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는 이들이 얄미워서일까. 겨울이 발악이라도 하듯 매서운 기운을 쏟아내니, 며칠 따뜻한 날씨에 적응했던 약삭빠른 몸이 벌벌 떤다. 예전보다 그리 춥지 않은 겨울이지만, 그래도 겨울 추위는 지겹다. 야외촬영장에서 밤을 꼬박 새워야 하는 내 처지에선 특히 더 그렇다. 남보다 더 빨리 봄을 보고 싶은 마음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길로 차를 몰았다. 남쪽으로 달리고 또 달려 반도의 끝자락 강진 땅을 찾아갔다. 해남 땅끝 마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진은 보성이나 완도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다.
남해를 품은 고깔 모양의 강진만 앞바다에는 여러 개의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수놓아져 있다. 남해와 맞닿은 매끈한 개펄을 미끄러져 들어가면 작은 섬들에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고, 그 섬 너머로 다시 육지가 보인다. 외지인들에게 바다에 떠 있는 것이 섬인지 육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선경을 만들어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의 그곳은 양어장으로 변신
강진의 벌판에는 유난히 청보리가 많다. 비싼 수입 사료를 대체하기 위해 면적이 늘어나는데, 덕분에 신이 난 건 그 푸르름을 즐기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강진의 벌판은 특히 아름다운 영상미를 선사한다. 아마도 그 수혜를 최고의 영상미로 끌어올린 영화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일 것이다. 극중에서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마지막 장면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강진의 청보리밭에서 촬영됐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명대사로 잘 알려진 <봄날은 간다>는 삼척의 맹방해수욕장, 삼척 신흥사, 정선 아우라지, 강진 청보리밭 등을 돌며 촬영한 작품이다. 또한 장소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곳이 간직한 평화로운 소리를 담아내기도 했다.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유지태)와 라디오 PD인 은수(이영애)가 함께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러 다니며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 시각정보보다 청각정보로 먼저 느껴진다. 마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어느 CF의 카피를 보는 듯하다. 아름다운 곳에서 같은 곳을 보고 있으면 이렇게 마음도 핑크빛으로 물드나보다. 개인적으로는 극중에서 잠자리에 누운 상우가 은수와 나눴던 뜨거운 키스를 생각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호들갑을 떨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사랑에 흠뻑 빠진 그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이들도 자신이 겪었던 두근거림의 순간을 떠올렸으리라.
그러나 결국 두 남녀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헤어진다.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상우가 찾아간 곳은 청보리가 드넓게 펼쳐진 해변 언덕이다. 보리밭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녹음하며, 자신에게 사랑을 심어주었던 대자연에 이제는 종교의식을 행하는 사제처럼 스스로를 치유하며 안식을 찾는다. 두팔을 벌리며 바람소리에 흠뻑 취해 있던 그 아름다운 청보리밭은 아쉽게도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 양어장이 들어서면서 당시의 풍경이 사라진 것이다. 그나마 강진군 대구면 하저마을이라는 작은 포구를 가진 해변마을에 있는 청보리밭에서 비슷한 느낌을 찾을 수 있다. 아직 싹을 틔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언뜻 잔디밭처럼 보이지만, 머지않아 청보리들은 상우가 들었던 ‘치유의 바람소리’가 묻어날 정도로 훌쩍 자랄 것이다. 지난 늦가을 땅속에 뿌려져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언 땅을 치받고 고개를 들었을 청보리들도 상우만큼이나 스스로를 버텨내는 에너지가 강할 테니 말이다.
다산초당의 동백꽃도 꼭 보고오길
강진을 갔다면 꼭 보고 와야 할 것들이 많지만 그중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다산초당’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다산초당’은 최근 한국관광공사의 TV CF ‘방방곡곡’ 편에서 정호승 시인의 그곳으로 등장하는 ‘뿌리의 길’로 알려진 장소다. 특히 이곳의 누각에서 내려다보는 강진 벌판과 강진만이 절경이다. 먼 들판에서 뽀얀 연기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푸른 내음도 봄이지만. 다산초당 주변에 핀 동백꽃의 붉은 기운도 잊지 못할 만큼 강렬하다. 꽃잎을 만지는 손가락까지 붉게 만들 기세라고 할까.
또 초당 옆에는 석가산이라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이곳에 비친 다산초당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다산 선생은 이 못에 잉어를 키웠는데 유배가 풀려난 이후에도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잉어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한낱 미물인 잉어에게도 이토록 정을 쏟았던 다산 선생의 일화를 듣다보니 지금의 난 내 지인들에겐 어찌 하는가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진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길에 누군가 스승이 되어준다면 그것이 상우가 되어도 좋고, 다산 선생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바람인들 어떠하며, 동백꽃인들 어떠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