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도시적 삶은 탐정을 만든다.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우는 비에 젖은 도시의 밤, 범죄와 욕망의 혼돈상이 만들어낸 표상이다. 사립탐정은 양차 대전기 부상하는 부르주아 계층 사생활의 권리에 봉사하던 법의 사적 대리인이었다. 비도덕적 국가와 타락한 도시란 탐정의 탄생에 필수적 요소다. 사립탐정이란 국가권력 공백의 은유이자 문란한 부르주아 사생활의 증후다. 이는 전후 강력한 국가 주도의 냉전체제가 가속화되면서 탐정이 스파이로 변형되었음을 상기하면 자연스럽게 수긍되는 점이다. 또한 사립탐정이란 타산적 금욕가다. 냉혹한 균형감각은 사회와 개인, 도덕과 비도덕 두 공간 중 어느 곳에도 휩쓸리지 않을 탁월한 중립성을 요구한다. 냉혹의 감성은 탐정의 기본적 파토스이며 그는 기본적으로 자립적인 도시 독신남이다.
정확히 시대를 추정하기 힘든 <그림자살인>의 경성 역시 확장하던 근대 도시였다. 영화에 황제가 등장하고 헤이그가 언급되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1910년 초반으로 추정되지만, 영화에 재현된 도시 풍경엔 1930년대를 방불케 할 만큼 화려한 광고와 간판이 즐비하다. 그러나 재현의 충실도를 따지는 것이 여기선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닐 듯하다. 중요한 점은 조선 탐정의 전형이 잘 마련되었는가와 어느 정도로 추리게임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가는가 하는 문제다.
조선 탐정의 공식, 복수와 활극
영화는 세겹의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벽에 세겹으로 붙은 광고를 통해 이미지화되었다. 첫 번째 층위는 경무국장으로 대변되는 일제의 경찰권과 내무대신 집안으로 대변되는 정치권을 침해한 살인범에 대한 수배 공고이다. 제국주의 경찰권력이 보이는 이 강력한 의지는 어수룩한 순사들에 의해 실현되면서 상당히 희화화된다. 두 번째 층위는 급전을 떼이거나 부인이 바람난 일을 해결해준다는 사립탐정의 광고문에서 드러난다. 사생활의 층위에선 자본과 욕망이 민족을 넘어선다. 내밀한 사생활의 등장과 더불어 사립탐정은 근대사회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세 번째 층위는 대중에게 유희와 스펙터클을 제공했던 서커스 공연 광고다. 이 층위에서 본래의 영화 제목이었던 <공중곡예사>를 추정하게 하는 조선인 자매 공중곡예사가 등장한다. 이 층위가 영화에서는 가장 모호하고도 복잡한 양상을 드러내는데, 그 의미망은 영화의 끝부분에 이르러서야 해명되게 될 것이다.
영화 <그림자살인>은 이렇게 삼중으로 겹 쓰인 광고로 구성된 영화이며, 그 광고가 불러일으키는 감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잔혹한 살인에 대한 경악, 사생활 정탐과 호기심, 그리고 서커스와 은밀한 욕망. 그런데 이 영화는 이 세겹의 층위가 얽히고설킨 것을 보여주는 동안 영화 본래의 장르적 쾌감, 즉 미스터리의 해명과 진리 인식을 통해 얻는 쾌감을 상실하고 만다. 추리 장르는 미스터리가 해소되는 데 대한 인식의 즐거움이 따르는 장르이다. 하지만 <그림자살인>은 미스터리의 해소가 주는 지적 쾌감보다는, 결말에서 주는 민족적 보상 심리에서의 쾌감을 더 큰 변수로 잡은 듯하다. 이 영화에서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는 과정이란 이성과 논리를 통해 차근차근 수수께끼가 투명해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직관을 통한 해소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선 피해자들의 타락상을 보여줌으로써 조선을 지배하는 최고 권력층의 결함을 드러내는 것이 우선이지, 범인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일제시대에 탐정소설은 대중들의 읽을거리 중 최고 인기 장르였다. 많은 서양의 추리소설이 번안되어 소개되었고, 추리소설 전집이 등장하는가 하면 김동인, 방정환, 김래성, 채만식 등은 본격 탐정소설을 쓰기도 했다. 특히 김래성의 유불란, 채만식의 백영민 등은 독자적인 조선 탐정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소설들의 특징은 이성과 논리를 내세워 미스터리를 해소하는 방향이라기보다는 서사의 종결이 주로 원한과 그에 다른 복수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활극적 요소가 주된 흥미의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그림자살인> 역시 이러한 식민지 조선 탐정물의 흥미성의 요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에서 공중 곡예사로 등장하는 자매는 매우 노골적인 알레고리다. 하이-칼라 옷을 입고 도시를 활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남루한 조선옷을 입은 자매의 모습은 두드러지게 애처롭다. 로야-루 서커스단에서 모두가 일본 옷을 입은 반면, 두 자매만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식민지 최고 권력층의 성적 유희의 대상이 되면서 자매는 민족의 한을 성적 수치로 치환시킨다. 따라서 영화는 ‘살인범’ 자체가 아니라 ‘살해당한 자’들을 내밀한 추적과 응징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우연히’ 제국주의 일본의 음모까지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을 파헤치는 것이 유린당한 민족성에 대한 복수의 일환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영화는 중간 중간에 활극적 요소를 적극 활용하여 도주와 추격이라는 흥미성을 유발하고 있다. 영화는 결말이 지닌 민족주의적 강박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흥미롭고 재미있다! 그만큼 복수의 응징과 활극적 요소는 한국 대중영화 유희성의 암묵적 무의식이라는 말이다.
근대적 도시인에서 대한제국의 신민으로 회귀
그러나 여전히 미스터리의 최초 발화와 최종 해소 사이에 놓인 미묘한 불일치의 인상이 씁쓸하게 남는다. 식민지 경성을 다룬 영화 <모던보이>에서 해명이 애타게 난실을 찾다가 결국은 조국을 찾으러 나선 것처럼 <그림자살인>은 애타게 살인자를 찾다가 조국의 호명에 답하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다. 이 지독한 결말의 강박. ‘의리 없이는 살아도 돈 없이는 못 산다’던 탐정 홍진호의 운명은 두번이나 부서지고 마는 만시경을 통해 드러난다. 만시경이 그 ‘엿보기’의 선정적 기능을 기각할 때, 그 기능은 플래시가 지닌 강력한 빛 하나만 남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인 범인과의 결투신에서 ‘빛’은 어둠을 이기고, ‘총’은 범인의 칼을 이긴다. 이렇게 빛과 총이라는 근대의 상징이 영화의 윤리적 헤게모니의 우월성을 형성하며, 그 와중에 탐정은 범인을 능가하고 제국주의적 야심까지 차단하는 이중의 성과를 이룬다.
추정컨대 홍진호는 대한제국의 군대 중 친위대의 참영이었다. 강제적 한일합병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없어진 이후 그는 순사가 된 오영달과는 다른 길을 택한다. 공권력이 정당한 국가의 것이 아닐 때, 그는 제도 밖에서 정의를 담당하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말에서 얼굴 없는 조국(영화에서 ‘황제’의 얼굴은 구체적으로 표상되지 않는다)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데에 이르면 영화는 처음의 출발점과 동떨어진 기이한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서사 내적으로 가장 큰 미스터리는 잃어버린 편지로 상징되는 상실된 조국이다. 세겹의 광고, 그 삼중의 이미지는 얼굴 없는 존재자의 압도적 현존성에서 용해되어버리고, 결말은 전체를 무화시킨다. 그리하여 영화는 상당히 흥미롭지만 무력하고도 무의미한 중력장에 머물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