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여섯 번째 프로젝트이자 네 번째 옴니버스 극영화인 <시선 1318>의 주제는 청소년 인권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방은진, 전계수, 이현승, 윤성호, 김태용 감독은 한국 청소년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섬세하고 사려 깊게 다룬다. 이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김태용 감독이 만든 <달리는 차은>이다. 육상선수인 차은과 필리핀 출신 이주여성인 엄마의 소통 과정을 차분하게 그리는 이 영화는 청소년 인권이라는 사안을 뛰어넘어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라는 근원적 문제를 제기하는 감동적 영화다. 이 영화는 김태용 감독이 그동안 보여줬던 세계를 집약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민규동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단편 <열일곱>과 장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서 보여준 청소년들의 세계와 <가족의 탄생>이 제기한 현대적 가족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 이 30분 남짓한 단편영화 안에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또 하나 놀란 것은 <씨네21>이 김태용 감독을 단독 인터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와 <가족의 탄생> 때는 민규동 감독과의 대담으로, EBS <시네마 천국>과 관련해서는 변영주, 이해영 감독과의 수다로 그는 지면에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이번 만남은 김태용 감독과 <씨네21>의 설레는 첫 데이트였던 셈이다.
-청소년 인권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제의를 받고 어떤 생각을 했나. 사실 청소년 인권이라는 주제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나.
=기본적으로 인권이라는 주제가 어렵다. 교훈적이 되면 만든 사람도 재미없고 보는 사람도 재미없는데 어떻게 하면 재밌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청소년 인권이라는 주제를 맞닥뜨리니 예전 아카데미 다닐 때 민규동, 박은경, 조근식 감독과 함께 만든 <열일곱>이라는 단편도 생각나더라. 그냥 편하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소년 인권이나 그들의 이슈와 상관없이 내가 당시 관심을 두고 있던 부분이 다문화가정이었다. 2010년에는 다섯쌍 중 한쌍이 국제결혼이라잖나. 지금은 애들이 어려서 모르는데 10년만 딱 지나면 우리나라 청소년 중 20%는 다문화가정에서 나오게 된다. 아이들끼리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부모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사회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다. 다문화사회란 자칫하면 힘들어지고 잘하면 좋은 선물인데,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잘살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이 영화를 하면서 나는 ‘다문화가정 내의 이주여성들이 고통받고 있지 않다’, ‘그 아이들도 잘 자라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함에도 나는 그들은 예쁜 사람들이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문화가정에 관한 취재는 했나.
=다문화사회와 다문화가정에 관심이 많아서 조금씩 봐왔던 게 있었고 이 작품을 하면서 이주여성들과 아이들을 만났다.
-각본은 연출부가 썼더라.
=스크립터 두명이 썼다. 한명은 시나리오를 다 쓰고 촬영 들어가기 전에 개인 사정 때문에 그만뒀다. 그 뒤에 온 친구와 현장에서 대사를 쓰면서 영화를 찍었다. 그런데 내가 현장에서 대사를 써주면 너무 40대 감성이라고 하더라. (웃음) 이런 대사 있잖나. 차은이가 남자아이에게 “너 나 좋아하지? 좋아하면 그런 거 아냐”라는. 그걸 써서 줬더니 연출부들이 ‘아니, 애들이 무슨 그런 얘기를 하냐. 40대 아저씨들이나 그러지’, 이러더라. 그래서 그 아이에게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되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하더라. 그래서 꿋꿋이 찍고 영화에도 집어넣었다.
-청소년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열일곱>과는 스펙트럼이 많이 다른 것 같다.
=이번 영화는 다문화가정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일반적인 청소년들의 고민은 사실 잘 몰랐다. 많이 알기 위해서 더 다가가지도 않았고. 내 질문이 좀 바뀌었다고 할까. 예전에는 아이들이 있고 사회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지금은 애들도 사회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결국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아이들끼리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심이 생겼을 수도 있을 거다.
-이 영화에는 비전문배우들이 많이 등장한다.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조금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발언이지만, 사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전문배우라고 해봐야 얼마나 전문성이 있겠나. 연기를 한두번 해봤건 안 해봤건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주인공이 육상선수니까 뛰는 폼이 시원하고 멋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찍어보면 뛰는 폼은 육상선수와 아닌 사람의 차이가 크더라.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경우 청소년 이야기이면서도 전문배우를 기용하지 않았나. 거기에도 이영진이 뛰는 장면이 나오는데.
=고등학생이면 스무살 정도 되는 친구를 기용할 수 있고,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다. 뛰는 것도 연습하면 좋아질 수 있고. 그런데 나이대를 중학생으로 잡다보니 전문배우를 쓰기 애매해졌다. 그리고 영진이가 거기서 너무 못 뛰었다. (웃음)
-다른 5편도 주인공을 중학생으로 택했더라. 왜 주인공을 중학생으로 설정했나.
=예전에 우리가 고등학생에게서 바라보던 게 중학생으로 내려간 것 같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반항하고 저항하고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아이들이 아니다. 그러기보다는 그냥 돈 벌어야죠, 이거다. 또는 대학 가거나 아니면 취직해야죠, 뭐 이런 식이다. 인생이 선명해졌달까.
-차은이 역할을 맡은 전수영양은 대단한 발견이다.
=일단 운이 좋았다. 이 작품이 혹시라도 조금 재밌었다면 그건 다 배우들 덕이다. 사실 생각보다 중학교에 육상부가 많지 않다. 게다가 대회에 출전하는 중학교 선수는 더 적다. 그들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도 예선대회다. 전수영양은 전라북도 예선대회에서 만났다. 내 앞으로 한 친구가 지나가는데 너무 괜찮더라.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사진 찍어온 것을 보는데 그 친구가 자꾸 뇌리에 남더라. 그래서 수영이가 있는 정읍으로 가서 캐스팅했다.
-그래도 연기에 대한 확신은 없었을 텐데.
=만나보면 대충 알잖나. 대본 읽혀본다고 아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잘할 것 같더라. 정말로 편안하고 힘있게 연기를 하더라. 체육하는 아이들이 연기도 잘할 수밖에 없는 게 대담하고, 겁이 없고, 쪽팔리기 싫어하고, 건방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디션 없이 캐스팅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당시 머리를 굉장히 길게 기르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은 다 머리가 짧은데 말이다. 고집이 얼마나 센지 교장선생님이 말해도 머리를 안 자른단다. 나는 쇼트커트를 하면 좋을 것 같더라. 그래서 예쁜 쇼트커트 머리 사진을 많이 모았다. 마침 그때가 <커피프린스 1호점>으로 윤은혜가 떴을 때라서 윤은혜 사진을 보여줬다. 그런 식으로 머리를 자르게 했다.
-엄마 또한 비전문배우 아니었나.
=그분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실제 이주여성 중에서 드러나 활동을 하려는 분이 많지 않다. 다들 집에서 숨기거나 반대하거나 한국말을 잘 못하거나. 전국을 헤매며 많은 분들을 만나고 다녔는데 참 힘들었다. 캐스팅된 아르세니아씨는 군산에서 배타고 들어가는 신시도라는 섬에 사는데 보기 드물게 잘사는 이주여성이다. 남편은 우락부락한 아저씨인데 굉장히 가정적이고 애들도 잘 키우는 화목한 집이었다. 출연 제의를 했을 때 남편은 재밌어했지만 본인이 잘 못할까봐 고사했는데, 얘기를 하다가 좀 친해져서 하게 됐다.
-또 다른 비전문배우도 있었나.
=차은이 남자친구 빼놓고 모두가 비전문배우였다. 아버지도 차은이 동생 동민이의 진짜 아버지다. 그분이 재밌는 게, 애초에는 꼬마만 캐스팅하려다 괜찮아서 출연 제의를 했더니 “저는 연기 못해요” 이러시다가 “그러면 언제 하나요?” 묻기도 하고, “아유 그걸 어떻게…” 하다가도 “그럼 옷은 제 것을 입어야 하나요?” 하셨다. (웃음)
-그 와중에 환경에 대한 메시지도 담으려 하더라.
=방파제 있는 곳이 새만금 근처였는데, 이 바다를 막는 일은 바벨탑처럼 나중에 벌받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게 뭐가 좋은데?” 같은 대사도 집어넣었다. 우리도 없어질 바다니까 영화로 담아놓자고 많이 찍었지만 영화에는 많이 못 집어넣었다.
-컵라면과 소주를 마시면서 엄마와 딸이 대화하는 장면이 참 좋았다.
=결국 얘기는 엄마와 딸이 소통을 어떻게 하는가에 관한 것이니까. 서로 마음을 완전히 열기는 어렵지만, 단지 엄마구나, 딸이구나, 이주여성이구나, 필리핀 사람이구나, 이런 게 아니라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이라든가 전반적인 정조가 굉장히 서정적이더라. 닭살 돋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간 감상적이다. 얘기 자체도 감상적이다. 나도 그게 고민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파 감상을 좋아한다. (웃음) 나의 신파 감상이 얼마나 촌스러운가를 스스로 알고 있다. 그래서 항상 싸움을 하는 거다. 사람들은 신파나 닭살스러운 것을 안 좋아하잖나. 그러니까 참는 거다. 분명히 극장에서 나만 울 거야. 참아야 돼, 이러면서. (웃음)
-인권영화는 물론이고 각종 영화제 트레일러나 <청춘의 십자로> 같은 공연까지 만들고 있다. 본업인 장편영화는 언제 만들 것인가.
=정말 하루도 안 쉬고 일한다. (웃음) 내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끝나고 오래 쉬었잖나. 그때 뭔가 다른 일을 하면서 쉰 게 아니라 계속 작품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가 엎어지고 나면 1∼2년이 지나고 하잖나. 그러다보니까 장편 준비에 몰입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자꾸 움직여야 에너지가 더 좋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뭔가를 안 하고 있으면 완전히 다운되는 스타일인 것 같다. 점점 자신도 없어지고, 의기소침해지고, 영화 이거 하면 뭐해, 재능도 없는 것 같아, 이런 식으로 자학하게 된다. (웃음) 차라리 작은 것이라도 뭔가를 만들면 또 만들고 싶어진다. 그래서 연극도 하고 다큐도 찍고 트레일러도 찍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시간은 장편 준비를 하면서 보내고 있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그녀가 사라졌다>는 완전히 포기한 것인가.
=잘 안됐다. 시나리오도 좀 어설프고 재미없는 것 같고, 투자상황도 어려운 것 같아서. 그래서 좀 작은 영화로 해야겠다 하면서 다른 시나리오 하나를 써서 영진위 지원을 신청했는데 그것도 안됐다. 지금 또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어떤 영화의 리메이크인데 아직 결정된 게 아니라서 밝히기는 곤란하다. 내가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이야기이고, 멜로영화를 해보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어렵다, 시나리오가.
-한때 이런저런 영화에 많이 출연했는데 요즘은 어디에 안 나오나.
=출연 제의가 전혀 없다. 양익준 감독처럼 되는 게 내 꿈인데 그건 좀…. 내가 내 영화에는 안 나오잖나. 내 영화를 망치면 안되니까 말이다. (웃음)
-요즘 잘 만나는 영화인들은 누군가.
=사석에서 만나는 분은 가끔 술을 마시는 변영주, 이해준 감독님 정도다. 아, 가장 자주 만나는 건 조근식 감독이다. 같은 동네에서 일주일에 두번씩 만나 탁구를 치고 있다. 나는 배운 지 얼마 안됐고, 조근식 감독은 거의 선수 수준이다. 조 감독은 원래 탁구를 잘 치는데 탁구 영화를 준비하면서 많이 배웠나 보더라. 요새는 시나리오는 안 쓰고 마포구청장배 탁구대회 이런 데 나가서 4등까지 하고 그런다. (웃음)
-20대, 30대 여성에게 독보적인 인기를 누리는 것 같다.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어제 술자리에서 윤성호 감독도 그러더라. 자기 주변 여자들이 다 나를 좋아한다고. 다른 데서도 이런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사실 나를 좋아하는 여성을 직접 목도한 적은 없다. (웃음) 그래서 윤성호 감독에게도 그 주변 여자들 좀 데리고 와보라고 했다. 친한 남성들까지 시기와 질투를 하는데, 나는 욕만 먹고 실속이 없다. 이 억울함은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한단 말인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