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는 시나리오]
[뒤집는 시나리오] <슬럼독 밀리어네어>
2009-04-08
사진 : 길윤형 (한겨레 기자)
퀴즈쇼가 바꾸지 못한 것

소녀는 가난했다. 또래들과 함께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이웃 주민의 소개로 검정고시를 치러 중학교에 입학했고, 방과 뒤에는 동네 초등학생들을 가르쳐 용돈을 벌었다. 고등학생 때는 교내 우유배달로 번 근로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했다.

첫 번째 문제. “조선작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영자의 전성시대>의 주연배우는 누구일까요?” 소녀는 그저 눈을 껌뻑일 수밖에 없었다. 소녀의 도시 문산에서 젊은 여성들이 야한 옷을 입고, 미군들에게 주스와 웃음을 파는 광경은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여성들이 젓가락을 두드려대는 허름한 선술집의 한구석에 그 영화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염복순!”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친구들이 자율학습을 하는 저녁 시간에는 지병과 장애를 앓는 부모님과 군부대 자투리 땅을 빌려 오리를 키웠다. 소녀의 아버지는 야구경기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의 연도별 타율과 타점, 홈런 개수를 줄줄이 외웠다. 두 번째 문제.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역전 3점 홈런을 쳐 롯데에 우승을 안긴 선수는 누구일까요. 1번 이만수, 2번 김용희, 3번 김용철, 4번 유두열.” 소녀의 눈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4번 유두열. 다시 관객석에서는 환호의 박수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소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두열이 홈런을 쳤다는 것은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소녀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소녀는 조금 당혹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열 번째 문제. 소녀의 꿈은 소설가였다. <소공녀> <비밀의 화원> 같은 동화책 읽기를 좋아했다. 소녀는 이웃집 오빠의 집에 꼽힌 30권짜리 세계 명작동화를 빌려와 밤새 읽었다. 어느 날에는 <해저 2만리>의 노틸러스호를 타고 대서양 바다를 휘저었고, 다른 날에는 <하늘을 나는 교실>에 나오는 독일의 기숙학교를 동경하며 잠이 들었다. “알렉산드로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삼총사는 아토스, 포르토스와 누구일까요?” 소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옆집 오빠가 소풍 갔다가 <삼총사>를 잃어버린 탓에 유독 그 소설만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 보기 들어갑니다. 1번 달타냥, 2번 리슐리에 추기경, 3번 아라미스, 4번 이명박.” 소녀는 운명의 신에 자신을 맡겨보기로 결심했다. 3번 아라미스. 관객석에서 이제껏보다 더 큰 큰 함성이 터져나왔다. “정답입니다. 골든벨 43번째 주인공 탄생입니다.” 정신없이 꽃가루가 날렸다.

소녀가 골든벨을 울린 뒤 소녀의 집에 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방송이 수능 10일 앞두고 방영된 탓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동네 잔치에도 얼굴을 내밀어야 했고, 이곳저곳 인사를 드려야 할 곳도 많았다. 소녀의 사연을 지켜본 비평가들은 방송이 소녀의 가난과 소녀의 딱한 사연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고 비난했다. 다른 쪽에서는 “그게 뭐 어떤가”라는 반론을 제기하며 역공에 나섰다. 소녀의 사연을 전한 방송은 연말 시상식에서 크고 작은 방송상들을 휩쓸었고, 사람들은 소녀를 “역경을 극복한 골든벨 소녀”, “슬럼독에서 탄생한 밀리어네어”라고 칭송했다.

정작 소녀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소녀는 “나는 가엽지도 대견하지도 않은 평범한 학생”이라며 “아직 역경을 경험한 적이 없고, 앞으로 극복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머쓱해진 사람들은 하나둘씩 흩어져 갔다. 소녀는 골든벨을 울린 뒤에도 그전처럼 성실하고 평범한 소녀로 살았다. 퀴즈쇼는 소녀를 바꾸지 못했고, 아마 자말의 천진하고 선한 눈빛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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