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는, 때론 승자만이, 상상할 수 있다. 패자는 패배의 기억과 오늘에 지속되는 패배의 효과로 인해, 종종 역사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것은 제3세계인에게 이중의 불행이다. 서부극이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원주민과의 전쟁에서 승자인 미국인의 기록으로 시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찰되고 수정되고 심화되어 역사적 기억의 영년 혹은 그 바깥에 이르렀다. 기록은 상상력이 되고, 역사는 신화로 변모했다.
만일 인디언의 소국이 우여곡절 끝에 세워졌고 그들이 그 역사를 서부극으로 기록하려 했다면, 그들의 서부극은 그 패배의 바깥을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적어도 대중 서사에서 역사적 승자는 승리를 잊을 수 있어도, 패자는 패배를 잊을 수 없다. 승패의 효과가 지속되는 한 그러할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모든 제3세계 텍스트는 반드시 국민국가적 알레고리로 독해되어야 한다”는 단언은 그 사태의 확인이다.
이야기는 헐겁지만 착상은 참신
이만희의 <쇠사슬을 끊어라>(1971)가 놀라운 것은 희귀하게도 역사적 기억의 바깥으로 탈주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의 만주 도둑인 주인공들은 일본과 잃어버린 조국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 그 경계 너머 “영원히 낮이 지속되는” 무시간성의 광야로 떠난다. 또 다른 방식도 있다. 예컨대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에서(<괴물>에서도 부분적으로) 승리와 패배, 가해와 피해의 대립항들을 교묘하게 상호 침투시켜 대립 자체를 최종적으로 무효화해버린다. 실제 사건에서 출발해 역사적 기억을 삽입한 뒤 결국엔 무지에 이르는 이 허망한 여정은 이만희와 같은 탈주가 아니라 역사적 기억의 얼개를 내파하는 것이다. 거처를 잃어버린 패배의 기억은 공포의 이미지로만 남아 유령처럼 떠돈다. 1980년대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그 봉준호의 냉소주의적 내파에 거리감을 느끼고, 일제시대의 상처를 잊지 못한 세대가 이만희의 낭만주의적 탈주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해도, 그 성취의 희소성은 부인할 수 없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날들을 살고 있는 유능하고 냉소적이며 껄렁껄렁한 사립탐정 이야기 <그림자살인>은 재미있는 영화다. 이야기는 헐겁지만 착상은 참신하다. 다만 그 장점에도 <그림자살인>을 보고 나면, 이 영화를 가두고 있는 패배의 기억이 딱딱한 주형이 되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드문 예외가 있다 해도, 역사적 기억을 불러들이는 순간 패배의 기억에 갇히는 건 얼마간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림자살인>은 민망할 만큼 순진하고 도식적인 얼개에 역사적 기억을 끼워 맞춘다. 탈주하거나 내파하기는커녕 그 반대로 알레고리조차 무색해질 만큼 경계를 더욱 강화하고 도식을 더욱 둔중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지난해 <신기전>을 보았을 때만큼 혹은 그보다 더 당혹스럽다.
탐정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물론 반복하건대 <그림자살인>은 즐길 만한 영화다. 그 즐길 만한 요소들은 주성철 기자가 <씨네21> 697호에 잘 정리해놓았다. 덧붙이자면, 세트와 촬영이 특히 돋보인다. 너무 자주 등장해 이젠 생동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남양주종합촬영소의 옛 서울 세트의 낯익은 공간 구성과 색감을 완전히 벗어난 구한말 경성의 오픈 세트는 충분히 신선하고 풍성하며, 시장에서의 용의자 추격 장면(크레인숏이 더 많이 활용되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이나 서커스 공연의 나비 마술 장면은 손색없는 볼거리다. 황정민은 오랜만에 제 물을 만난 듯 생기가 넘치며, 다른 주·조연들도 나무랄 데가 없다. 반면 이야기는 추리극으로서 허점투성이다. 예컨대 일본 총감의 유흥 가옥이며 마약의 보고인 그 건물에서 온갖 난투극이 벌어지는데도 경비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살인자가 때맞춰 이곳에 도착하는 경위도 알 수 없다. 고전적 추리극에서의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마지막 집결장면을 이렇게 허술하게 만든 이유를 잘 모르겠다.
더불어 얼마간의 오해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한국영화의 장르적 외연을 넓혔다고 광고되었고,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사립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한국영화는 나도 본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탐정(detective)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최후의 증인>(1980) 혹은 <살인의 추억>(2003), <혈의 누>(2005)는 주인공이 형사 혹은 관리이지만(추리 연구가들은 형사소설을 추리소설의 하위 장르로 본다) <그림자살인>보다 정통 추리극에 훨씬 가깝다. 탐정이 아닌 사람이 탐정 역할을 떠맡는 이야기라면, 전직 형사인 포주가 살인범을 쫓는 <추격자>(2008)가 범죄의 퍼즐 풀기라는 ‘탐정영화’의 약속에 더 충실하다. 한국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래성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한형모의 <마인>(1957)과 임원식의 <마인>(1969)에는 문자 그대로 사립탐정(동시에 비밀경찰이기도 한)이 나오지만 두 작품 모두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
한국영화에서 사립탐정이 주인공으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흥신소 직원이 아닌 범죄 전문 사립탐정이 한국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자경단’이 우리 근대사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의 막강한 장악력 때문이다(<씨네21> 666호, <다크나이트> 평 참조). <그림자살인>의 시대 배경이 주권의 강제적 이양기인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한일합병 사이(더 정확하게는 1907년의 헤이그 밀사 사건 직후) 즉 국가권력의 장악력이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과도기인 것은 적절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안에서는 영국 태생이지만 현실에서 사립탐정이 제일 번성한 곳은, 자경단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다. 자경단의 전통이 웨스턴 장르와 연관되어 있다면, 탐정의 번성은 필름누아르(토머스 샤츠의 분류에 따른다면 하드보일드 탐정장르)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까 수많은 만주웨스턴과 마찬가지로 <그림자살인>은 기묘한 자리에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장르적 인물을 통해 역사적 기억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림자살인>의 무대가 구한말이라는 사실은 장르적 쾌감 면에선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제국주의적 통치와 피지배자의 대립은, 숨겨진 거대한 악과 그것에 맞서는 단독자로서의 탐정이라는 필름누아르의 관습적 대립의 설계를 위한 보조장치에 가깝다. 그러므로 역사적 기억과 경험만으로 이 영화의 대중영화로서의 자질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자살인>에는 간과하기 힘든 문제가 있다.
터무니없는 수준의 인물 묘사
아마도 다른 평자들이 너무 빤한 것이어서 말하기조차 멋쩍었을, 그래서 하지 않았을 불만을 말하려 한다. <그림자살인>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친일 관료들은 어린 여아의 처녀성을 탐하는 변태 성욕자로 나온다. 여아 제공자에게 그들은 대금으로 마약을 제공한다. 일본 의사는 돈에 눈먼 비윤리적 인간이며 친일 순사부장은 초등학생의 지능도 갖지 못한 지진아로 등장한다. 반면 고종 황제는 베일에 가려진 채 중후한 음성과 단호한 말투를 지닌 멋진 신사로 나온다. 이것은 허망한 자위이며 일회용 분풀이일 뿐이다. 사실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일본 식민지 통치의 문제는 지배기구에 참여한 사람들의 개인적 범죄성의 문제가 아닌 구조와 제도의 문제라는 점을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가 즐길 만한 오락이라 해도, 웬만한 방송 사극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의 인물 묘사까지 참긴 힘들다. 가장 어이없는 대목은 황제가 네덜란드에 가서 주인공에게 밀서를 찾아오라고 요청하는 마지막 시퀀스이다. 만국평화회의에서 수용되기는커녕 낭독도 되지 않았던 그 밀서의 회수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 밀명을 받든 주인공이 왜 그렇게 환호작약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다른 방식, 예컨대 주인공이 자신이 타려 했던 미국행 프레디호에 여인을 태워보낸 뒤 일장기가 더 많이 걸린 거리로 걸어들어가는, 혹은 그 자신이 프레디호를 타고 넓은 세상으로 떠나며 무너져가는 조국을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는 결말이었다면 그럭저럭 만족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민망한 방식으로 패배의 기억을 호출하는 이 결말에서, <그림자살인>을 통한 과거에로의 여행 끝에 불편한 피로가 몰려왔다.
과거는 재난과 함께 지금 대중영화에 남은 유일한 스펙터클의 장소다. 과거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의 물질적 형상 때문이 아니라 질서의 외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레벌루셔너리 로드>에서 젊은 부부에게 파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러나 끝내 가지 못한 외부, <도쿄 소나타>에서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한 외부, 혹은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이 도달하려는(그러나 매번 실패해 질서 안으로 소환되는) 외부, 혹은 이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소외 3부작에서 그리고 <패신저>에서 그것은 곧 죽음이라고 선언된 외부.
세계화가 외쳐지기 오래전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우리에게 외부를 빼앗아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과거는 삭제될 수 없는 낭만적 열정의 가장 온전한 도피처가 되었다. 그곳에서는 떠날 수 있었고 미지의 장소들을 경유하는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돌아올 수 있었다. 그곳은 늘 그곳 아닌 어딘가가 상상되었기에 아름다웠다. 장 르누아르는 “우리가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은 변해버린 세계의 지옥 속으로 단호하게 뛰어드는 일”이라고 충고했지만, 그럼에도 스크린을 통한 과거에로의 여행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림자살인>에서 끝내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 여행에 달라붙은 패배의 어쩔 수 없는 기억이 아니라 그 여행의 주목이기도 한 외부에로의 출구조차 그 기억의 딱딱한 주형이 막아버렸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