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찾아낸 풍경]
[기어코 찾아낸 풍경] 왕이 노닐 절벽 출입금지요~
2009-01-07
글 : 김태영 (로케이션 플러스 대표)
김삿갓의 발걸음을 13년간 붙잡았다는 <쌍화점>의 명심정, 바로 그곳

2007년 12월, 겨울이 짙어갈 즈음 한 영화사에서 전화가 왔다. 사극영화를 준비 중인데 장소 한두곳만 찾아주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내용의 전화였다. 영화는 조인성, 주진모 주연의 <쌍화점>이라고 했다. “감독님이 누구세요?”라고 물었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의 유하 감독님이란다. 하기로 했다. 엎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1년 전 겨울, 나는 <쌍화점>의 로케이션을 담당하게 됐다.

로케이션팀의 주요 임무는 단 하나였다. 찾아야 하는 장소는 몇곳이 있었지만, 스케일 면에서 보자면 단연 압권은 ‘명심정’을 찾는 것이었다. 극중에서 왕(주진모)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왕비의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홍림(조인성)을 포함한 소수의 호위무사와 측근을 대동하고 왕실 전용 나들이 장소인 명심정으로 외유한다. 이곳은 외부와 단절되어 일반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장소이고 호수가 보이는 완만한 경사의 초원이다. 바닥은 얕은 풀 또는 잔디로 다듬어져 왕실에서 관리하는 영지임을 알 수 있다. 또 앞이 절벽이거나 물이 있어야 했다. 자객이 물속 또는 절벽 밑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일순간 하늘로 솟구쳐 허공을 가르며 왕을 습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남 화순 어딘가에 끝내주는 절경이…

찾아야 할 장소가 한곳뿐이라 만만히 보고 시작했던 일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시대 배경이 고려 말이었기 때문에 잘 알려진 관광지는 제외됐다. 게다가 탄성이 나올 정도로 멋진 곳이라 해도 크레인을 비롯한 10여대의 대형 장비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면 촬영을 할 수 없는 터였다.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경기도 주변에는 아예 그림이 나오는 곳이 없었다.

결국 강원도를 거쳐 충청도, 전라도를 향해 로케이션 매니저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산꼭대기에서 개장준비 중인 골프장도 헌팅했지만 감독님의 눈엔 ‘비경’은 없고 삭막한 겨울산만 보일 뿐이었다. 여름이었으면 ‘으~와!’ 했을 동강의 멋진 강가도, 횡성호가 내려다보이는 풀밭도, 하늘을 찌르는 솔밭의 청령포도, 소백산맥의 산등성이들을 내려다보는 절경의 골프장도 보여드렸지만, 감독님은 하나같이 시큰둥하게 반응하셨다.

영화 <쌍화점>에서 왕과 왕비가 외유를 나왔다가 습격당하는 장면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전 국민 모두가 휴대폰과 카메라로 무장하고 노스페이스를 군복처럼 갖춰 입고는 마치 무장공비(?)처럼 전국 방방곡곡의 산과 계곡, 능선, 벌판, 바위 사진을 찍어댄 뒤, 블로그와 미니홈피를 도배하는 IT 강국 아닌가. 한마디로 일반인이 가지 않는 곳이 없고, 찍히지 않는 절경이 없다는 거다. 그처럼 이미 모든 곳이 온 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는 게 우리로서는 가장 큰 딜레마였다.

헌팅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안돼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강원도 정선으로 헌팅을 갔던 차가 눈길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중앙선을 넘어 마주오던 차와 정면충돌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많이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직원이 몰던 차와 상대편 차 모두 폐차 처리를 해야 하는 대형 사고였다. 직원은 일주일 동안 입원치료를 했고, 중앙선 침범 과실적용으로 벌금 200만원을 물었다.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헌팅을 시작,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우연히 전남 화순 어딘가에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정말 끝내주는 절경’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물어물어 인터넷으로 사진 한장을 겨우 찾아냈는데, 가히 우리가 찾던 천하의 절경이다. 나 역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상수도보호구역 접근금지… 전남영상위에 SOS

그곳은 붉은빛의 절벽이었다. 길이는 7km에 이르고, 수직으로 솟은 100m의 붉은 절벽이 마치 선경으로 둘러싸인 천지를 연상케 했다. 옛 선인들은 이곳을 양쯔강의 황주적벽(黃州赤壁)에 버금간다고 했단다. 게다가 이곳의 경치가 어찌나 좋았던지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도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13년 동안 수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정작 시련은 그때 부터 시작됐다.

이곳은 상수도보호구역이었기 때문에 일체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영화 촬영 허가를 문의하니 당연히 ‘안된다’는 말이 돌아왔다. 수십만명을 먹이는 상수원보호구역 안에서 영화 촬영을 허가해줄 수 없다는 정직한 논리였다. 결국 우리는 전남영상위원회에 구원 요청을 했다. 그래도 그 지역의 영상위가 도와주는 것이 훨씬 좋을 듯했다. 촬영으로 상수원이 오염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문서자료로 증명하고, 촬영계획서도 제출하는 등 촬영과 상수원 훼손은 별개라는 것을 모든 자료를 동원해 설득했다. 그러한 노고의 낙숫물이 서서히 바위를 뚫고 있었다. 촬영 신청을 한 지 정확히 한달 보름 만에 연락을 받았다. 비장한 마음으로 새벽길을 달려 내려갔다. 각각 다른 세곳의 담당자를 만나서 똑같은 이야기를 녹음기처럼 해댔다. 그러면 본인은 허가권이 없으니 다른 담당자를 만나라는 것이다. 차를 달려 댐으로, 관리현장사무실로 찾아다니며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드디어 촬영 허가를 받아냈다. 일체의 취사 행위나 쓰레기 투기, 수질오염을 유발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긴 했지만, 그래도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p.s 외부의 출입을 일체 금하는 곳이라 구체적인 지역을 밝힐 수 없는 게 아쉽다. 비록 지명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곳이 유명해지는 것을 극구 우려하신 상수원관리사무소의 소장님께선 이 글을 보시고 혈압으로 쓰러지실지 모른다. 세상에 공개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소장님, 죄송해요. 하지만 숨겨두기엔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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