리는 여성적인 느낌이 강했다. 이번 새로운 둘리는 좀더 소년 느낌이 나서 둘리 정체성엔 더 맞지 않다 싶더라.
=박영남 선생님께서 KBS 방영분에서의 귀엽고 착한 둘리의 성격을 잘 살렸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리는 둘리는 ‘머시매’다. 과연 이 둘리에게 어떤 목소리가 어울릴지 고민했다. 실제로 초기 독자는 둘리가 사내아이라는 걸 아는데, KBS 애니메이션을 본 친구들이 “둘리는 여자예요, 남자예요?”라고 자주 묻더라. 그래서 이번 목소리는 비교적 저음의 소년 느낌으로 갔다.
-<뉴 아기공룡 둘리>의 배경이 예전 작품에 비교했을 때 상당히 현실적으로 보인다.
=둘리네 배경이 쌍문동인데, 실제 작업 들어가기 전에 쌍문동 풍경을 전부 찍어온 다음 거의 그대로 반영했다.
-새삼스럽지만 둘리의 시작이 궁금하다.
=당시엔 성인만화가 거의 없기도 했고, 나도 아동만화 위주로 작업해왔다. 하지만 아동만화의 심의가 너무너무 불합리했다. 그 요강대로라면, 아동만화의 주인공은 도덕 교과서보다도 더 도덕적이어야 했다. 그런 성인군자 같은 아이에게 무슨 모험과 교육이 필요하겠나. (웃음) 아이라면 실수나 실패를 통해 성장을 하는 법인데, 처음부터 그게 막혀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심성이나 그들만의 욕구를 그려보고 싶은데, 그래야만 아이들이 둘리를 통해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게 아닌가. 심의에 걸리지 않고 아이들을 표현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동물을 의인화해야겠다 생각했고, 늘 주변에서 보는 동물 말고 새로운 걸 찾다가 1억년 전 빙하와 공룡까지 거슬러올라갔다.
-고길동씨 캐릭터는 무척 현실적이기 때문에 아동만화의 프레임으로선 또한 파격적이기도 하다.
=길동씨는 대인배도 아니지만 악인도 아니다. (웃음) 그 양반의 꿈도 큰 게 아니다. 집도 하나 있겠다, 마누라하고 아이들하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돈 좀 벌면서 사는 게 최고 큰 꿈이다. 한국의 가장들이 꿈꾸는 가장 보편적인 꿈이기도 하다. 여기에 둘리가 들어오면서 길동씨의 일상이 점점 고통스러워진다. 둘리를 쫓아내고 싶지만 매몰차게 그럴 수도 없는 게, 조카 희동이 때문이다. 길동씨 여동생이 도망치듯 떠나면서 희동이를 맡겼는데, 희동이를 사랑하고 돌봐주는 건 둘리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인간사가 하나의 단순한 감정으로 정리되는 게 아니라, 그런 미운 정 고운 정 여러 사정이 얽힌다는 걸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둘리 이야기는 ‘아동만화’라는 카테고리에서 자유롭다. 아동의 눈높이에 맞추겠다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작품을 유치하게 만들 수 있을 텐데, 그것을 잘 피한 것 같다.
=실제로 어른들이 어린이 대상으로 만화나 동화를 쓸 때, 뭔가를 굉장히 낮추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 캐릭터도 어느 틈에 아동이 되어 있다. 난 거기에 반대한다.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은 어른이어야 한다. 길동씨와 둘리가 첨예하게 대립할 때, 아이들이 둘리 편을 들다가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길동씨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새로운 교감을 이룬다. 그러려면 하나의 상황을 놓고 각자의 입장을 정직하게 그려야 한다. 마이콜의 눈높이, 도우너의 눈높이, 길동씨의 눈높이. 똑같은 상황이라도 보는 이들의 시선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각장의 공감대가 따로 생길 수 있다.
-둘리하면 역시 음악이다. KBS 시절의 주제가라든가 <라면과 구공탄> 등은 희대의 명곡이었다. (웃음) 한편 <얼음별 대모험>에선 뮤지컬 형식을 도입하고 재즈풍 노래를 부르는 등 과감한 발상이 돋보였는데.
=나도 <라면과 구공탄>과 <비눗방울> 노래를 참 좋아했다. 80년대에도 왜 이 노래들이 안 뜨나 싶더라. 그러더니 지난해엔가, 라면 CF에서 이 노래가 깔리면서 뒤늦은 바람이 불더라고. (웃음) <얼음별 대모험> 음악에도 전체적으로 관여를 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KBS 주제가를 재즈식으로 편곡하기도 했고, 또 뮤지컬 장면에 의욕을 많이 부렸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음악하고 동작을 맞추는 게 쉽지가 않다. 둘리의 요리장면, 또치의 노래, 바요킹의 노래 전부를 살리면서 일일이 동작과 맞추려고 했는데, 아쉬움이 많다. <얼음별 대모험>에 나오는 또치의 노래와 마이콜의 노래는 다시 편곡해서 이번에도 삽입할 예정이다.
-아니 그럼, <라면과 구공탄>도 빠지는 건가.
=솔직히 개인의 힘으론 어쩔 수가 없다. 본 테마송과 <라면과 구공탄>은 나도 너무 아쉽지만, 한정된 예산으로 저작료 부분을 해결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성우는 바꿀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만, 음악의 상당부분은 그대로 가져오고 싶었는데 많이 아쉽다. 이번에 마이콜이 나올 땐 <라면과 구공탄>보다 좀더 무거운 느낌의 노래를 새로 만들었다.
-KBS 시리즈에서 못 봤던 에피소드들도 많이 포함되는 건가.
=겹치는 건 둘리의 탄생, 또치, 도우너, 마이콜, 희동이, 꼴뚜기 왕자님 에피소드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새로운 에피소드들이다. 어차피 새로 시작하는 거니까, 순서도 섞어버렸다. 둘리의 탄생은 시리즈 중반쯤에 등장할 거다. 대신 위의 여섯 에피소드는 KBS 시절의 12분 분량이 아니라 22분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내용적으로 좀더 드라마틱하게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다시 보니까 <짱구는 못말려> <심슨네 가족들> <사우스 파크> 등을 한참 앞선 블랙유머가 생생하더라.
=같이 만화를 그리던 친구 하나가 80년대 중반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나서 87년쯤 한국에 와서 한다는 말이, “김형 작품 말이야. 난 그거 솔직히 우습게 봤는데, 지금 그거랑 똑같은 게 미국에서 엄청 뜨고 있어.” 그 작품이 <심슨네 가족들>이었다.
-만화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오면서 둘리 이야기를 어떻게 다르게 보여주려고 생각했나.
=내 작업의 기본 성격은 만화 같은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같은 만화다. 만화 버전의 <아기공룡 둘리>는 생략의 기폭도 크고, 뭔가 많이 감춰두었다. 독자가 나중에 뒤적거리다가 “앗 이런 것도 있었네?”하고 깨달을 수 있게끔 말이다. 반면 애니메이션은 말 그대로 동영상이다. 전체적으로 돌출되고 모든 게 다 표현된다. 움직이는 만화의 느낌을 어떻게 여기로 옮겨올까 고심했다. 액션이 굉장히 리얼하고 디테일하지만, 그림자도 없이 평면 구조로 일관하며, 대신 컬러는 산뜻하고 담백하게 갔다. 또 다른 야심이라면, 내가 만화를 그릴 당시 독자가 무척 좋아했던 유머를 애니메이션에서도 재현해보고 싶었다. 둘리의 특성상, 풀 화면을 잡아줄 때 여러 캐릭터의 동선이 딱딱 맞아떨어지면서 하나의 상황에 모여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이 많다. 연출도 힘들고 애니메이터 입장에서도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관객이 이걸 보면서, 예전 독자처럼 그 똑같은 장면에서 웃을 수 있길 바란다. 크리스마스 방영분 중 <거짓말> 에피소드를 보면, 고길동이 낮잠 자는데 둘리 발만 보이면서 “의료보험카드 주세요”라고 툴툴거리는 장면이 있다. 동물이 무슨 의료보험카드가 필요한가. 별거 아닌 걸로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거, 이게 이 작품의 맛이었으면 좋겠다.
-둘리는 한국만화사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캐릭터다.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우리의 문화 풍토가 좀 그렇다. “또 둘리야? 야 고만 우려먹어라” 하는 말도 들었다. (웃음) 우리는 문화를 계속 다져가고 키우는 것에 빈약하다. 더구나 만화는 말할 나위가 없다. 70년대만 해도 광화문 한복판에서 이른바 ‘불량만화’를 수거하여 화형식을 하지 않았나. 그런 풍토 속에서 우리 만화가 커왔기 때문에, 캐릭터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는다는 게 참 힘들었다. 둘리를 죽이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을 많이 했다. 만화로 시작했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고 캐릭터 사업까지 했다. 좀더 확대된 산업으로 키우고 싶었다. 이게 내 개인의 욕심이라고 치부한다면, 사실 굳이 이렇게 힘들게 할 필요가 없다. 나야 뭐 혼자서 내 작품을 그리면 된다. 애니메이션 제작비도 만만치 않다. 요즘 경제까지 많이 어려워져서 암담한데, 그런데도 왜 하는가? 어쨌든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고, 둘리를 좋아해주고, 또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한다. 만화를 그릴 때, 사람들이 그걸 읽고 감동받으면 역으로 만화가도 감동받는다. 그것 때문에 계속한다.
-다른 작품 중 둘리만큼 키워보고 싶은 캐릭터는 없을까.
=작업할 수 있는 환경만 된다면 해보고 싶은 게 있다. 일단은 <아리아리 동동>의 작은 악마 동동을 3D애니메이션으로, <일곱개의 숟가락>은 수채화처럼 예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만화가로선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계획은 없는지.
=만화를 다시 그리고 싶은 마음은 굉장히 크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작업과 병행할 순 없다. 이게 다 정리되고 나면… 내가 그려왔던 그 ‘만화체’로 <삼국지>를 그려보고 싶다. 현대판 일지매 이야기와 동자승을 통해 불교의 의미를 알려주는 만화도 늘 품고 있는 프로젝트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수정 감독은 사진 촬영에 필요한 작업에 돌입했다. 아크릴판 위에 둘리 캐릭터들을 그리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선을 몇개 그었을 뿐인데 “앗 길동이구나!”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슥슥, 몇초 지나지 않아 허리에 야쟈수 잎을 두른 못마땅한 표정의 고길동이 완성되었고, 이어서 정자와 둘리, 희동이가 등장했다. 넋을 놓고 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질문했다. 둘리는 왜 항상 혀를 반쯤 빼물고 있냐고. 김수정 감독은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못 들은 건가 싶어 재차 캐물었다. “모든 것을 원작자가 다 얘기해주면 재미없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