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재난영화의 욕망, 코미디의 실현
2009-08-06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할리우드의 공식을 벗어난 <해운대>에 대한 단상

영화 <해운대>에 관한 이런저런 짧은 단상을 말해야 할 것 같다. 호러영화의 관객은 철저하게 가/피학적 쾌감으로 자신을 영화 속에 동일시한다. 호러영화를 볼 때의 쾌감은 그것이 슬래셔무비이건 오컬트무비이건 보이지 않는 힘에 제압당하고 끌려가다 결국 일부분 승리하거나 영원히 패배하는 것을 보는 쾌감이다. 그런 호러영화의 욕망에 필적할 만한 욕망이 감지되는 것이 재난영화다. 물론 호러영화의 악마적 행위에 영향을 받은 나머지 현실에서 엽기적인 행각이 일어나는 것과 상반되게(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를 본 다음 악의 추종자들이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를 살해한 범죄) 재난영화에서는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당신이 <투모로우>나 <해운대>를 본 다음 스스로를 토네이도나 쓰나미라고 착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니 그렇게 착각한다 해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호러영화와 재난영화에서의 어떤 적의 상정에 대해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적은 때론 알 수 없으며 그냥 ‘무언가’이다. 혹은 그것은 앨프리드 히치콕이 자신의 영화 <새>의 새들을 가리켜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비천하고 흉측한 살인마 또는 괴수로 오든 거대한 자연의 침략으로 오든 그러하다. 이 말을 재난영화에 한정하여 이렇게 바꿔 할 수 있을 것이다. 늘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장르적 재난이라 말하지 않는다. 영화 <타이타닉>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영원히 가라앉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배가 가라앉을 때, 그 상징적 공고함이 실재의 귀환으로 깨져버렸을 때 그것을 재난의 한 항목으로 기입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재난영화에서 맞이하는 것의 실체는 상징의 체계를 위협하는 실재의 드러남으로 종종 이해된다. 그 실재의 침공은 ‘그럴 줄 알았다’라는 반응에서는 늘 미비하며, 그보다는 ‘그럴 줄 몰랐다’ 즉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 마침내 발생하는 과정에서만 효과가 입증되는 것이다. 그것이 재난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욕망 중 하나라고 말해도 될 것이고, <해운대>의 욕망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해운대>에서 박사 김휘(박중훈)가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경고하지만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예측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김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운대에 설마 그런 일이… 한반도에 설마 그런 일이… 라고 다들 말한다.

<투모로우>와 <해운대>의 차이

한국영화에서 재난영화 대신 호러영화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왔던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호러영화가 공포를 조장하는 적의 재현적 규모에 연연하지 않고도 성립 가능했다면 재난영화는 재난의 재현적 규모를 제하고 성립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미뤄져 왔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래왔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욕망이 전유되어 변형된 뒤 여기에 새로운 것에 대한 믿음이 CG에 대한 믿음으로 점철되면서 탄생한 것이 <해운대>다. 그러자 CG는 영화라는 세계 안에 갑자기 들이닥쳐온 실재처럼 행세한다. 영화 <해운대>가 CG의 규모를 말하고 그것의 재현적 완성도를 홍보할 때 그것은 재난영화의 욕망을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재난영화의 욕망이 필요로 하는 첫 번째 재현요소를 부분적으로 홍보할 뿐인데도 그것이 이 영화의 전부처럼 말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롤랜드 에머리히의 <투모로우>를 보는 것과 윤제균의 <해운대>를 보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윤제균은 여러 차례 할리우드 재난영화와 <해운대>의 차이를 말해왔다. 그때 차이는 서사화에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윤제균은 <해운대>를 만들며 할리우드의 영웅주의 서사가 지겨워 다른 것을 만들고자 했다고 했는데 여기에 그가 말하는 차이화가 있을 것이다. 그 점이 전적으로 영화에 재현된 것인가 물어볼 만하다. <투모로우>에서 빙하기의 추위에 갇힌 뉴욕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박사가 길을 나섰을 때 두명의 주요 동료 중 한 사람이 죽지만 주인공은 죽지 않을 때 그건 일종의 서사적 관습에의 유지다.

<해운대>에서도 주요 인물들이 죽는다. 한 사람은 해운대 지구를 팔아치워 거대 상권을 형성하려는 만식의 작은아버지(송재호)이고 또 한 사람은 안전요원 형식(이민기)이다. 실은 주요 인물 중 김휘와 유진(엄정화)도 사망하지만 이 둘의 마지막 모습을 영화는 적극적으로 담아내지 않으므로 큰 상흔을 남기지 않는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부모를 잃은 아이도 슬퍼하는 표정이 아니다). 만식의 작은아버지와 안전요원 형식의 죽음이 두드러지는데 둘의 공통점은 모두 누군가를 살리려다 죽는다는 점이다.

재난영화의 욕망이 재난의 규모라고 할 때 그 욕망에 대한 윤리는 엄청난 재난 속에 행사되는 인간애로 대변된다. 집단의 결속력 회복과 타자의 희생을 막기 위한 헌신적 자살의 퍼포먼스. 미희와 못된 부잣집 도령까지 구한 형식은 스스로 자일을 끊어 밑으로 하강한다. 재난영화의 오래된 고전 <포세이돈 어드벤처>에서 다른 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데 일조하기 위해 목사가 자기의 목숨을 끊을 때와 그것이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를테면 재난이 찾아왔을 때 거기에 맞서는 인간의 휴머니즘적 행위를 그 어떤 재난영화라도 갖고 있다. <타이타닉>의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그것이 사랑이건 인간애건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재난영화에는 표본 집단의 산출->그 집단들간의 위기->그중 누군가의 헌신의 행위라는 공동체적 서사가 흐르게 마련이다. <해운대>는 그걸 순종적으로 따른다. <해운대>는 재난영화의 이러한 서사적 면모를 따르면서도 영웅 중심주의를 건너뛰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재난영화에서 그건 꼭 건너뛸 필요도 없는 것이다. 적절하게 배합된다면 버리지 않아도 될 클리셰다.

자꾸 코미디만 강조되고

정작 차이는 다른 데에 있다. 그 부분이 성공적인지는 의심스럽다. <해운대>는 전체의 완성도를 버리고 마치 두개의 영화를 붙여놓은 것 같은 느낌으로 양분됐다. 이 영화는 윤제균식의 코미디와 재난영화의 상투성이 전반부와 후반부로 붙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몇몇 아주 긴 장면의 용도에 관하여 우리는 설명할 길이 없다. 혹은 이때 이 영화가 할리우드의 방식과 거리를 두려는 영화적 자아를 추구했다 해도, 방식이 다를 뿐 효과는 동일하게 발생시키는 장면을 말해도 될 것이다. 예컨대 갑자기 변기를 뚫는 직원의 신이 시작되었을 때 누구라도 이 장면이 여기 왜 들어 있는지 묻게 된다. 이 사람은 딱 두컷에 등장한다. 한번은 변기를 뚫고 한번은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유진을 살린다. 또는 거듭 인사하며 관객에게 나를 기억하라는 듯 각인을 호소하고 퇴장하는 김밥 할머니의 모습을 볼 때 이 장면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김휘가 딸을 헬기에 태울 때 그걸 받아준 사람이 바로 그 할머니라는 사실을 이 영화의 숏은 기세등등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뜬금없는 이 두 인물의 등장은 영웅주의를 벗어나고자 한 영화가 선택한 방법치고는 너무 직설적이다. 결국 영웅주의가 부담스러운 건 그의 휴머니즘 때문이라고 할 때 <해운대>는 다른 인물로서 그 일차원적인 휴머니즘을 지킨다.

할리우드의 공식을 벗어났다고 선언했을 때 <해운대>가 눈에 띄게 강조하는 건 실은 여기 코미디가 작동한다는 걸 보여주는 데 있다. 앞서 개봉된 <차우>와 <해운대>는 그런 점에서 유사한 장르 탈주를 시도한다. 스스로의 장르 즉 괴수영화와 재난영화라는 틀에서 얼마간 자유롭기 위해 끌어들이는 것이 코미디다. 그 코미디라는 수단으로 무언가를 이룩한 것처럼 호소한다. 하지만 코미디가 영화의 전체 리듬을 분산시킨다면 그건 과연 지켜야 할 무엇일까. 코미디영화의 경우 전체 리듬을 깨고 각 숏에 혹은 각 신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있다. <차우>와 <해운대>가 그런 것 같다.

영화감독 페드로 코스타는 스탠리 큐브릭을 두고 “그는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숏을 만든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전체의 완성이 아니라 부분의 완성에 집착하는 영화라는 뜻이다. <해운대>의 코미디가 하는 역할이, 혹은 CG가 하는 역할이 그와 비슷해 보인다면 그건 너무 박한 시선일까. 그러니까 <해운대>는 재난영화의 욕망을 표방하지만, 실은 코미디와 CG를 강조한다. 그 둘의 결합이 그다지 조화롭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작금의 한국 대중영화는 전체의 리듬을 깨고 부분의 코미디를 옹호하는 것이, 혹은 CG라는 무언가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신봉하는 것이 마치 세계의 창조라는 문제를 대면한 연출자의 어떤 결단력이라고 믿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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