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최첨단 로봇군단의 현란한 싸움 속, 작고 마른 소년 샤이어 라버프가 보인다. 별스러운 특기는 없다. 그저 열심히 달리고, 구르고, 점프하는 동안 그는 전세계 대중을 사로잡은 튼실한 영웅이 되었다. 영웅의 임무를 부여받는 순간 거대한 존재가 되는 기존 액션 영웅의 전형을 버리고 일관되게 평범함을 유지하는 영웅. 영웅이란 정의가 무색한 새로운 아이콘을 정립한 그를 두고, 사람들은 ‘스필버그의 페르소나’, ‘제2의 톰 행크스’라는 온갖 수식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25살이 되기도 전, 블록버스터의 히로인이 된 그를 한정지을 수식어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마이클 베이는 그날을 지금도 끔찍하게 회상한다. 2008년 7월27일, <트랜스포머>의 속편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촬영 중 습관처럼 <CNN> 뉴스를 보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영화의 히로인 샤이어 라버프가 음주운전으로 구속된데다 왼손에 심각한 중상까지 입은 것이다. “절대, 사실일 리 없어!”가 첫 반응이었지만, 벌어진 상황 앞에서 제작비 2억달러(2553억원) 초대작의 수장인 베이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마이클 베이에게 청천병력 같던 그 순간
라버프는 “회복하는 데 못해도 6개월은 필요하다”는 의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2주 만에 팔목에 버팀목을 댄 채 촬영장에 복귀했지만, 베이는 범블비와 디셉티콘 군단 등 산더미 같은 로봇 CG에 더해 뜻하지 않게 윗위키의 왼손까지 CG로 처리하는 고충을 겪어야 했다. CG 처리한 화면을 체크하느라 목결림이 생기고, 촘촘히 짠 촬영 스케줄을 재조정하느라 번거롭기 짝이 없었지만 베이와 제작진은 불평없이 그를 맞았다. 물론, 라버프 없인 찍을 수 없는 무수한 장면들이 첫 번째 원인이었다. 그러나 음주운전과 동승했던 여배우 이자벨 루카스와의 염문으로 그를 저버리기엔 배우로서 라버프의 역량은 ‘너무 뛰어났다’. 재능있고 신뢰할 만한 배우에게만 할리우드가 베푼다는 믿어지지 않는 아량. 할리우드에서 지금 가장 주목받는 배우 라버프에게 주어진 용서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흥행 기록 경신을 예견한 블록버스터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의 제작현장. “멍도 들고 많이 다치겠지만 다른 동료 배우들보다는 고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감독 마이클 베이가 영화의 히로인 라버프에게 건넨 위로의 전부였다. 감독이 원하는 건 “불구덩이 속에서도 배우들이 별 질문없이 따라와주는 것”이었다. “우린 <시민 케인>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니지 않나”라는 라버프의 말처럼 현장은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숙고의 장이 아닌, 가장 공격적이고 테스토스테론 넘치는 거대 세트였다.
22살 어린 나이에 불과했지만 라버프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디즈니 TV드라마 <이븐 스티븐스>에서 아역배우로 출발한 그는 이미 경력 9년차 배우였다. <디스터비아>의 상대역 데이비드 모스에게 전수받은 아니카 젤과 엡솜 소금을 이용해 촬영 다음날이면 감쪽같이 멍을 없애고 올 줄 알았다. 직업인으로서의 기술적인 면모가 전부가 아니었다. 광고판 같은 로봇을 상대로 또래 10대 배우들보다 더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한 연기를 구가할 줄 알았으며, 어렵기로 악평이 자자한 베이 감독이 그를 ‘Jerk!’(바보야)라는 친근한 욕설로 부르게 만드는 친화력까지 놓치지 않고 겸비했다. 이미 <아이, 로봇>과 <콘스탄틴>의 출연으로 블록버스터의 선배 윌 스미스와 키아누 리브스가 현장에서 연기하는 방식, 스탭과 화합하는 과정을 보고 배워온 덕이었다. “영화에서 내가 깨어 있어야 하는 걸 알았다. 나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깨우고 일으키지 않는 한, 곧 내가 죽는다.” 라버프는 일찌감치 배우로서의 길을 깨우친 이른바, 다 큰 소년이었다.
스필버그의 페르소나? 제2의 톰 행크스?
‘만약 그를 모른다면 곧 알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던 라버프를 향한 할리우드의 예상은 적중했다. ‘할리우드의 잭폿’ 라버프가 가진 명성의 서막은 이미 2년 전, 그가 스티븐 스필버그와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을 찍는다고 하는 순간 열렸다. 스트립몰에서 치킨과 스무디를 사들고 나오던 소년에게 자신이 제작한 영화 <디스터비아>에서의 활약을 눈여겨본 스필버그는 친히 전화를 걸어 ‘인디 패밀리’로의 소환을 명했다. 제작을 맡은 <트랜스포머> 이후 또 한번의 중복 선택이었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출연은 단순히 시리즈 중 한편의 영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64살의 인디아나 존스, 해리슨 포드가 제아무리 발빠른 스턴트가 붙어도 소화하지 못할 장면이 생기는 순간, 그는 포드를 대신할 후계자로 찬란한 유언장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필버그의 페르소나’로서 그의 위치는 공고했다. <인디아나 존스>의 촬영 도중 이미 하루에 약 9km를 내달리는, 수영선수의 운동량으로 <트랜스포머> 속편의 액션 연습을 병행하던 그는 <이글 아이>로 또 한번 제작자와 배우로 만남을 과시하더니 급기야 스필버그와 ‘유사 부자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영화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제작자이자 감독인 스필버그가 라버프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아이러니하지만 라버프는 지금까지 액션 히어로의 필수요건이었던 남성성을 단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 ‘함량미달’의 배우였다. <007> 시리즈의 제법 파격적인 선택이었던 대니얼 크레이그가 상대적으로 단신이란 이유로 책잡혔다면 라버프는 어울리지 않는 점이 한둘이 아닌, ‘소년’에 불과했다. 176cm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키와 고리를 끼어 액션 스타로 발돋움했던 톰 크루즈의 초창기 커리어와 빗대기에 그의 외모는 너무 평범했고,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80년대 스크린을 장악했던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실베스터 스탤론의 커리어를 잇기엔 호리호리한 그의 몸매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토비 맥과이어나 올랜도 블룸이 보여준 섬세한 영웅상의 범주에 선뜻 넣기에는 유대계 곱슬머리의 치기어린 소년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다른 범주의 배우였다. 액션과 코믹, 드라마 어느 것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는 능숙한 연기는 오히려 전천후 배우 톰 행크스에 가까웠고, 잘만 성장해준다면 ‘제2의 톰 행크스’가 될 싹수 있는 배우로 인식됐다.
늘 빠른 성장을 강요받은 운명
장난스러운 로봇과 영웅 아이콘과의 관계맺음을 성사시킨 스필버그는 라버프를 두고 “그는 세상 모든 엄마 아빠들에게 가장 만만한 아들이자, 또래들에게 가장 좋은 친구, 그리고 소녀들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꿈과 같은 소년이다”라고 말한다. 바로, 스크린 속 이상형의 영웅이 아닌 ‘실제 인간’의 필요성으로 탄생한 배우가 라버프였다. 이렇듯 잇단 블록버스터에서 그는 ‘완성형’의 히어로가 아닌 ‘히어로’가 되고 싶어 하는 소년의 이미지로 각인됐다. 앳된 말투와 고불고불한 곱슬머리가 소품이 됐다.
단역이었지만 <미녀 삼총사: 맥시멈 스피드>에서 그는 그를 ‘어린애’라고 하는 카메론 디아즈를 향해 “15살 반인데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답하고, <콘스탄틴>에서 인류를 구하러 가는 키아누 리브스에겐 자신의 지식을 늘어놓으며 함께 갈 것을 요청한다.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 “내가 누군지 알아, 체즈 크레이머야, 개자식아”라고 짐짓 으스대는 치기어린 아이와 <인디아나 존스>에서 말론 브랜도를 그대로 흉내낸 가죽 재킷과 그리즈한 머리를 연방 빗어넘기며 ‘늘 터프함을 증명하려는’ ‘머트’의 행동은 라버프의 이미지가 되어 하나로 연결된다.
그러나 아이의 모습 뒤로 스크린에서 그가 맡은 캐릭터는 늘 그에게 빠른 성장을 강요했다. 그는 <트랜스포머>의 스턴트카보다 더 빨리 자신을 확장시키고 키워나가야 했다. <트랜스포머>의 자신감없는 소년에겐 ‘넌 이제 전사야’라는 절체절명의 운명이 떠안겨졌으며 <콘스탄틴>의 키아누 리브스는 ‘책과 현실의 구분’을 못하는 이상적인 10대에게 그가 더이상 자신의 종이 아닌 <배트맨>의 로빈이나 <론 레이저>의 톤토 같은 동료가 되기에 충분함을 일깨워주었다. <아이, 로봇>의 윌 스미스는 여자 꾀려고 차를 빌리려는 힙합 보이에게 여자 엉덩이나 쳐다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다그침을 선사했다. 가택연금으로 본의 아니게 살인사건의 추적자로 나선 <디스터비아>의 ‘평범한’ 활약을 놓치지 않았던 D. J. 카루소 감독은 쌍둥이 형제의 갑작스러운 죽음, 영문도 모른 채 테러리스트로 둔갑한 뒤 달리는 차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이글 아이>의 ‘제리 쇼’로 다시 한번 그를 캐스팅했다. ‘어린 존 쿠색에게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재치와 총명함을 가진 배우.’ D. J. 카루소가 발견한 라버프의 성장의 싹이었다.
10살 때 50살의 입담을 터득한 아이
규모로 보자면 그의 출연작 중 가장 커졌지만,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에서도 라버프의 자장은 그대로다. 실제 22살의 라버프보다 4살 어린 역할, 여자친구와의 원거리 연애와 기숙사 생활이 더 고픈 대학 신입생 윗위키에겐 여전히 거대 로봇과 인류 구원이라는 엄청난 과제가 목을 조르고 있다. 10대의 고민이 더 고픈 평범한 소년의 욕망, 그리고 그에 반하는 급작스레 맡겨진 임무에서의 충돌이 선사하는 캐릭터의 묘미는 라버프가 탄생시킨, 이 시대 블록버스터 히어로의 새로운 전형이 되었다.
‘평범함이 주는 진짜 카리스마’로 스크린 속 라버프가 빛날 수 있는 이유와 달리, 라버프의 성장기는 가혹함의 연속이었다. 마약 중독자인 아버지, 히피 발레리나 엄마는 그에게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5대째 예술가의 기질을 가졌지만 단 한번도 무언가 이루지 못했던 가족사’는 늘 그에게 짐으로 따라왔다. 마땅한 거주지도 없는 LA의 에코 파크에서의 생활. 라틴 하층민들이 거주하던 동네에서 유일한 백인 가족이었다. 광대 분장을 하고 핫도그와 아이스크림을 팔던 아버지는 라버프에게도 자신과 같은 삶을 강요했다. “핫도그 파는 것도, 광대 분장도 싫었지만” 라버프의 장기를 신기해하는 손님들이 생겼고, 아버지는 옆에서 그걸 지켜보며 돈을 벌었다. 10대 초반 이미 담배를 피우고, 투팍을 듣고, 카드게임을 즐겨하며, 아버지를 따라 알코올중독자모임을 드나들던 소년에게 어른의 삶은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이후 그가 맡았던 ‘미국 디즈니 채널의 롤모델 소년’과는 가장 먼 소년이 라버프의 10대였다.
라버프는 10살이 되면서 칼리프의 파사데나 코미디 클럽에서 스탠드업 개그를 하던 자신을 두고 ‘몸은 10살이지만 입담은 50살인 아이’로 정의했다. 무대에서 “들어봐, 이 개자식들아” 하면서 주목을 끌다가 그것도 안 먹히면 개그 대신 불운한 가정사를 이야기해주고 동정을 구하는 나날이었다. 그런 라버프에게 탈출구를 마련해준 것은 어쩌면 시기과 질투였는지 모른다. “친구 중 한명이 정말 멋진 서퍼보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가 찬 좋은 시계, 값비싼 옷, 심지어 그 아이의 엄마가 탄 뻔쩍뻔쩍한 차, 모든 것이 내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12살 나이, 맹랑한 소년은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던 아버지를 대신해 스스로 자신의 매니저임을 자처하며 전화번호책을 뒤져 연기자 에이전트에 전화를 걸었다. 5분간 펼쳐진 그의 연기에 에이전트는 호기심 반으로 그를 영입했다. 그리고 만만한 동생 같은 친근한 이미지, 스탠딩 개그로 쌓은 코믹한 입담은 라버프의 TV 진출을 가능케 해주었고, <디즈니 채널>의 <이븐 스티븐스>로 어린 팬을 확보한다. 불운했던 그의 10대에 일대 전환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트랜스퍼’는 이제 시작이다
‘20대의 다른 배우에게서 결코 볼 수 없었던 격분.’ <디스터비아>에서 라버프의 연기를 두고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라버프와 함께 공연한 존 터투로는 이를 일컬어 숀 펜 스타일의 격분이라고 지칭했다. “세상이 많이 힘들어졌다고 말하지만, 샤이어는 다른 사람들보다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청소년 연기를 하고 있다. 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그는 어떤 다른 것도 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라버프를 향한 무한한 가능성의 시작을 예고했다. 그건 라버프가 뼈아픈 경험을 통해 직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체득한 배우이기 때문이다. 마약 딜러에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와 히피의 삶을 살던 어머니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그는 스카치도 담배도 끊고 금욕적인 삶을 택했다. 다저스 게임에 열광하거나 또래 친구와 비디오 게임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2년간 사귄 여자친구에게도 연기에 매진하기 위해 아픈 이별을 고했다. “어쩌면 난 외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남과 다르게 살기로 결심한 이상 그건 치러야 할 대가다.”
처음 그에게 연기의 대가가 수표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일깨워준 것은 그를 디즈니 틴무비의 배우에서 벗어나게 해준 영화 <홀스>에서 함께 연기했던 존 보이트였다. 그가 추천하고 빌려준 책이라면 빠지지 않고 읽었고, 그가 권한 고전영화들을 허기진 아이처럼 재빨리 섭취했다. 보이트는 배우로서 그에게 하나의 역할모델이자 멘토였다. 보이트로 인해 그는 연기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영속의 무엇임을, 정치보다, 가족보다, 자신의 행복보다 더 우선시되는 최상의 가치임을 깨달았다. “많은 돈을 벌었고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평판이 쌓이기 시작했다”며 자신의 현재를 평가하지만, “이 업계에는 뚜렷한 모델이 없다. ‘오늘 할 일을 했다’고 말하더라도 난 내일이 뭔지 알 수가 없다. 그게 날 미치게 한다”고 지금의 장밋빛 현재를 고민한다. 다행히 라버프가 아는 인생은 더 긍정적이다. “어릴 때 난 사는 게 싫었다. 그런데 삶은 참 웃긴 방식으로 흘러간다. 난 엄청난 직업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그는 사람들이 10대 배우들에게 으레 하는 ‘힐러리 더프’쯤으로 각인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이상적인 커리어로 ‘게리 올드먼이 힐러리 더프를 만났을 때’로 방향 설정했다. 사람들이 실제로 보는 영화에서 퀄리티를 발휘할 수 있는 배우가 지금 그의 목표다. 곧 올리버 스톤이 연출하고 마이클 더글러스와 함께 공연한 <월 스트리트>의 속편이 그의 필모그래피를 장식하는데다 <트랜스포머>의 새로운 에피소드에 제작도 슬슬 불거지고 있다. 그의 화려한 ‘트랜스퍼’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