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 회고록]
[박중훈 스토리 11] 미치도록 쉬려다가, 미치도록 웃기다
2009-06-19
글 : 박중훈 (영화배우)
정리 : 주성철
폭소의 끝을 보여준 첫번째 한국영화 <투캅스>와 강우석 감독 이야기

<머나먼 쏭바강>을 끝내고 완전히 녹초가 된 박중훈은 장차 처갓집이 될 도쿄의 와이프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정말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다 강우석 형에게서 한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투캅스>라는 형사 버디무비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투캅스>는 그전부터 알고 있었다. <머나먼 쏭바강> 촬영 중 잠시 한국으로 나와서 대종상 시상식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때 안성기 선배가 <투캅스>라는 코미디영화를 한다고 하기에 지나가는 말로 “그거 저랑 하면 어울리겠네요”라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 그러자 성기 형이 “그래? 너 언제 오는데?” 그랬다. 그래서 촬영 때문에 한참 뒤에 올 거라고 하니까 “그럼 안될 거야. 그때쯤이면 이미 촬영도 다 끝났을 거야”, 그렇게 얘기하면서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진 작품이었다. 그러면서 <투캅스>에는 최민수가 캐스팅됐고 박중훈은 다시 <머나먼 쏭바강>에 매진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보니 <투캅스>도 아직 크랭크인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강우석 감독과는 그전에 미국 유학을 끝내고 돌아올 때쯤 <익스큐즈 미 뉴욕>이라는 영화가 결렬되면서 조금 소원해지기도 하고 결례라는 생각도 들어 그냥 그렇게 지나가버렸다. 무엇보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박중훈은 미치도록 쉬고 싶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투캅스>는 당시로서 ‘천만관객 영화’라 불러도 틀리지 않을 만큼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강우석 감독은 고집스러웠다. <투캅스>는 촬영 전부터 최민수 형과 오래도록 진행해온 작품이었지만 작품 해석의 차이가 있었다. 강우석 감독은 풍자코미디를 원했는데 민수 형은 진한 남성적 누아르를 원했던 거다. 그렇게 더이상 진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강우석 감독은 나에게 SOS를 쳤고, 나는 나대로 민수 형이 하던 거 대타로 들어갈 일 있냐며 서울에 있는 매니저한테 전화해서 안 하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마음 편히 쉬고 싶어서 시나리오도 주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우석이 형이 제발 시나리오나 한번 읽어보라고, 그러고 나서 거절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했다. 하건 안 하건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했다. 그리고 매니저가 먼저 시나리오를 들고 일본에 왔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시나리오를 읽어가다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다. 너무 재미있어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이거 무조건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으로 온다는 우석이 형을 기다렸다. 사실은 굳이 오지 않아도 됐다. 이미 나는 설득당한 상태였으니까. (웃음)

못한다고 버티다 시나리오에 홀딱 반해

시나리오를 억지로 읽기 시작했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약속한 게이오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강우석 감독을 기다리다가 저 멀리 들어오는 걸 보고는 환한 얼굴로 “형~” 하고 외치며 달려가 껴안았다.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고 갖은 아양을 떤 뒤 이 영화는 무조건 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원래 우석이 형은 다음날 돌아가고 나는 그보다 며칠 뒤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는데, 불안한 나머지 다른 일정들을 다 취소하고 다음날 바로 형과 같은 비행기를 탔다. 옆에 딱 붙어 앉아서 왔다. 또 무슨 변수가 생겨서 내가 아닌 다른 배우로 캐스팅이 바뀔까봐, 이번에는 형의 마음이 변할까봐 그런 거다. (웃음)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성기 형과 또 내 상대역으로 캐스팅된 모델 출신 배우 지수원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마음 안 바뀌게 도착 즉시 계약한 것도 물론이다. 우석 형이 ‘자 그럼, 이렇게 가는 거야’, 그렇게 다같이 건배를 하고 일사천리로 촬영이 진행됐다.

정말 ‘될 영화’는 처음부터 달랐다. 성기 형과 나, 혹은 강우석 감독이 큭큭 웃는 건 예사고 카메라를 든 정광석 촬영감독이 웃어서 어깨가 들썩거려 화면이 흔들려 난 NG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OK 됐다 싶으면 또 스탭 중에 웃는 사람이 있어서 NG가 나기도 했다. 일부러 촬영장 분위기를 다운시키고 살벌하게 만들어야만 촬영이 가능할 정도로 다들 너무 웃었다. 성기 형과는 <칠수와 만수> 끝나고 거의 5년 만에 영화로 만난 거였는데 아침에 장작불 켜놓고 촬영 기다리면서 나누던 잡담들도 참 행복했다. 정말 팀워크 하나는 끝내줬다.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던 건 <투캅스> 촬영 중 <머나먼 쏭바강>이 전파를 탔는데, 드라마가 잘되면 영화가 큰 이득도 보고 다들 나에게 고마워할 거라는 우쭐한 생각도 있었다. 시청률이 30% 정도 나왔으니 홈런은 아니고 안타 정도는 된 거긴 하지만 특별히 스탭들에게 우쭐할 일은 없었다. (웃음) 요즘엔 30%도 엄청난 수치지만 케이블이 없던 당시는 인기 TV드라마들이 보통 50% 이상 나오던 때였다.

금기를 깨준 경찰 풍자 카타르시스

애초에 <투캅스>를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경찰영화가 될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당시 경찰영화라고 하면 반공 혹은 새마을영화 성격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한국영화가 전체적으로 침체기라 상업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깡패나 호스티스, 아니면 사극이었다. 그만큼 감히 경찰을 풍자하거나 욕한다는 것은 금기시된 영역이었다. 말하자면 <투캅스>는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완화된 검열의 덕을 톡톡히 본 첫 번째 작품이다. 경찰의 비리를 시원하게 비틀어 풍자하면서 관객은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이다. 한국영화도 이런 식으로 웃길 수 있다, 한국영화도 정말 재미있다는 인식이 그렇게 퍼져가기 시작했다.

당시 없던 장르의 영화였고, 감히 선배들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당시 이처럼 앞뒤가 착착 맞으면서 슬랩스틱이 아닌 영화 구조적으로 상황과 현실을 멋지게 풍자한 한국 코미디영화가 있었나 싶다. 보통 웃음에는 실소, 폭소, 미소 세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웃긴 웃는데 웃는 내 자신이 미운(웃음) 그런 게 실소라면, 폭소는 정말 상황에 공감해서 한바탕 웃어젖히는 것이고, 박장대소하지는 않아도 슬며시 여운이 남는 웃음이 미소라 할 것이다. 미소가 더 수준 높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정성있는 폭소를 터트리는 것도 그에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 들어 <투캅스>가 바로 그런 진짜 폭소의 끝을 보여준 첫 번째 한국영화였던 것 같다. 그 재미라는 측면에서 당시 색다른 감각의 한국영화로 <결혼 이야기>(1992)도 꼽을 수 있겠는데, <결혼 이야기>가 로맨틱코미디 장르에 충실한 폭소의 영화였다면 <투캅스>는 금기를 통쾌하게 깨버린 사회풍자코미디였다.

시사회장 웃음바다… 단관개봉에 87만5천명

당시 강우석 감독은 합동영화사에서 <달콤한 신부들>(1988)로 입봉하고, 황기성사단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로 엄청난 흥행도 맛본 감독이었다. 과거 <애마부인> 시리즈에서 연출부로 일하던 시절도 있었고 안성기 선배가 나온 <성 리수일뎐>(1987) 등의 각본을 쓰면서 착실히 충무로 생활을 하다가 <미스터 맘마>(1992) 같은 코미디영화로도 성공한 경험이 있는 30대 초중반의 패기만만한 감독이었다. <투캅스>는 바로 강우석 감독이 시네마서비스의 전신이라 할 ‘강우석 프로덕션’을 차려 독립하고자 했던 첫 번째 작품이었다. 물론 원래 <투캅스>는 이화예술필름에서 진행하던 작품이었는데 사정상 여의치 않게 되면서 강우석 감독이 직접 프로덕션을 차린 경우였다. 작품에 대한 형의 애착은 대단해서 영화 콘티도 사전에 다 그려놓고 거의 머리 속에 완전한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창립작은 순탄하지 못했다.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에도 전화가 오면 받으러 나가서 돈을 메우고, 또 뭐가 ‘펑크’나면 여기저기 구하러 다니는 등 우여곡절 끝에 완성했다. 그렇게 강우석 감독의 마음고생이 대단했고 그만큼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작품이다. 또 한국영화로서는 1993년 일부 시설이 완공된 양수리종합촬영소 1호 촬영 작품이라는 의미도 있다.

<투캅스>가 흥행하리라는 것은 당시 남산시사실에서 열린 기자시사회 때 이미 알아봤다. 보통 기자시사는 코미디영화라도 썰렁한 편인데 영화 크레딧 올라가고 5분 정도 지나면서 앞사람 머리도 치고 심지어 복도쪽으로 나동그라지면서 웃는 기자도 봤다. 우리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드디어 1993년 12월 피카디리극장에서 개봉한 <투캅스>는 막강한 뒷심을 발휘하면서 단관개봉으로 87만5천명이 들었다. 요즘 젊은 관객을 위해 단관개봉을 설명하자면, 그건 말 그대로 1천석 정도 되는 서울시내 딱 한 영화관에서만 영화를 상영하던 것을 말한다. <투캅스>는 막 멀티플렉스가 시작되던 초창기였고 부분적으로 그랑프리극장에서도 상영했지만 거의 100% 피카디리에서 나온 숫자라고 보면 된다.

그때 어떤 판권이 있었냐면 ‘서울 판권’은 극장개봉관, 재개봉관, 재개봉관에서 다시 삼류개봉관으로 가는 3개 판권으로 나뉘고 그걸 일본말로 ‘서울 우라’라고 한다. 그리고 전국 판권은 경기도와 강원도를 묶어서 ‘경강 판권’이라 하고, 경상도의 ‘영남 판권’과 호남과 제주를 묶은 판권이 있고 부산은 덩어리가 커서 ‘부산 판권’이 따로 있었다. 그렇게 영화를 찍어서 판권 배급자한테 반매로 파는 거다. 말하자면 전국적으로 관객 수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당시 관계자들은 보통 서울 개봉관 관객 수 곱하기 10 정도를 해서 전국 스코어를 대략 계산했다. 그러니까 <투캅스>는 870만명 정도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정확하게 집계되지 않은 여러 요소들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당시로서 1천만 관객이 든 영화라 할 수도 있다. 흔히 2000년대 들어 1천만 관객시대 얘기를 하면서 우리 영화가 갑자기 100만에서 1천만으로 뛴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다. 단관개봉으로 얘기하던 수치가 전국적으로 합산됐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건데, 아전인수가 아니라 얘기하고 싶은 요지는 갑자기 2000년대 들어 한국영화가 급성장하고 퀄리티가 좋아져서 그렇게 비약적으로 10배 이상 관객이 늘어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게 90년대의 한국영화계를 제대로 바라봐줬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머나먼 쏭바강>때 겪은 고통을 씻다

당시 극장흥행 계산법을 보면, 단관에 1천석 규모에다 하루 5회 상영이라고 가정할 때 하루 매진은 5천명이다. 열흘이면 5만명이고. 또 첫회 스코어가 얼마냐, 2회와 3회는 대략 어느 시각에 매진됐느냐 그런 걸로 나름 치밀하게 분석했었다. <투캅스>는 대략 최종적으로 20만에서 25만 관객 정도를 예상했다. 참고로 20만 정도면 대형 히트인데 당시 서울 단일 개봉관에서 10만∼15만명 영화가 <뽕> <변강쇠> <돌아이> 같은 영화였고 20만명 넘은 영화가 <나의 사랑 나의 신부>였으며 30만명 정도까지 간 영화가 <공포의 외인구단> <겨울나그네> 등이었다. <고래사냥>이 40만명, <깊고 푸른 밤>이 50만명이었으니 안성기 선배는 이미 대형 히트를 여러 번 경험한 당대 최고의 흥행배우였다. <투캅스>는 당시 첫날 3500명의 관객이 들었으니 감히 87만명은 상상도 못했는데 영화가 가진 코미디의 힘, 입소문의 힘으로 끝까지 가더니 80만명을 넘겼다.

요즘처럼 멀티플렉스가 있던 시절이 아니니 그때 가장 많이 받은 전화가 <투캅스> 티켓 좀 구해달라는 거였다. 그렇게 <투캅스>는 당시 내 최고 흥행영화가 됐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하면서 청춘스타라 불렸고, <칠수와 만수> <우묵배미의 사랑>을 하면서 마니아적인 사랑도 받았던 나는 <투캅스>를 통해 이전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정말 국민적, 대중적 인기의 스타가 됐다. 미국 유학 뒤의 혹독한 시련, <머나먼 쏭바강>으로 겪은 심각한 육체적 고통 등을 말끔히 씻는 계기가 됐다. 말하자면 <투캅스>는 내가 제대로 된 성인식을 치른 영화였다. (웃음) 전에 <칠수와 만수>를 얘기하면서 ‘A매치 데뷔골 같은 영화’라고 얘기한 적 있는데, <투캅스>는 나에게 축구 국가대표로서 월드컵에 나가 우수한 성적 말고(웃음) 유수의 성적을 거둔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안성기 선배와 나란히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그리고 6월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내와 결혼에 골인했다. 정말 내 인생 최고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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