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소식]
다큐 찍는 사람들은 얄미워^^
2009-05-06
송은지의 <소규모아카시아 밴드 이야기>출연기
<소규모아카시아 밴드 이야기>

낯선 이가 일상 속에 들어와 우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다. 찍으라고 내버려 두고 그냥 무시하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정말 안 찍혀 본 사람은 모르는 일이다.

감독 사라진 뒤 친구한텐 욕 먹고…

녹음을 하는 어느 날이었다. 기분 좋게 녹음을 마치는 장면까지 찍은 민환기 감독은 슬쩍 “술이나 한잔 할까요” 하셨고 우리는 그러자고 했다. 술자리가 시작되자 감독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술자리에 동참했다. 촬영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마음 편하게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보니 우리들은 속에 있는 이러저런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꺼내기 시작했고 감독은 조용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금 후에 촬영감독이 초췌한 얼굴로 나타났다. 부산에서 막 올라오자마자 연락을 받고 달려오는 길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촬영이 시작됐지만 이미 발동이 걸린 우리들은 이러저런 낯 뜨거운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냈고, 그날 찍힌 장면은 우리를 살리면서도 죽이는, 희한하게도 결정적인 장면으로 쓰이고 말았다. 어느 날은 연극 연습을 찍는 날이었다. 유학중인 친구가 한국에 들어와 만나러 가는 자리에 별 말씀도 없이 따라오시는 거다. 영문도 모르는 친구한테도 미안했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감독한테도 미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시침 떼고 친구에게 내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감독이 사라진 뒤 친구에게 엄청 욕먹었다. 그 장면도 쓰였다. 친구가 알면 한 소리 할 게 분명하다. 그날도 다큐 찍는 사람들은 얄미워! 라고 했었지만...

완성된 <소규모아카시아 밴드 이야기>를 본 날 우리는 당연히 충격에 휩싸였다. 일년여를 찍어온 여정 중에 가장 힘들고 기막히고 실망스러웠던 날이 바로 이 날이었다. 저 이상한 말투와 괴상한 표정들이 정말 내 것이란 말인가. 영화 내용과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머릿속에는 내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는지 뿐이었다.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진짜 모르는 일이다! 나름 고생한 보람을 기대하며 촬영에 동참했건만 그 결과물은 쓰디쓴 가르침 하나를 남길 뿐이었다. 그것은 주변의 사람을 늘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 사람들은 나조차 알지 못하는 나의 표정이나 지독한 습관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 어떤 의미로는 나보다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말이다.

카메라 불편했지만 묘하게 기분 좋기도

다큐 촬영을 시작했을 무렵 나는 카메라가 나를 향하는 걸 눈치 채면 고개를 돌려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도 일 년 넘게 찍다보니 카메라 앞에서 많이 자연스러워졌다는 칭찬(?)을 최근에야 받았다. 처음에 나는 카메라가 너무 불편하고 싫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한편 묘하게 기분이 좋기도 했다.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이해하려 하고 거기에서 사람들에게 들려줄만한 어떤 좋은 이야기라도 찾아내 준다면 그것은 참 기쁜 일이 아니겠나 하는 막연한 기대감. 고개를 돌렸던 건 그런 생각에 너무 좋아서가 아니었을까.

영화가 이제 관객을 만나게 됐다. 밴드를 하다 보면 누군가와 함께 할 때도 있고 멀어질 때도 있다. 그리고 다시 만나기도 하고. 이번에는 어떤 영화쟁이가 우리와 함께 할 차례인거라고 처음에 생각했었던 게 기억난다. 여울목을 지나 다시 물길은 어디론가 흘러간다. 영화야, 멀리 멀리 갈 길 가거라. 우리는 또 우리 갈 길 갈 테니.

덧말) 정말 <소규모아카시아밴드>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면 술을 한잔 함께 하거나 공연을 보러 오라고 권하고 싶다. 하지만 이 영화 <소규모아카시아 밴드 이야기>를 보는 것도 한 방법일거다. 최소한 우리들이 진심으로 함께 불렀던 당시의 노래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나는 이 곤란한 다큐가 그래도 조금은 사랑스럽다.

글 송은지/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보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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