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더스FNH의 차승재 대표가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공동대표였던 김미희 대표도 사퇴했다. 싸이더스FNH가 자체적으로 1년 라인업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제작사였다는 점, 그리고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이기도 한 차승재 대표가 한국영화계의 상징적인 제작자라는 점에서 이번 동반사퇴는 안팎으로 무성한 소문을 낳고 있다. 싸이더스는 어떤 식으로 개편될 것인지, 야인으로 돌아온 차승재 대표의 이후 행보는 어떤 것일지. 그리고 싸이더스FNH의 모회사인 KT는 앞으로 어떻게 영화사업을 펼칠 것인지가 관심의 대상이다.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차승재 대표는 지난 4월30일 모회사 KT로부터 사표를 내라는 통보를 받았다. 당일 사의를 밝힌 그는 이틀 뒤 애초 잡혀 있던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5월1일에는 김미희 대표도 통보를 받았다. 그는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대신 싸이더스FNH의 영화사업본부 본부장직을 제의받았다. 김미희 대표가 이 제의를 받아들일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후임 대표가 누가 될지도 지금까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오는 5월14일에 열리는 KT본사의 이사회가 관심을 모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계에서는 이 자리에서 두 공동대표가 공식적으로 퇴진하고, 신임대표가 임명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제작 중심에서 투자·배급 위주로 변화
사퇴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나돌고 있다. 우선 남중수 KT 전임사장이 비리 혐의로 물러나고 이석채 사장이 취임한 뒤에 불어닥친 대대적인 조직개편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한 내부 관계자는 두 대표의 퇴진에 관해 “겉에서 보기에는 이제야 결론이 난 것이지만, 이미 올해 초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 배경에는 싸이더스FNH가 내놓은 부진한 실적이 놓여 있다. 차승재 대표의 싸이더스픽처스가 2005년 김미희 대표가 이끌던 좋은영화와 합병하며 출범한 싸이더스FNH는 이후 KT에 51%의 지분을 내주고 280억원을 출자받아 초대형 제작사로 변신했다. 하지만 이후 내놓은 <용의주도 미스신> <라듸오 데이즈> <트럭> <1724 기방난동사건> 등의 작품들이 흥행에서 참패했다. 두 공동대표 외에 KT의 콘텐츠 사업을 담당하던 이치형 상무까지 퇴진시킨 것도 같은 배경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석채 사장이 전임 남중수 사장에 비해 콘텐츠 비즈니스에 다소 소극적이라는 점 또한 이번 인사조치의 배경으로 지적된다.
이번 인사는 싸이더스FNH의 영화사업의 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한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향후 싸이더스FNH의 영화사업은 지금의 제작 중심에서 투자·배급 위주로 변화하게 된다. 투자와 배급은 한국의 대표적 제작자들로 꼽히는 차승재, 김미희 대표가 전문적으로 벌이던 비즈니스가 아니다. 현재 싸이더스FNH에서 투자배급본부장을 맡고 있는 최평호 전무가 신임 대표로 지목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 전무는 CJ엔터테인먼트에서 상무로서 한국영화 투자·배급을 총괄했던 경력과 폭넓은 대인관계 등이 장점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한편, 충무로에서는 김미희 대표가 본부장직을 수락할 것으로 전망한다. 그가 제작한 야심작 <불꽃처럼 나비처럼>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는 현실 논리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음모론적 시각도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차승재, 김미희 대표의 권력싸움에서 김 대표가 판정승을 거둔 것으로 이번 인사를 해석한다. 실제로 두 대표는 싸이더스FNH 출범 얼마 뒤부터 갈등을 빚어왔다. 결국 각자의 프로젝트를 각자 알아서 개발하고 제작하는 ‘한 지붕 두 영화사’라는 기형적인 구조로 운영된 것 또한 이같은 충돌에서 비롯됐다. 특히 이번에 퇴진한 차승재 대표는 주요 사안을 놓고 KT와 대립해오기도 했다.
<독비도> 리메이크 향방에 관심
사정이야 어쨌건 두 대표의 공동퇴진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이제 궁금해지는 것은 영화사업에 대한 KT의 입장이다. 우선, 두 대표 사퇴 전이나 이후나 달라지지 않는 KT의 입장은 ‘영화사업은 IPTV 등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싸이더스FNH의 향후 사업 노선을 투자·배급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은 콘텐츠 비즈니스에서도 KT가 한발 물러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큰 리스크를 짊어지고 영화산업의 중심에 직접 뛰어들기보다 외곽에서 IPTV 등 뉴미디어 판권의 확보를 위해 부분투자를 펼치겠다는 뜻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KT가 500억원 이상의 영화 펀드 투자자금을 바탕으로 싸이더스FNH를 메이저 투자·배급사로 전환할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지극히 희박한 가능성의 시나리오일 뿐이다.
싸이더스FNH가 당분간 일정 정도의 혼란을 겪을 것은 정해진 일이다. 특히 그동안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 그중에서도 차승재 대표가 주도해온 제작 1본부의 프로젝트의 향방은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1본부는 개봉 대기 중인 <킬 미>를 비롯해 장준환 감독의 <타짜2>, <달콤, 살벌한 연인>을 연출한 손재곤 감독의 신작 등을 준비 중이다. 이중 가장 큰 기대를 모아온 작품은 차승재-김성수 콤비의 재결합 프로젝트인 <독비도> 리메이크다. <독비도>는 왕우의 비장미 넘치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장철 감독의 1967년작으로, 그동안 차승재 대표는 홍콩 등을 오가며 한국-홍콩-중국 합작영화로서의 틀을 다져왔다. 이 과정에서 홍콩으로부터 투자를 확보한 것으로도 알려진다. 만일 차승재 대표의 사표가 수리돼 그가 싸이더스FNH를 떠나게 된다면 과연 이 프로젝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 내부 관계자는 “원칙상 <독비도> 프로젝트는 회사 차원의 프로젝트이기 대문에 차 대표가 외부로 가져나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의견을 밝혔지만, 항상 예외는 존재하는 법. 그가 일정 조건을 감수하고 이 프로젝트를 싸이더스FNH로부터 가져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물론 차 대표가 계속 영화업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KT와의 계약조항상 그가 싸이더스FNH에서 나간 뒤 몇년 동안 영화업계에서 일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산업의 한 시대가 저문다
아무튼 차승재 대표의 퇴진은 한국영화산업의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2000년 종합엔터테인먼트 기업 싸이더스를 창립한 이래 그는 금융자본, 벤처자본 등과 결합하면서 영화사의 기업화를 주도해왔다. 대형 제작사라는 모델도 그가 원조다. 우회상장의 길 또한 그가 앞장섰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시작한 자본과 시장과의 게임에서 패배를 선언한 셈이다. 그리고 그의 백기가 휘날리는 그 자리에는 대기업 자본만이 터를 굳건히 하고 있다. 한국영화는 어디로 가는가. 언제나 그랬듯, 차승재 대표의 향후 행보는, 그것이 희망적인 것이든 비관적인 것이든, 한국영화산업의 진로를 일러주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