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각에도 불철주야 표준어를 연마할 김연수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새하얀 모나미 볼펜을 가로로 물고 ‘가갸거겨고교구규’를 외치고 있을까(오호, 입술 사이로 질질 흐르는 침이 보이는구나), 아니면 표준어 선생님이 회초리를 들고 있다가 김연수가 사투리로 말할 때마다 입술을 내려치는 것은 아닐까(오호, 이미 도톰하게 퉁퉁 부은 섹시한 입술이 되어 있으려나), 아무튼 어떤 방식으로든 표준어를 연마하는 것은 꽤 재미있는 구경거리일 텐데 놓치니 아쉽다. 어떤 방식이든 효과가 있다면 나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다. 나도 사투리를 쓴다. 김연수만큼은 아니지만 대화를 시작한 지 5분 정도 지나면 “고향이 경상도쪽이죠?”라는 말을 들을 정도다(참고로, 김연수는 30초 만에!). 놀라운 것은 이런 어정쩡한 발음으로 인터넷 문학 라디오인 ‘문장의 소리’에서 DJ를 맡고 있다는 것인데(‘부정확한 경상도 사투리로 방송하는 라디오를 듣고 싶다면 다음 주소로 오세요.’ http://radio.munjang.or.kr 이상 광고) 방송을 할 때마다 가장 힘든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도 아니고, 방송울렁증 때문도 아니고, 발음할 때마다 ‘어’와 ‘으’를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하나 마나한) 분석에 따르면 경상도 사람들이 ‘어’와 ‘으’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입을 크게 벌려서 발음해야 하는 단어인데도 입을 크게 벌리는 걸 귀찮아할 정도로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런 점에서 영화 <해운대>의 ‘엉겁실’ 장면에서 간호사가 ‘엄독’이라고 발음한 것은 입을 크게 벌리기도 힘들 만큼 긴박한 상황임을 보여주기 위한 감독의 의도적인 선택이 아닐까 싶다는 하나 마나한 분석을 나도 해봤다.
내가 소설 속 이름을 정하는 방식
김연수는 내가 ‘증혁’이 아니라 ‘중혁’이라는 이름을 달게 된 것은 따돌림당하는 처지를 면하게 하려는 부모님의 아들 사랑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중혁’이라는 이름이 발음하기 쉬운 건 아니다. 자꾸 중역이 되거나 중력이 되거나 즁혁이 되거나 중헉이 된다. 친구 중 몇명은 내 이름을 부르기 힘들어서 나를 멀리했을지도 모른다. 서울에 와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중혁’이라는 이름을 참 쉽고 편하게 발음한다는 것이었다. “네, 저는 김중혁이라고 합니다”라는 발음을 40년 가까이 해왔는데 아직도 나는 그 말을 하는 게 참으로 힘들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최대한 쉬운 이름을 지어주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 소설 속 주인공은 대부분 이니셜이나 별명으로 불린다. 단편소설이야 ‘K’니 ‘M’이니 하는 이니셜이나 별명으로 해결한다지만 장편을 쓸 때는 이름이 꼭 필요한데, 이름을 지을 때마다 고민이 많다. 이런 이름은 너무 흔하고, 저런 이름은 부르기 힘들고, 그런 이름은 누군가의 이름과 비슷하고, 그렇게 이름을 생각하다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한번은 이름 짓기가 몹시 귀찮아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책에서 이름을 고르기로 했다. 눈을 감고 집어든 책이 <꼬마 니콜라>였다. 하필이면 외국 책이 걸릴 게 뭔가, 싶었지만 의외로 괜찮은 이름이 탄생했다. 책의 저자인 르네 고시니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고신희’라는 한국 이름이 떠올랐다. 부르기 좋은 이름이다. 그림을 그린 장 자크 상페의 이름을 보고는 ‘장상배’가 떠올랐다. 쓰고 싶었던 소설 주인공의 캐릭터가 딱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이름이었다. 장상배와 고신희, 은근 잘 어울리지 않나.
전화 공포가 생긴 것도 내 이름 때문일지 모른다. 나는 전화가 무섭다. 어딜 보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까지도 수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한번 만에 내 이름을 전달해본 적이 없다. “고객님, 성함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김중혁입니다.”“김주혁이요? 김중역이요?” 듣다 보면 슬슬 짜증이 난다. “가운데 중이고요(실제로는 무거울 중인데), 혁대할 때 혁입니다.” 이렇게까지 얘기해야 넘어간다(아, 김연수란 얼마나 훌륭한 이름인가!). 한번은 번호를 알기 위해 114에다 전화를 걸고 “조선일보 부탁합니다”라고 했는데, 안내원은 “네, 고객님, 동아일보 말씀이십니까?”라고 응대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내 발음이 그렇게 후진 걸까. 안내원이 딴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동아일보를 읽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겠지. 아무튼 나는 지금도 전화 길게 하는 것 싫어하고 전화로 얘기하는 것보다 만나서 얘기하는 게 편하다.
제인 구달 알아요? 비달 사순이요?
신정원 감독의 괴작 <차우>는 나 같은 발음 불량자들과 청각 불량자들이 깊이 공감할 만한 영화다. <차우>는 도무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이한 영화인데, 감독의 전작 <시실리 2km>도 재미있게 봤지만 <차우>는 <시실리 2km>보다 2km 정도 더 막 나간 영화다. 영화를 볼 때는 ‘이게 뭐야?’ ‘도대체 정체가 뭐지?’ ‘이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싸늘하고 썰렁한 농담들은 뭐지’ 하는 생각이 계속 드는데, 극장을 나선 다음부터 나도 모르게 자꾸만 피식피식 웃게 된다. 그중에서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웃기는 대사가 있는데, … 크크크큭…(죄송, 자꾸만 웃음이 나서), … 크크 … 이거 스포일러일지도 모르니, 영화 보지 않은 분은, 아무쪼록, 아닌가 스포일러가 아닌가, 아무튼, 크큭….
생태연구원인 변수련(정유미)은 차우를 쫓는 무리에 어렵게 끼고, 늦은 밤 사람들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혹시 제인 구달 알아요?” 옆에 있던 신 형사(박혁권)는 변수련의 이야기가 몹시 흥미롭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이렇게 되묻는다. “비달 사순이요?” 변수련은 ‘비달 사순’이라는 태클에도 동요하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지금 나만 웃고 있는 거 안다. 그렇게까지 웃긴 얘기가 아닌데, 나만 혼자서 자꾸만 큭큭거리고 있다.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귀가 어두운 사람만이 공감할 만한 유머다. 제인 구달과 비달 사순은 ‘달’만 같은데 그 ‘달’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보’라도 같지만 제인 구달과 비달 사순을 연결하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제인 구달과 비달 사순은 얼마나 먼가. 그런데 길을 걷다가 자꾸만 ‘달’이 생각나고, “비달 사순이요?”라고 묻던 초롱초롱한 신 형사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차우>의 코미디는 남의 말 듣지 않고 각자 자신의 말만 열심히 해대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신 형사는 변수련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듣지 않는 거고, 변수련도 마찬가지고, 백 포수도 그렇고 등장인물 모두 마찬가지다. <차우>는 소통 부재의 시대인 2009년을 위한 영화였단 말인가.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먹고, 아무리 주장해도 귀 막고 있는, 2009년의 한국을 위한 영화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 비극적인 결말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