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라 할 수 있을지도)
2주 전, 국내 영화 칼럼으로는 최초로 전회 칼럼의 줄거리를 요약한 뒤 그 뒤를 이어 쓰는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하였으나- 국내 최초 참 좋아한다- 독자는 줄거리 요약을 내가 한 게 아니라 편집부가 한 줄 알고, (나는 그냥 원고 적게 쓰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고) 함께 칼럼 쓰는 Y(나도 이렇게 불러야 하나)에게는 ‘요약하지 마라, 그러면 칼럼이 판타지가 된다’라는 쓴소리까지 들었으니, 이번엔 국내 영화 칼럼 최초로 ‘다음주 칼럼 예고편’을- 이건 진작에 누가 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시도해볼까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할 일이 없었던 1995년 무렵, 그토록 무섭던 청년실업의 시대에 (지난주 칼럼 참조) Y와 나는 영화 잡지사에 원서를 낸 적이 있다.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지금은 사라진) <키노>에, 21세기에 관심이 많았던 Y는 <씨네21>에 입사지원서를 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Y는 과연 최종합격을 하였을까.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소설가로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김연수씨. 그가 육성으로 고백하는 어두운 시절의 <씨네21> 입사기를 기대하시라.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 처절한 사연이 공개됩니다(현재 영화계에서 일하는 수많은 영화인들이 실명으로 등장합니다).
그 시절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지금의 나이가 새삼스럽다. 올해 나이 마흔, 마흔, 마흔- 어디선가 유세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이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도무지 상상해보지 못한 나이였다. ‘마흔살요? 그때쯤이면 천재들은 대부분 다 죽지 않나요?’ 그러니까, 살아남았다.
맞아, 쉰살이야말로 낭만적이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는 나이에 대한 성찰이 자주 등장한다.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는 기이한 운명을 지닌 벤자민 버튼은 스무살 때 힐더가드라는 여인을 만난다. 나이는 스무살이지만 쉰살의 외모를 지닌 벤자민은 그녀에게 구애하길 망설인다. 그러나 그녀가 먼저 손을 내민다.
“선생님 나이는 낭만적이에요. 쉰살.”
(벤자민이 쉰살이라고 착각한 힐더가드)
“스물다섯은 너무 세속적이에요. 서른은 일하느라 바빠서 피폐해지기 십상이고 마흔은 시가 한대를 다 피울 때까지 끝도 없이 이야기를 하는 나이죠. 예순은… 아, 예순은 일흔에 너무 가까워요. 하지만 쉰살은 원숙해요. 전 쉰이 좋아요.”
쉰이 정말 좋은 나이일 것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힐더가드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물다섯에는 세속적이었고, 서른은 일하느라 바빴고, 마흔에는 말이 많아졌으니, 쉰이 되면 낭만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로 만들어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고 꽤 실망했다. 데이비드 핀처의 전작 <조디악>을 지난해 최고의 영화 톱10에 넣었던 나로서는 도무지 이런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데이비드). 우선 원작을 읽으며 배꼽을 잡았던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농담이 모두 사라졌다. 영화 나름의 매력이 있긴 하지만 원작에 비해 너무 진지하다.
소설에서 벤자민 버튼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와 맞먹는다. 신생아실의 침대에 걸터앉은 벤자민의 첫마디는 이렇다. “댁이 내 아버지인가?” 어린 나이에 시가를 피우고, 유치원에서는 태도 불량으로 쫓겨난다. 나이가 들고 점점 어려지자 그는 사교계를 점령한다. 제일 젊은 유부녀들과 춤추고, 사교계에 갓 데뷔한 소녀들과 잡담을 나눈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은 나이와 세월과 시간에 대한 엉큼한 농담이자 인간의 숨겨진 욕망에 대한 적나라한 비유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모든 농담이 빠지고 시간만 남았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재미없는 동화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브래드 피트의 ‘뽀사시’한 (컴퓨터그래픽의 승리!) 얼굴까지는 괜찮았지만 12살의 벤자민, 6살의 벤자민 역을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순간 영화는 동화로 바뀐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이며, 사람들은 그 시간을 얼마나 힘겹게 통과하며,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뒷부분에서는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애들은 가라, 이건 성인영화여야 한다
이 영화는 절대 12세 관람가여선 안된다(애들은 가라!). 벤자민 버튼은 자신의 특별한 운명을 스스로 비웃거나 함부로 탕진하고 아무렇게나 소비해야 한다. 그래서 어린 나이엔 노인을 비웃고, 노인이 되어선 소녀들을 유혹하는 초월적 존재가- 벤자민 버튼이야말로 진정한 슈퍼히어로-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나이대 사람들의 쭈글쭈글한 피부를 마음껏 비웃어야 한다. 도대체 그런 능력의 소유자가 인도에 가서 구도의 길을 걷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젊어진 벤자민 버튼과 늙어버린 데이지가 만났을 때다. 인도에서 구도를 마치고 돌아온 벤자민 버튼은 부쩍 늙은 전 부인 데이지를 만나러 온다. 둘은 호텔에서 포옹한다. 데이지는 말한다. “벤자민, 난 늙은 여자예요.” 한때 젊은 여자와 늙은 남자로 만났던 두 사람은 이제 젊은 남자와 늙은 여자로 다시 만났다.
섹스가 끝난 뒤 데이지는 벽을 보며 옷을 입는다. 늙은 여자의 몸이다. 등에는 검버섯이 피어올랐고 살은 쭈글쭈글하고 축 늘어져 있다. 침대에 누운 벤자민 버튼의 얼굴은 뽀얗다 못해 광채가 난다. 이런 환멸의 순간이야말로 피츠제럴드가 쓰고 싶어 했던 주제였을 것이다. 이건 성인영화여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숫자가 순서대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40 다음에 3이 올 수 있다면, 79 다음에 18이 올 수 있다면 우리는 나이를 좀더 재미있게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지난해에 어리다는 이유로 굴욕을 당했다면 올해는 나이를 많이 먹고 복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올해 늙었다고 왕따당했다면 내년엔 대폭 나이를 줄이고 젊은 아이들과 밤새도록 신나게 놀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1 다음에 2가 오고, 19 다음엔 20이 오고, 39 다음엔 40이 온다. 그건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숫자. 우리의 일생을 100이라는 숫자로 생각한다면 그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0으로 향해 갈 것이다. 우리의 나이를 나타내는 숫자는 증가하고(↗), 우리의 일생을 나타내는 숫자가 줄어드는(↘) 그래프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느낄 수밖에 없는 환멸과 두려움과 기대와 체념의 복합적인 감정들이야말로 벤자민 버튼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 한 이야기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