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친구 그의영화]
[나의 친구 그의 영화] 내가 눈여겨본 건 엉덩이가 아니야
2009-01-22
글 : 김연수 (작가)
<쌍화점>의 그 신하 이름은 왜 좌시중이지? 효수된 왕비의 머리는 왜 가짜지?

<쌍화점>은 정말 좋은 영화였다.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거다. 못 만난 지 꽤 오래됐지만, 혹시 만나면 유하 선배라고 부르지 말고 감독님이라고 불러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본 뒤에 생각이 바뀌었다. 그냥 계속 유하 선배라고 불러야겠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건 우리 집안의 도도한 가풍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눈여겨본 건 동성애를 둘러싼, 몇 백년에 걸친 논란의 종지부를 찍는 듯한 그 멋진 엉덩이가 절대로, 결코, 진짜 아니었다.

그보다 나는 ‘좌시중’이 흥미로웠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왕의 처지를 이용해서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던 신하. 그런데 그 이름이 왜 하필이면 ‘좌시중’이란 말이냐? 듣자마자 당연히 현실의 누군가가 생각났고, 영화 내용과 결부되면서 연이어 지난해 인터넷에서 본 동인 만화가 떠올랐다. 그 동인 만화에는 두명의 남자주인공이 등장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결국 호위무사들인 건룡위에게 살해당하기 직전, ‘좌시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고 했다. 자유연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미친 듯이,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온 판국에도 홍림이만 걱정하는 왕의 모습을 보니 과연 지금의 경제팀이 교체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홍림만 걱정하는 왕을 보니 경제팀 생각이…

그래, 어쩌면 모든 건 바로 거기서, 그러니까 과도한 애정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혼자 결론내렸는데, 집에 와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좌시중’은 실제로 존재했던 관직이었다. 원래 이름은 ‘문하좌시중’. 사전에는 “고려시대에 도첨의사사와 도첨의부에 둔 종일품 벼슬. 공민왕 12년(1363)에 첨의좌시중을 고친 것으로, 뒤에 다시 문하시중으로 고쳤다”라고 나와 있다.

‘좌시중’이 왜 왕의 시중을 들지 않고 역모를 꾀했는가는 나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시중’들이 있으니까. 나는 여전히 이 이름만이 흥미롭다. 역사를 다룬 작품에서 실제 존재하는 관직명을 사용하는 건 최소한의 규약이다. 자료 안에서 상상하겠다는 것. ‘좌시중’이란 이름을 듣고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건 나처럼 생각 많은 사람의 일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내가 본 역사영화들은 다들 꽤 친절해서 문제였다. 관객이 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도록 디테일과 서사를 먹기 좋게 잘 잘라서 입에 떠넣어줬다고나 할까. 요즘 영화는 관객이 조금만 힘들 것 같으면 역사적 디테일도 바꿔버린다. 그래서 특정한 시기에 불가능한 디테일도 마구 등장하는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 이야기의 결말이 안드로메다에 가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는 점이다. 결국 역사에서 시작해서 SF판타지가 된다는 소리다. 역사극의 가장 문제적인 지점은 주인공이 자신을 둘러싼 인습을 비웃으며 지나치게 발랄해질 때다. 이 지점에서 주인공이 실제로 뭔가를 초월하는지, 아니면 제대로 재현하지 않은 걸 감추기 위해 진부한 서사로 퇴행하는 것인지는 잘 파악하기 힘들지만, 원칙은 그렇다. 격렬하게 현실을 풍자하지 않으면서도 불가능한 디테일을 사용했다면, 그건 서사적 곤경을 손쉽게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을 확률이 높다. 그런 점에서 ‘좌시중’이 왕의 시중을 들지 않은 것이 좋았다.

막 효수된 머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마찬가지로 효수된 왕후의 머리가 내 눈길을 끌었다. 요즘 효수에 관심이 많다. 막 효수됐을 때, 효수된 머리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통에 찡그린 표정일까, 아니면 영화에서처럼 평온한 표정일까? 내걸면 며칠 만에, 어느 부위부터 썩기 시작할까? 얼마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다보면 효수된 머리만 봐도 자시에 홍림을 만난 왕비마마처럼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지금부터 스포일러가 시작되니까, 읽고 싶지 않다면 아랫부분을 찢어서 버리시길).

서사적으로 봤을 때, 그건 왕비의 진짜 효수된 머리여야만 했다. 홍림은 웬만해서는 왕을 죽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복수할 동기를 부여하려면 왕비가 실제로 죽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발생한다. 과연 왕이 왕후의 머리를 잘라서 성문 앞에 전시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건 불가능한 디테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인지 영화에서는 그게 왕비의 머리가 아니라는 게 곧 밝혀진다. 말하자면 홍림의 동기는 오해에서 비롯한 셈이었다. 오해에서 비롯한 동기는 서사를 어디로 이끌어갈 것인가? 이 경우, 홍림의 선배라면 로미오를 들 수 있겠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를 결말로 이끄는 것 역시 오해니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주인공인 홍림도 로미오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이럴 때, 나는 손에 땀을 쥔다.

그러나 마지막 최종적 이별장면에서 <쌍화점>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나는 성문 앞에 걸린 머리가 왜 가짜여야만 했는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게 진짜였다면 <쌍화점>의 주인공은 홍림과 왕후였겠지만, 그게 가짜라면 주인공은 왕과 홍림이 된다. 왕비의 머리를 효수해서 전시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사소한 문제지만, 이건 사실상 서사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별장면에서 홍림의 가슴에 칼을 꽂은 왕은 “한번이라도 나를 사랑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데, 이에 홍림은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이때, 홍림은 그 머리가 왕후의 머리가 아니라는 걸 모르고 있다. 여기까지는 통속적인 비극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윽고 왕의 가슴에 칼을 꽂은 홍림이 죽은 줄 알았던 왕후를 볼 때부터 이야기는 급변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라는 오래된 문학적 개념이 내 머리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 건 여기서부터였다. 아이러니를 통해 <쌍화점>은 통속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에 이른다. 왜냐하면 우리도 한번쯤은 이런 아이러니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언제? 사랑이 끝난 뒤. 늘 언어는 사랑보다 늦게 도착한다. 우리는 무지한 채로 사랑하고, 이별한 뒤에야 똑똑해진다. 이 지체가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왕과 홍림만 이 아이러니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홍림에게 왕비와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거나, 그건 ‘연모가 아니었다’. 이 모든 게 효수된 머리에서 시작하는 셈이다.

나는 계속 ‘유하 선배’라고 불러야겠다

<쌍화점>은 이별의 미장센을 보여준다. 그건 영화적이라기보다 시적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유하 선배라고 불러야겠다. 사랑은 아이러니를 발생시키면서 끝나게 마련이다. 사랑은 어떻게 끝이 나는가? 비유하자면, 서로의 심장에 칼을 찌른 채 “한번도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한 뒤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두 사람이 죽어가면서(사랑이 끝나면 실제로 뭔가가 죽는다!)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하지만 끝내 말하지 못하는 장면으로 끝이 날 것이다. 이런 장면이 시적인 장면이다.

지난해 동인 만화에서 본 그 지독한 사랑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그게 진짜 사랑이었다면 아이러니를 발생시키겠지. 쓰라리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그건 당사자들의 생각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건 희소식일 것이다. 그들의 롤 모델 부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즈음 나는 부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임기 말이라 그런지 요즘 부시는 행사 뛰느라 정신이 없다. 뉴스를 보니까 어느 행사에서 부시가 이렇게 말했다. “웰컴 투 마이 행잉.”(내 교수형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반가웠다. 요즘 효수, 교수형 따위에 관심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웬걸, 거긴 부시의 초상화를 벽에 거는 행사장이었다. 이런 자학 개그라니. 내 일만 아니라면, 어떤 종류의 종말은 보는 것만으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모양이다. 서로 피투성이가 될지언정 그 동인 만화의 두 주인공도 이제 좀 헤어졌으면 좋겠다.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두 사람이 헤어지는 걸 지켜보면서 관객이 즐거워한다면 그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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