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팍한 늙은이와 아시아계 소년, 말하는 개와 초콜릿을 좋아하는 열대 새, 게다가 풍선을 동력으로 하늘을 나는 집이라니. 요리사를 꿈꾸는 생쥐(<라따뚜이>), 연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청소로봇(<월·E>) 등 상업영화엔 독약일 법한 소재들만 골라 상상조차 못했던 꿈의 세계를 선사하던 픽사의 청개구리 심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업>의 주인공은 제2의 청춘이라는 60살마저 훌쩍 넘긴 78살 노인 칼 프레드릭슨(에드워드 애스너). 입술을 일자로 다문 이 무뚝뚝한 노인네의 남아메리카 탐험 여행을 놓고 우려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도리어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누구인가. 디즈니보다 창조적이고, 드림웍스보다 유려한 영화들을 보란 듯이 내놓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 아닌가. 천개의 풍선들이 저택을 끌어당기며 힘차게 솟구치면 우리의 마음 역시 픽사의 마법에 빠진 채 도리없이 하늘로 솟구친다. 애니메이션사상 최초로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선택받은 비범한 영화, 픽사의 열 번째 애니메이션 <업>을 소개한다.
알록달록한 풍선 더미를 손에 든 심술궂은 늙은 남자. 감독 피트 닥터가 사로잡힌 이미지는 그것이었다. 두서없는 아이디어 조각으로 퍼즐 놀이를 하듯 닥터와 극본·연출을 함께 맡은 밥 피터슨은 생각나는 대로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풍선들이 남자의 집을 하늘로 끌어올리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를 이끄는 건 누구일까. 닥터와 피터슨이 공유하던 “하고 싶고, 가지고 놀고 싶은 것들의 리스트”는 그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피트 닥터는 말한다.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게 정말로 어려웠다. 우리가 다루고 싶은 요소들, 거인 새 같은 것들은 애초 통합적이지 않았다. 이야기는 전형적이지만 무척 어려웠다.” <오즈의 마법사>의 하늘을 나는 저택에, <위대한 피츠카랄도>의 장엄한 자연, <크리스마스 캐롤>의 고집스러운 노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디즈니 초기 애니메이션의 고색창연한 기운. 거기다 낭만적인 어드벤처물의 기운까지 듬뿍 담은 이 영화는 1930년대 극장, 그것도 흑백 뉴스릴을 거대한 고글을 쓴 소년이 열광적으로 관람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채플린 영화를 빼닮은 오프닝 장면
수줍은 여덟살 소년 칼은 위대한 모험가 찰스 먼츠(크리스토퍼 플러머)를 우상으로 섬긴다. 극장을 빠져나온 뒤에도 모험담에 젖어 경쾌하게 달음박질하던 그는 말괄량이 엘리(엘리자베스 ‘엘리’ 닥터, 감독 피트 닥터의 딸)와 우연히 마주친다. 칼의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이와의 첫만남이 펼쳐지고, 이어지는 건 “신랄함과 우아함에 있어 채플린의 그것만큼 가치있다”(<워싱턴 포스트>)고 평가받은 4분가량의 몽타주. 어느덧 성인으로 자라난 칼과 엘리가 결혼식을 올리고, 간절히 바라던 임신에 실패하고, 슬픔을 사랑으로 위로하고, 저택 꾸미기에 열중하고, 피크닉을 즐기고, 그러면서 조금씩 나이를 먹고, 쇠약한 엘리가 먼저 눈을 감기까지의 과정을, 대사 한줄없이 마이클 지아치노의 서정적인 왈츠 선율에만 기대 사려깊게 그려낸다. 길다면 긴 인간의 생애를, 이렇게 시적으로 압축한 장면이 또 있을까.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빼닮은 이 애잔한 장면을 두고, 어떤 리뷰어는 “<시민 케인>의 아침 식사 테이블을 떠올리게 한다”(<뉴욕타임스>)는 각별한 찬사를 던지기도 했다.
일흔여덟 노인은 홀로 남았다. 강산이 여덟번 바뀔 동안 주변의 목조 건물들은 불도저에 밀리고, 그의 아담한 집은 콘크리트 공사장에 둘러싸였다. 슬픔에 젖어 있던 칼은 요양소로 끌려가기 직전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동물원에서 풍선을 팔던 소싯적 실력을 발휘해 자신의 집을 무수한 헬륨 풍선으로 들어올려 비행하기로. 그의 행선지는 명성을 회복하고자 찰스 문츠가 열대 새를 포획하기 위해 떠난 곳, 엘리가 생전에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남아메리카의 파라다이스 폭포다. 총천연색 풍선들이 지상에 다채로운 빛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낡은 저택이 대기 중으로 날아올라 고층건물 사이를 횡단하려는데, 문밖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진다. 착각이길 바랐건만 엘리와 조우했을 적 그와 같은 나이인 여덟살 소년 러셀(조던 나가이)이 어정쩡한 자세로 베란다에 대기 중이다. 야생 탐사 대원이라는 이 사고뭉치 수다쟁이 꼬마는 경로 봉사 배지를 타고 싶어 주변을 얼쩡거리다 모험에 합류하고 말았으니, 칼의 여행은 첫걸음부터 예상치 못한 사고투성이다.
옛 배우와 창조자들에 대한 추억
하늘을 나는 집이 “귀찮은 삶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에서 도래했듯이 피트 닥터와 밥 피터슨은 자잘한 디테일에 의미를 부여했다. 현실과 가까워지려 안간힘을 쓰는 근래 CG애니메이션들과 달리 오랜만에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은 픽사의 이 영화는 우리의 신체를 3등신으로 캐리커처화하는 재치를 발휘한다. 네모난 얼굴의 칼은 각진 성격의 소유자로, 엘리가 눈감은 뒤 자신의 삶을 네모난 저택 속에 납작하게 밀어넣는다. 그가 원형 풍선을 들고 선 모습은 우습고도 슬프다. 그에게 완벽한 파트너인 엘리는 동그란 얼굴을 지녔고, 엘리를 대신하려는 듯 칼의 일상을 침범한 러셀은 풍선처럼 볼이 통통하다. 간략하고 만화적이되 풍부하고 위트있는 묘사는 카투니스트 메리 블레어, 조지 부스의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닥터는 칼을 구체화하면서 디즈니의 전설적인 애니메이터 프랭크 토머스, 올리 존스턴과 스토리 작가 조 그랜트와의 관계를 되새김질했고, 귀여우면서도 괴팍한 그의 성격을 묘사하고자 옛 배우들인 스펜서 트레이시, 월터 매튜 등을 참고했다. 반면, 찢어진 눈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로 아시아계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러셀은 한국계로 알려진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인 피터 손을 모델로 한 것이다. “우리 조부모들에 대한 오마주”(밥 피터슨)인 <업>은 창조자들의 추억으로 촘촘히 채워진 픽사의 가장 사적인 애니메이션이다.
칼의 가장 환상적인 모험은, 엘리를 보내고서야 막이 오른다. 폭풍에 휘말려 흔들리던 그의 집은 기적처럼 파라다이스 폭포 근처의 고원에 상륙한다. 피트 닥터와 팀원들이 베네수엘라의 산속을 헤매면서 그리고 수집한 시각 자료들에 근거한 남아메리카의 풍경은 수직적인 회색 빌딩숲과 대조적으로 여유롭고 화려하다. 픽사 영화로는 최초로 3D로 기획된 이 애니메이션은 태생적 매력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대신 드넓은 열대 정글에 숨이 트일 만큼의 깊이를 더하는 미덕을 발휘한다. 13피트에 달하는 열대 새가 러셀 앞에 나타나고, 소년은 그에게 케빈이라고 이름 붙인다. 마침내 농담 같지만 정말로, 말하는 개들이 떼로 등장한다. ‘개소리 통역용 목걸이’ 덕에 인간의 말을 구사할 줄 아는 골든리트리버 더그(밥 피터슨, 개들 중 리더인 도베르만 핀셔종 알파의 목소리도 맡았다)는 동동 떠 있는 저택을 끌고 파라다이스 폭포에 당도하려는 이들의 여정에 합류하고, 몇 십년 동안 골짜기를 서성이던 찰스 먼츠는 케빈을 생포하려 든다. 몸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는 두 노인의 마지막 결투는 먼츠의 비행정 위에서 아찔하게 벌어진다. 상실감에 시달리던 일흔여덟 노인이, 새로운 인디아나 존스로 등극하는 순간이다.
<업>은 다소 소극에 가깝다 해도 여전히 탈관습적이고 비상업적인 아이디어를 마다하지 않는 또 다른 픽사표 수작이다. <몬스터 주식회사>의 감독이자 <토이 스토리> <월·E>의 작가였던 피트 닥터는 이 클래식한 어드벤처물로 이들의 서커스가 예술적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니모를 찾아서> <라따뚜이> 등의 시나리오에 참여한 밥 피터슨의 데뷔도 성공적이라 할 만하다. <인크레더블> <라따뚜이>, 그 밖에도 TV시리즈 <로스트>, <스타트렉: 더 비기닝>의 음악을 맡은 마이클 지아치노의 뮤직 넘버에 대한 호평은 벌써부터 자자하다. 2005년 타계하고만 조 그랜트는 닥터에게 조언 삼아 물었다고 한다. “관객이 집에 갈 때 무엇을 가져가길 원하나.” 피터 닥터는 우리에게 해답을 건넨다. “칼은 인생에서 진정한 모험이란 우리가 가족, 친구들과 더불어 누리는 작은 일들이라는 걸 깨닫는다.” 칼과 러셀, 더그의 신나는 이후 삶을 앨범 형식으로 정리한 소스라치게 깜찍한 크레딧까지 보고 나면 그의 조언을 믿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여행이지, 목적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먹구름과 짝이 된 황새는…
<업>과 함께 상영되는 단편 <구름 조금>
장편애니메이션을 새로 공개할 때마다 그와 어울리는 단편을 함께 선보이곤 했던 픽사의 전통은 그대로다. <업> 이전에 상영되는 단편의 제목은 <구름 조금>(Partly Cloudy). 장편의 테마에 걸맞게 구름 위 세상을 배경으로 ‘아이는 황새가 데려다준다’는 서양의 우화를 발랄하게 풀어냈다. 황새들이 보따리 속에 인간 아기와 고양이, 강아지를 넣어 전달한다. 그들을 쫓아 하늘로 날아오르니 연한 핑크빛 구름들이 다양한 종의 생명체들을 바쁘게 창조하고 있다. 그 아래 유독 시커먼 구름 한점이 무리에서 떨어져 뭔가를 만지작거리는데, 그는 보기에도 사나운 새끼 악어를 만들어낸 모양이다. 불쌍하게도 취향 한번 독특한 그와 짝을 이룬 황새는 늠름하기는커녕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왜소한 놈. 사력을 다해 악어를 배달하고 돌아오니 먹구름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박치기 대장 아기 염소를 내민다. 다른 황새들은 털북숭이 새끼들과 어울리는데, 그의 운명은 왜 이렇게 처량할까. 극에 달한 측은함을, 진한 감동으로 뒤바꾸는 영리한 단편애니메이션. 초콜릿을 달고 사는 소년 러셀의 실제 모델인 피터 손이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