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주지훈] 불타는 승부욕, 겁이 없어 더 뜨겁다
2009-01-23
글 : 이화정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키친>의 자유분방한 천재요리사 두레 연기한 주지훈

주지훈이 <무릎팍 도사>에 나간다면 고민은 “사람들이 왜 아무도 저를 알아보지 못할까요?”일 것이다. 런웨이를, 브라운관을, 스크린을, 그리고 뮤지컬 무대를 종단하는 스물여덟의 이 남자는 무대와 촬영장을 벗어나면 신기하게도 소박하고 자유로운 평범함을 입는다. 리허설 땐 우황청심환을 먹어야 할 정도로 긴장하지만, ‘슛’ 소리와 함께 활활 타오르는 생명력을 부여받는, 그의 이름은 천생 ‘배우’다.

“<키친> 너무 기대돼요. 어떻게 보셨어요? 정말 괜찮아요?”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주지훈으로부터 끊임없는 질문공세가 시작된다.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 누군지 잠깐 잊어버릴 정도로 그의 관심은 온통 곧 개봉할 <키친>에 가 닿는다.

“아직 감독님이 영화를 안 보여주셨어요. 너무 보고 싶은데. 저한테 너무 소중한 작품이거든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의 개봉이 불과 얼마 전이니 <키친>은 배우로서 주지훈의 왕성한 채산성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앤티크>의 ‘진혁’을 여전히 곱씹는 중인 관객에게 주지훈은 이제 ‘두레’를 봐달라고 조른다. 두레는 ‘상인’(김태우)과 ‘모래’(신민아) 부부 앞에 갑자기 등장한 폭풍 같은 존재다. 상인에게는 유학 시절 알던 한국인 입양아이자 천재 요리사로, 또 지금은 레스토랑 개업을 위한 동업자로. 그리고 서울에 와서 우연히 만나게 된 모래에게는 차마 몰랐던 사랑을 일깨워주는 첫사랑 같은 설렘의 존재로.

“두레는 23살 내 모습과 꼭 닮았어요”

“두레가 하는 행동이 거의 제 모습이에요. 저랑 똑같아요.” 대뜸 그는 두레가 곧 자신이라는 도발적인 선언을 한다. 홍지영 감독의 전언이 이를 중명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자유로운 지훈이의 태도가 두레와 똑같았어요. 촬영 내내 지훈이가 두레에 대한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주었죠.” 자유분방하고 꾸밈없는 두레의 캐릭터와 연결하고 나니 막무가내로 두레를 칭찬하는 주지훈의 조름도 마냥 천진하다. “23살 두레는 제 23~25살 때의 삶이에요. 자유롭고 거리낌없고 행복했죠. 그때 만났던 사람들, 모델 일 모두 다 제가 죽을 때까지 가져갈 찬란한 기억이에요.” 그래서 그는 그때의 자신과 똑 닮은 두레가 맘에 꼭 들었다.

32회차 촬영, 한달 반가량의 그 여름이 나날이 소풍 같았고, 작품에 도움이 될 거라며 <제이미 올리버> 책을 건네주며 툭 터놓고 캐릭터를 상의하는 홍지영 감독과의 대화가 즐거웠다. <마왕>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추는 신민아와의 촬영이 편했고, ‘워낙 재밌는’ 김태우가 형같이 믿음직스러웠다. 말하자면 불륜인 두레와 모래의 감정이 그에게는 친근감을 표시하는 가벼운 ‘키스’처럼 상큼하게 다가왔고, 또 정을 모르고 자랐던 입양아 두레가 느끼는 사랑이 목마른 애정 같아 슬펐다. 그렇게 <키친>은 하나하나가 제 살갗으로 이해되는 작품이었다. 선택권이 없었던 <궁>을 지나, 온 힘이 소진됐던 <마왕>의 터널을 지나고 그리고 <앤티크>에서 가까스로 풀린 자신 안의 분노와 부담들이 걷어진 상태. 10여개의 시나리오 중 <앤티크>와 함께 대뜸 선택했던 <키친>은 주지훈에게 그렇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여유’를 선사한 작품이다.

서투른 연기로 혼나던 시절을 넘어…

이제 스물여덟. 이 작은 여유를 느끼기까지 지난 몇년, 주지훈의 일상은 녹록지 않았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의 일과는 항상 숨이 받쳤다. 욕심을 내지 않았지만, 그의 모습은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해 가쁘게 주행하는 100m 주자를 닮아 있었다. 톱모델의 후광을 업고 연기경험 없이 도전한 <궁>의 히로인 ‘이신’이 그랬고, <궁>에서 갓 데뷔한 신인이 연기로 승부를 봐야 하는 <마왕>의 이중적인 캐릭터 ‘오승하’가 그랬다. 어느 누구도 갑작스러운 ‘신데렐라’의 등극에 그리 후하지 않았다. 그의 선택에는 늘 행여라도 그가 작품에 누가 될까 조마조마한 시선들이 함께했고, 근거없는 걱정의 말들이 쉴새없이 쏟아졌다.

“전 운이 좋았어요. 늘 제 능력 이상의 것을 할 기회가 주어진 거죠.” 연작 <한뼘드라마>로 인연을 맺은 황인뢰 감독에게 <궁>의 주인공 역을 제안받았을 때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수차례 출연을 거절했다. 갑작스레 주목받고 기대치에 못 미쳐 사라지는 것보다 차근차근 쌓아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맞다고 판단할 만큼 그는 철든 신인이었다. 그러나 쉽게 올까말까 한 주연의 기회를 박차기엔 그의 능력은 그 이상이었다. 처음 <궁>을 할 땐 서투른 연기에 황인뢰 감독에게 혼난 적도 많았지만 그는 그 통과의식을 훌륭히 치러냈다. “얼굴이 알려지고 작품을 할 기회가 빨랐던 반면, 막상 제 스스로 ‘연기자’라고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출발은 정점인데 저는 늘 점프해서 겨우 잡아야 하는 그런 느낌이었죠.”

데뷔부터 항상 그랬다. <궁>이 주지훈을 ‘스타’로 발굴했고, <앤티크>가 가능성있는 ‘배우’로 그를 인식했던 것처럼 모델 시절부터 주지훈은 신선한 트렌드 그 자체였다. 187cm의 큰 키에 63kg의 몸. 여성보다 가는 팔다리를 타고난 그였다. 자연스러운 워킹, 남성 패션이 기존의 남성성을 강조하던 패션을 벗어나 몸에 잘 맞게 피트되는 옷으로 전환되던 시점. 디올 옴므의 옷을 소화해낼 몸을 가진 남자는 국내에서 주지훈이 유일했다. 하루 용돈 1천원, 문화적인 유일한 혜택은 만화책이 전부였던 시절. 모델 생활은 아는 형의 엄마가 권유해 프로필을 찍고, 저도 모르게 친구가 프로필 사진을 잡지사에 내줬고, 해보겠냐는 제안을 받아 시작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시작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 그가 가진 모델에 대한 승부욕은 이미 정점이었다. “그 아이는 달랐어요. 언제나 역질문을 하는 노력파였죠. 제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이럴 땐 어떤 포즈가 좋을까요? 늘 자신을 연구하는 거죠. 늘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했어요.” 모델 시절부터 그를 카메라에 담고 지켜봐온 포토그래퍼 안성진은 주지훈의 근성을 잊지 않는다.

‘어쩌면 남이 만들어준 운명’이라는 소리에서 벗어나려고 작품 하나하나에, 그는 자신을 수식하는 ‘행운’ 대신 실력으로 승부를 하려한다. 주지훈의 선택은 그래서 언제나 톱니바퀴처럼 도전이라는 속성과 이가 꽉 맞게 맞물려 있다. “<마왕>은 <궁>에서 받은 후광을 벗고 제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어 일부러 선택한 작품이에요.”

뮤지컬 <돈주앙>을 향한 또 한번의 도전

주지훈은 밖으로부터 제안받은 시나리오 대신, 스스로 마음이 동한 <마왕>을 하겠다고 나섰다. 주지훈을 잘 모르던 박찬홍 감독에게, 주지훈을 못 미더워하던 김지우 작가에게 “믿어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결심을 드러냈다. 원래 통용되던 자신의 개런티에서 1/3 수준의 개런티를 감내했고, 한순간도 오승하를 놓지 않으려 연습에 매진했으며,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동안 괴로울 정도로 푹 빠져 있었다. “그 힘든 <마왕>을 제가 제 손으로 택했을 정도로 <궁>을 하면서 겪었던 과정들이 힘들었던 거죠. 저를 둘러싼 선입견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촬영장에서 ‘다크서클’을 달고 다닐 정도로 <앤티크> 촬영 역시 고됐지만, 마치 악몽을 꾸는 영화 속 진혁처럼 하루 한 시간 수면을 감내하며, 그는 배우 주지훈으로서의 자신을 즐겼다.

2월6일부터 한달간 주지훈은 또 한번의 ‘불가능한’ 도전을 감행한다. 한 무대에서 무려 18곡의 노래를 소화해야 하는 뮤지컬 <돈주앙>. 그는 세기의 바람둥이 돈주앙으로 옴므파탈을 선보인다. “절대적으로 연습시간이 부족해요. 걸음마는커녕 기는 것부터 배워야 하니까요.” 목도 보호해야 하고 무대에서 컨디션도 조절해야 해서 하루 4시간의 수면은 지켜줘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고 싶지 않아요. 계속 연습하고 싶어요”라고 한다. 행여 자신의 설익은 연기가 작품에 나쁜 영향을 줄까 염려가 앞서서다. “그래도 해보고 싶었어요. 다 같은 연기니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모델 때부터 포즈 하나하나가 제겐 모두 연기의 일환이었어요. 사진 한컷 한컷, 카메라 셔터의 리듬을 따라 감정을 잡아나가는 거죠. 모델도 드라마도 영화도 뮤지컬도 제겐 모두 ‘배우’의 하나, 똑같은 작업이에요.” 하루 24컷의 사진을 찍는 일이 허다했고, 젠틀한 슈트와 펑키한 옷을 바꿔 입으면서 그는 자신의 연기에서 ‘변화와 변신’이라는 단어를 삭제해버렸다. 한번도 변신을 꿈꾸며 스스로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모습을 끄집어낼 뿐이다. “지훈이는 스스로 자의식의 바벨탑을 쌓는 아이에요.” <앤티크>의 민규동 감독은 그의 도전을 이렇게 설명한다. “겉으로는 시작에 불과한 불안한 친구지만, 본인은 하늘에 닿으려는 야심으로 고난을 자처해요. 잘하는 걸 발휘하는 배우가 아니라 못하는 것도 도전해서 자기 걸로 만드는 배우죠.”

장동건보다는 조승우가 목표

모델 시절 그는 런웨이를 벗어나면 100m 밖에서도 눈에 띄는 친구들과 달리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다보면 아무도 절 못 알아봐요. 전 다른 친구들보다 가진 에너지가 부족해요. 제 한계를 스스로 잘 알고 있고 그게 저의 유일한 장점이에요. (웃음) 주목받았다고 ‘흥, 내가 제일이야’ 생각했다면 아마 자멸했겠죠.” 장동건을 제치고 잘생긴 배우로 뽑히는 것보다 욘사마를 능가하는 한류배우가 되는 것보다 그가 되고자 하는 목표지점, 카테고리는 조승우가 스크린에서 내뿜는 자유자재의 보폭에 가깝다. “다행인 건 전 특징이 없는 것 같은데도 매번 다 달라 보인다는 거예요. 모자를 쓰냐 벗냐, 가르마를 올리냐 내리냐, 이런 작은 변화로 말이죠. 덕분에 제가 달라진 모습에 기를 받아 그 인물이 좀더 쉽게 될 수 있는 거죠.”

앞으로 <키친>으로 이제야 달콤함을 알게 된 멜로도 더 해보고 싶고, 예전 같으면 관객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할까 자신없어 거절하던 장르물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모르는 세계와 부딪혀 또 다른 주지훈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나저나 아직은 <돈주앙> 연습이 우선이다.

스타일리스트 정혜진, 홍원호·헤어&메이크업 임해경·의상협찬 송지오 옴므, FitBow by Msk, Our LEGACY BY MSK, 컨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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