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지옥> 한편으로 지금까지 6년 동안 연기하면서 한 인터뷰보다 훨씬 많은 양의 인터뷰를 소화했다. 그러나 비슷비슷한 질문 공세의 반복 속에서도 남상미는 진심으로 <불신지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 “첫 주연작이라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고,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한 스탭들과 동료 배우들의 노고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한번이라도 더 지면과 온라인에 스스로를 드러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불신지옥> 개봉 직후까지 몰아닥친 홍보 일정을 끝내고, 1주일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한번 <씨네21> 인터뷰에 응했을 때에도 남상미의 열성은 여전했다.
-개인적으로 당신을 처음 인지한 건 2003년 SBS 오픈드라마 <봄은 건달처럼 내게로 왔다>였다. 당시 이른바 ‘얼짱’ 출신 배우들의 부족한 연기력에 실망하던 터에, ‘롯데리아 걸’로 유명했던 당신이 보여준 억척스럽고 그늘진 소녀 가장 역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후 워낙 밝고 명랑한 역할들을 도맡았기 때문에 <불신지옥> 이전에는 남상미라는 배우에게 그늘과 피로도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더라.
=지금까지 인터뷰하면서 그 드라마 얘기하는 분 처음 봤다. 너무 반갑다. (웃음) 데뷔했을 때 스무살이었는데, 주위에서 내게 요구하는 이미지가 딱 스무살의 상큼함과 발랄함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밝은 이미지의 오디션을 보면 항상 떨어졌다. 그날도 다른 오디션을 보러갔다가, <봄은 건달처럼 내게로 왔다> 감독님이 우연히 내 얼굴을 보고는 “얘 좀 우울해 보인다”면서 대본을 건네셨다. 읽고 나니 너무 하고 싶더라. 그 당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게 그런 거였다. 억척스럽고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 스무살의 남상미는 <봄은 건달처럼 내게로 왔다>의 그 아이가 맞다. 그런데 연기라는 게 참 묘하다. 성격과 가치관마저 바꾼다. 이후에 밝은 역할을 많이 하면서 밝게 사는 법을 배웠다. 어떤 면에서는 성공한 케이스랄까. (웃음)
-<불신지옥> 오프닝신에서 희진의 피로한 모습의 디테일이 잘 살아 있었다. 특히 자다 깨서 소진의 전화를 받는 쉰 목소리. (웃음)
=어떻게 보면 <봄은 건달처럼 내게로 왔다> 캐릭터가 나의 기본적인 성향일 수 있다. <불신지옥>을 찍으면서 예전의 밝고 건강한 이미지를 많이 눌렀는데, 내 성격 자체가 그래서 그런지 확 바뀌었는데도 편하더라. 발랄한 캐릭터보다 이렇게 처연하고 힘없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오히려 실생활에 가까워서 편하던데. (웃음)
-근데 많이 지치고 몸도 힘든 희진이가 계속 하이힐을 신고 다닌다. 그 설정이 상당히 언밸런스하다.
=안 그래도 원래 의상 컨셉이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많이 입었던 스타일 그대로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식객>에서처럼 털털하고 보이시할 필요가 없었다. 여성스러운 모습을 살려야지만 희진이가 안쓰럽고 위태롭다는 느낌을 더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감독님께 “재킷에 청바지, 컨버스는 정말 많이 입어봤어요. 이번엔 좀 다르게 가고 싶어요. 희진이의 성격이 여성스럽지 않더라도 비주얼까지 보이시하게 가면 안될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렸다. 감독님은 “힐을 신고 뛸 수 있겠냐”고 걱정했는데, 뭐 여자 연기자들은 365일 하이힐 신지 않나. 예전에 홍콩 여행 갔을 때는 하이힐을 신고 12시간 동안 걸어다녔다. (웃음)
-김보연, 류승룡, 문희경, 장영남, 심은경까지 내공 센 배우들과 직접적으로 계속 맞부딪히는 앙상블 연기를 해야 했다.
=희진의 포지션은 관객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 사람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그게 뭐야’하면서 상대방의 기운을 받는 그런 역이다. <불신지옥>을 처음 보고 나서 딱 든 생각이 ‘내가 참 복이 많았다’였다. 다른 배우분들에게 기운을 많이 받았다. 난 가만히 얘기를 듣기만 하고 리액션만 하면 되는 거였다. 내가 원래 1에서 시작하는 에너지를 가졌다면 그분들이 내 앞에서 하는 연기를 보기만 해도 10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만큼 레벨업되어 리액션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정말 행복했다.
-구체적인 장면을 예로 든다면.
=엄마랑 대화하다가 “엄마, 제발 그만해” 이러면서 우는 신에서 한큐에 폭발했다. 엄마가 나를 정말 짜증나고 답답하게 끌고 가니까, 한숨과 동시에 눈물이 펑펑 나더라. 솔직히 우는 연기가 쉽지만은 않다. 어떤 효과를 써서 눈이 따갑기 때문에 우는 건 티가 난다. 감정이 북받쳤을 때 울어야 눈도 붓고 얼굴도 붓고 근육이 안 움직인다. 그렇게 감정선을 한번 탁 뒤집는 연기를 하고 나면 느껴지는 희열이 있는데, 그 장면을 찍으면서 너무 오랜만에 희열을 느꼈다. 나중에 보니까 편집되어서 많이 나오진 않았다. (웃음) 난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이나 우는 장면에선 리허설을 거의 안 하는 편이다. 한번 연기하고 나면 연습이 되어버리니까, 그게 어색하고 싫다. 엄마랑 말다툼하는 장면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바로 찍었다. 하지만 엄마가 정확하게 딱 내 감정을 끌어올려주니까 첫 테이크에서 바로 터지더라.
-그렇게 어려운 장면을 리허설없이 가는 쪽을 선호한다면 상대 배우가 신인인 경우엔 힘들 수도 있겠다.
=맞다. 날것으로 연기하는 게 언제까지 가능할지 사실 걱정도 된다. 지금까지는 너무 많이 알고 있으면 몰입이 덜 되는 것 같아 준비되지 않은 연기들을 좋아했지만, 앞으로는 고민해서 차근차근 만들어내는 연기도 노력해야 한다.
-“여기가 지옥이야, 더 갈 데도 없어!”라고 소리지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불신지옥>이 묘한 느낌을 주는 이유가, 엄마라든가 이웃들의 광신적인 믿음에 대해 혐오와 공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 입장에선 어떤 생각이 들었나.
=원래 그때는 울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첫 테이크에서 너무 답답한 마음에 울어버렸다. 결국 다시 찍긴 했는데, 난 그 상황이 정말 답답했다. 이웃 중 어느 누구 하나 남을 돌아보거나 배려하지 않는다. 난 배려하지 않는 타입을, 자기 입장만 고집하는 이기적인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물론 희진이도 집이 지긋지긋하니까 엄마와 동생을 버리고 서울로 도망쳤고, 타인에 대한 배려나 연민이 부족한 애다. 그런 애조차도 엄마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하니까 폭발했겠지.
-얘기를 듣다보니 이용주 감독의 희진과 남상미의 희진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겠다.
=그래서 여러 번 다시 찍었다. (웃음)
-감독 입장에서 절대 양보 안 한 모양이다. (웃음)
=나더러 그러시더라. “너는 감정 북받치거나 흥분하면 눈물부터 나지? 친구들이랑 싸울 때 네가 먼저 울지 않니?” 몰랐는데, 내가 그렇더라고. 촬영하면서도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싶으면 얼른 중단하고 모니터 확인한 다음, 눈물이 보이면 다시 찍자고 하셨다.
-누르는 연기 자체가 스트레스였겠다.
=내가 한번 울면 엄청 우는 타입이다. 눈물만 그렁거리는 게 아니라 왈칵 울어서 눈도 잘 붓는다. 엄마 앞에서 우는 장면 찍을 때 테이크를 여러 번 가다 보니 결국 화면 속 얼굴이 부어 있더라. 앞 장면과 달리 갑자기 얼굴이 부어 있으니 연결상 튀는 것 같아 조금 속이 상했다. 그래서 감정 조절하는 것도 빨리 익숙해져야겠구나, 아직은 내가 ‘생’으로만 연기하는구나, 싶었다.
-촬영하면서 가장 무서웠던 장면이 있다면.
=찍을 당시에는 경비원이 내 허벅지를 긁는 장면이 악몽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완성된 작품을 보니까 의외로 문희경 선배가 내 머리를 때리는 장면이 무섭더라. 원래 의도된 충격 효과는 아니었다. 이틀밤을 꼬박 새운 다음 새벽 3시에 그 장면을 촬영했기 때문에 정신 차리지 않으면 사고난다 싶어서 긴장하고 찍느라 무서운 줄도 몰랐다. 영화상으로 보니 믿었던 사람이 적으로 돌아섰을 때의 그 느낌이 엄청난 폭력이고 잔인함이었다.
-촬영 장소인 아파트에 처음 갔을 땐 느낌이 어땠나.
=거기가 꽤 스산하다. 요즘엔 아파트가 한채만 지어지는 경우가 없잖아. 주변에 논밭이 죽 깔려 있고, 교회에 경찰서에 학교가 있지만 다들 나직나직하고, 그 아파트 한채만 우뚝 서 있는데 참 이질적이었다. 게다가 아파트 단지 내에서만 바람이 불고, 단지의 놀이터만 추웠다. 4월에 놀이터 장면 찍으면서 파카를 입고 있었다. (웃음)
-마지막 옥상신은 현장에서 찍었다던데.
=영화 앞부분에서 무거운 가방을 메고 아르바이트를 다닐 때, 실제로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었다. 그래야지만 무거운 연기가 나온다. 마지막 옥상신 준비할 때도, 옥탑 세트를 지을 거라고 들었을 때 “왜요? 무서워야 된다면 무서워야죠. 전 그게 나아요”라고 대답했다. 땅이 바로 발밑에 있는 쪽보다 공간감을 느끼며 연기하는 게 또 다르니까. 그게 내가 연기를 잘할 수 있는 길이고, 원래 겁도 별로 없고. (웃음) 하지만 감독님 본인이 고소공포증이 있고 김보연 선배도 겁이 많으셔서 결국 세트로 가기로 했다. 대신 나를 배려해주셔서 옥상에다 그 세트를 지었다.
-일년에 한편씩은 꼭 새로운 작품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CF라든가 예능 프로에서 자주 보질 않다보니 관객 입장에선 남상미라는 배우가 아주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난 오히려 쉬어본 적이 별로 없다. 드라마나 영화 편성이 그렇게 됐기 때문이지, 나는 언제나 계속 일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북적거리는 쪽을 좋아한다. 사실 혼자 있을 때 여배우들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한정된 공간에서 쳇바퀴 돌리듯이 그림 배우고 피아노 배우고 수영장 갔다가 헬스장 갔다가, 그 정도다. 그렇게 매일 하다보면 내가 중·고등학생도 아닌데 싶어진다. 그 답답함 때문에 연기에 대한 갈증이 빨리 생긴다. 한달 쉬면 많이 쉬는 거다. CF나 다른 예능 프로 출연 같은 경우엔 글쎄, 관심이 별로 없다. 연기할 때 말고는 남상미 개인으로서 뭔가 어필하는 게 아직 어색하고 창피하다. 쇼프로에 나가서 편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치자. 그런데 극중에선 도도한 공주 역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얼마든지 “쟨 저런 역 안 어울리는 것 같아”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작품 속의 내 캐릭터에게 몰입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게 아닐까. 남상미의 모습은 가급적 남상미로서만 갖고 있어야지만 관객도 내 연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나 역시 연기와 자아를 뚜렷이 분리시킬 수 있는 것 같다.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자기만의 연기 플랜을 뚜렷하게 세운 것 같다.
=많이 보여질수록 익숙해지니까. 익숙한 건 아닌 것 같다. 나도 가끔 힘들다. 촬영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내 속에서 더이상 새로운 모습이 나오지 않는 순간도 있다. 그런데 작품 외의 내 모습이 많이 노출되면 그런 변화가 더 어려울 것 같다.
-차기작이 궁금하다.
=아직 시나리오와 대본을 안 읽고 있다. 좀더 평정심을 찾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읽으려고. 지금은 조금만 더 쉬고 싶다. 남상미로서의 삶도 좀더 살아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