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그 미 투 헬>의 오프닝 크레딧에 등장하는 유니버설 로고는 다소 낯설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유니버설의 옛 로고이다. 샘 레이미가 유니버설의 옛 로고를 스크린에 복귀시킨 것은 자신을 매혹시켰던 그 시절의 악마주의 호러영화, 혹은 현재의 자신을 가능하게 했던 <이블 데드> 시리즈에 대한 향수와 애정의 징표였을 것이다. 실제로 샘 레이미는 주술사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유니버설의 옛 로고 이후 덧붙이고 있는데, 그 시대적 배경이 바로 1969년이다. 짧게 등장하는 1969년의 이야기는 한 소년이 악마 라미아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가는’ 내용이고, 이후 라미아는 시간의 비약과 함께 누군가의 저주로 인해 현재의 시간으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샘 레이미는 시들해진 악마주의 호러영화(또는 <이블 데드> 시리즈의 기본적 설정)를 현재의 시간에 복고적으로 되살려내려 한다.
조악한 요즘 공포영화들과 차원이 달라
은행에서 대출 상담 업무를 담당하는 크리스틴(앨리슨 로먼)은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속물적인 평균적인 인물이다. 심리학 교수를 애인으로 둔 그녀가 자신을 초라하게 느낄 때쯤 마침 팀장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는 강력한 후보 중 한명이지만 경쟁자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런데 ‘하필’ 그때, 대출 빚을 갚지 못해 집을 잃을 위기에 처한 한 집시 노파(로나 레이버)가 찾아온다. 평소의 크리스틴이었다면 ‘아마도’ 대출 연장 신청을 들어줬겠지만, 승진 기회를 놓치기 싫은 그녀는 노파의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크리스틴에게 무릎까지 꿇고 통사정하던 노파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그녀에게 악담을 해댄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주차장에서 숨어 있던 노파는 크리스틴을 덮치고 두 사람의 한판 승부가 펼쳐진다. 크리스틴 외투의 단추를 움켜쥔 노파는 그녀에게 저주를 내리고, 이로 인해 40년간 숨죽이던 라미아가 현재의 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사투의 시작.
잠시 숨죽이던 악마가 되살아난다는 설정은 <이블 데드> 시리즈의 샘 레이미에게 그리 낯선 설정은 아니다. 또한 비명을 지르던 입에서 금세 박장대소가 터져나오는 방식의 호러영화 역시 20대 시절의 샘 레이미가 이미 보여준 것이었다(웃음과 공포가 가장 적절히 조화된 영화는 <이블 데드2>일 것이다). 오해는 말라. 그렇다고 내가 <드래그 미 투 헬>이 <이블 데드>의 복제품에 불과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오히려 지금의 샘 레이미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간결한 방식으로 내러티브와 시각적 이미지를 세공한다. 가령 주차장에서 크리스틴과 노파가 한판 승부를 벌이기 이전 그다지 대수로울 것도 없는 손수건 한장이 펄럭이며 날아가는 장면만으로도 관객은 비명을 지른다. 인물들의 동작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세련된 방식으로 슬랩스틱코미디를 차용하는 것처럼 보이고, 사운드 역시 긴장과 이완이 교차하도록 정교하게 관객의 심리를 통제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드래그 미 투 헬>은 희생자 수와 그들이 흘린 피의 양이 관객의 공포감을 이끌어낼 수 잇다는 ‘전시 만능주의’의 착각에 빠진 최근의 조악한 호러영화와 질적으로 다른 세공력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먹이사슬에 걸려 있는 사회의 비주류
샘 레이미가 <이블 데드>에 비해 달라진 것은 성숙해진 연출력만은 아니다. 그는 <이블 데드> 시리즈의 애쉬(브루스 캠벨)에 비해 크리스틴을 훨씬 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또한 <이블 데드> 시리즈에서는 우연한 발견이 악마가 되살아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드래그 미 투 헬>에서는 크리스틴의 과오로 인해 비롯된 것처럼 그리고 있다). 현실의 평균적인 인간의 선택과 행동의 범위를 넘지 않는 크리스틴은 영화 속 인물보다는 현실의 우리와 더 닮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사실적인 공포를 그리는 작품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드래그 미 투 헬>은 크리스틴의 현실적인 선택이 비현실적 처벌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에 가깝다. 크리스틴은 평균으로 환산해 (그것이 그녀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내리지만, 이는 모두 악수가 되고 과잉된 처벌로 응답받는다. 영화에서 가장 의아한 설정 중 하나는 바로 이 부분이다. 과연 크리스틴이 그런 저주를 받을 만큼 잘못을 했는가, 하는 것.
크리스틴이 영화에서 내린 주요한 선택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노파의 대출 연장을 거절한 것, 두 번째는 저주가 내린 단추를 죽은 노파에게 전달함으로써 악마의 저주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선택은 다소 과오가 있었고 두 번째 선택은 적절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를 노파에게 돌려주는 데 실패하고 지옥으로 끌려간다. 즉, 그녀는 자신이 현실적으로 내릴 수밖에 없었던 선택(과오)을 바로잡는 데 실패한다. 그녀는 가해자로서 저주를 받지만 그 처벌의 과잉을 고려한다면 희생자에 가깝다.
그녀는 단지 노파의 저주에 의해서만 희생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비주류와 비주류의 대결을 부추기는 사회적 시스템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물론 크리스틴은 육중한 체중을 감량한 뒤 은행에 취직하는 데 성공했지만, 또 다른 비주류인 아시아인과 경쟁을 벌여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보다 못한 도시 하층민을 짓밟아야 승진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시골 출신에 일반 카드를 쓰는 그녀의 신분이 플레티넘 카드를 쓰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조차 어렵게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류사회는 비주류의 편입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비주류는 성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밀려나지 않기 위해 자신과 동일한 처지의 비주류를 짓밟아야 한다. 즉, 먹이 피라미드의 하단부에 있는 족속들끼리 저주를 퍼붓고 모함하고 다투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한다(이는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쌍용차 사태를 노노갈등으로 규정하며 그 대립을 부추기는 몇몇 보수신문의 논조를 상기하라). 물론 공포스러운 장면 연출에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내러티브를 단선적으로 밀어붙이는 샘 레이미가 이러한 주제의식을 표면적으로 드러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영화의 인물 관계가 비주류간의 먹이사슬로 형성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녀는 왜 지옥을 원하는가
<드래그 미 투 헬>을 보면서 가장 의아했던 점은 왜 영화의 제목이 <Drag ‘me’ to hell>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속 그 누구도 지옥으로 끌려가기를 원하지 않으니 말이다. 오히려 크리스틴이 예정된 지옥행을 막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모습은 (때로는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처연하기조차 할 정도다. 그럼에도 샘 레이미는 천연덕스럽게 이 작품의 제목을 <드래그 미 투 헬>이라고 갖다붙였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던진 질문은 영화에서 자신을 지옥으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옥 속으로 끌려가는 순간, ‘날 지옥으로 끌고 가라’(drag me to hell)는 자막이 갑작스럽게 화면 위로 떠오르며 영화를 끝맺을 때, 나는 그것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소리없는 아우성처럼 느껴졌다. 결국 질문의 방향이 틀렸던 것이다. 질문은 누가 지옥을 원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지옥인가, 라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발딛고 살던 세상이 지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샘 레이미 특유의 악동 기질이 남겨놓은 마지막 유머가 아니었을까. 크리스틴의 진짜 과오가 있다면, 자신이 지옥의 메커니즘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각성하지 못했다는 것, 그 무지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라미아의 손에 이끌려 지하 세계로 끌려가는 순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고, 그것이 그녀를 ‘지하의 지옥’ 대신 ‘지상의 지옥’으로 날 끌고 가달라고 외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긴, 각성 상태로 불구덩이에 들어가 영겁의 삶을 살아야 하는 그곳보다는 ‘지상의 지옥’이 낫긴 하겠지만, 그래도 지옥은 지옥인 법. 더도 덜도 말고 2009년의 한국사회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