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공공의 적>의 설경구
2001-11-28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오계옥

모두들 놀란 모양이었다. 무슨 몸무게가 고탄력 고무줄도 아니고 어디 가서 지방흡입을 받은 것도 아닐진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설경구는 1달 전 보았던 설경구가 아니었다. 올해 여름 무섭게 몸집을 불렸던 설경구가 <공공의 적> 촬영을 마치고 다시 날렵하게 변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이어트 비디오 찍자”는 말이 안 나오는 게 용할 정도다.

“경찰제복 맞춘다고 사이즈를 묻길래 아무리 살이 쪄도 허리 사이즈 32인치면 될 거라고, 그것만 준비하라고 그랬죠. 근데 현장 와서 입어보니 참 기가 차서…. 결국 재봉선 터서 앞부분만 가리고 찍었다니까. (웃음)” 세상의 때와 오물에 절은 남자, 짊어진 삶의 무게를 느끼지 못할 만큼 무감각해진 인간. 강우석의 신작 <공공의 적>에서 ‘단순무식과격’한 악질경찰 강철중을 담기 위해 설경구는 비대해져야 했다. 대결구도에 있는 이성재가 냉철한 펀드매니저의 외양을 한 잔혹한 살인마 조규환에 가까워지기 위해 헬스로 몸을 단련시켜야 했듯이. 보기 좋을 만큼 건장했던 몸은 무리한 식사와 나태함을 비결(?)로 그렇게 90kg에 가까운 ‘두부살’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살찌는 거 보고 있으면 참, 혐오스러워. 징그럽다고. 하루는 남방 단추 사이로 살이 비집고 나오는데, 허! 이것 참…. 살이 찌니까 정신자세가 게을러지고 무뎌지더라고요. 세상 모든 게 귀찮아져. 그런데 강철중이 딱 그런 놈이거든.”

“욕 잘하고 잘 때리고 헛소리 잘하지만 지 나름대로는 심각하고 진지한 놈”이 그저 머리속에 들어 있는 ‘강철중의 모든 것’이었다. “나는 분석 같은 거 안 해요. 작품분석을 하면 그 분석에 스스로 말릴까봐 깡통으로 가버려요. ‘완전소화’라는 건 안 되는 사람이라. 난 나다, 내가 강철중을 표현하는 거다, 라고 생각했죠.” 혹자는 경찰이라는 직업도 그렇고 <박하사탕>의 김영호와 비슷한 것 아니냐, 고 묻지만 그가 생각하는 두 사람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속은 완전히 틀린 놈들”이다. “영호는 차곡차곡 쌓아가는 놈이고. 철중은 내뱉는 놈이죠. 판단도 안 하고 최책감도 없고. 영호는 내내 나를 힘들게 했지만 철중은 한번 내 속으로 받아들이면 다루기 쉬운 놈이었어요.” 하루는 강우석이 촬영장으로 어슬렁 걸어오는 설경구를 향해 “야! 오늘 뭐 찍는지는 알고 왔니?” 하고 물었을 정도로 그는 그 흔한 설정도 하지 않은 채 자신 안에 인물을 던져버리고 나면 끝이었다.

“그래서 나한테는 감독이 정말 중요해요.” 올해 초 의 2부작짜리 드라마 <성덕태자> 찍고 한국에 들어온 설경구는 인터넷으로 강우석이 <공공의 적>이란 영화로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는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냥 그 영화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도 제가 먼저 만나자고 했어요.” 사실 강우석과는 <송어>의 회식자리에서 한번 보고, 칸영화제에도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워낙 낯가림이 심해서”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 처지였다. “강 감독은 명쾌한 사람이에요. 현장에서 편집에서 쓸 부분까지 계산하면서 연출한다고요. 자신있게 연출하니 믿음도 가고 배우가 아무래도 편하죠. 물론 자기 머리 속은 고민투성일 텐데도 현장에서는 여유있게 농담을 한다고요. 현장 콘트롤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죠.”

“<오아시스>요?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놈이 하는 ‘찐한’ 멜로영화예요”. 폭력과 강간미수 전력에 음주운전으로 사람 죽이고 교도소에서 출소한 전과자와 피해자 집에서 만난 중증 뇌성마비 여인과의 사랑을 담게 될 이창동의 신작 <오아시스>는 설경구가 <공공의 적> 크랭크업 1달 만에 15kg가량의 무리한 감량을 이룬 원인이다. “‘종두’란 놈인데요. 이 집안 이름도 골때려. 종일, 종두, 종세 중에 둘째 종두예요. 문소리 이름은 ‘공주’야. (웃음) <박하사탕>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시나리오 읽고 후련하진 않더라고요. 또 가슴에 뭐 하나 남는 것이 있더라고.” 이창동 감독은 그저 지나가는 말로 “살 좀 빼지” 한마디한 것뿐이라지만 설경구는 “옆에 오면 피하고 싶을 정도로 인상 더러운 놈”이 되기 위해 꽤나 독한 다이어트에 들어갔다. 매일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정두홍의 액션스쿨이 있는 보라매공원에서 트레이닝을 꾸준히 했고 운동 끝난 뒤 먹는 이른 저녁 외엔 그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하지만 아직도 10kg 정도는 더 뺄 거라고 하니 “너, 그러다 죽는다” 하는 주위의 걱정도 괜한 게 아니다.

한번 보면 무섭고, 두번 보면 재미있고, 세번 보는 정드는 사람. 설경구는 그런 사람이다. 초면엔 말도 잘 안 하고, 그나마 툭 하니 뱉는 말이 앞뒤 안 재는 과격한 말일 때 그는 무섭고, <공공의 적> 촬영 때 코뼈 부려진 것 가지고 호들갑스럽게 앰뷸런스까지 불렀던 이야기를 하다가 앰뷸런스 기사가 길을 몰라서 부러진 코뼈 잡고 “좌회전 하시고요” 하며 길안내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엉뚱하지만 폭소를 터트리게 만드는 유머가 있는 그는 재미있다. 그리고 김광석 노래 한 자락에 여러 여자 가슴 뛰게 만들 만한 부드러운 매력을 지닌 그는 정겹다. 이달 말이면 머리도 빡빡 깎을 예정이라지만, 앙상하게 말라 근접하기 어려울 만큼 “재수없는 놈”이 될 거라지만, 철길 위에서, 나 돌아갈래, 포효하는 김영호,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 아팠던 그의 얼굴은 잊어버리자. 누가 뭐라 한다 해도 그는 이제 가슴 뛰는 ‘찐한’ 멜로를 보여줄 ‘사랑영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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