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이민기를 만났다. <해운대>가 안겨준 뜻밖의 발견이 시간을 재촉했다. 이런 게 배우의 시간인가 싶었다. 모델로 세상에 나와 연기를 시작했고 노래도 부른 이민기. 그는 지금 스포트라이트 아래 섰다. 전에 없던 반응이다. 어리광 가득했던 이민기의 눈빛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의 듬직함으로 변했고, 천만의 관객이 그의 헌신을 이야기했다. <해운대>의 시간이 그를 불러 세운 셈이다. “그라믄 나 좀 보고 가이소.” 전과 후의 시간도 궁금해졌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이민기의 과거, 그리고 앞으로 마주하게 될 그의 새로움 말이다. 형식을 막 지나온 이민기. 지금 현재. 그는 몇시일까.
# 형식이로 살았던 시간
-(인터뷰는 간단히 식사를 하며 진행했다. 이민기는 비빔국수를 시켰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나요.
=매운 거 먹었을 때랑 술 막 취하기 시작할 때 뭔가 시력이 좋아지는 듯한 기분 있잖아요. 해는 져서 까매지려 할 때 하늘이 파랗고 빨갛고. 왠지 멀리 보이는 거 같고.
-주연보다 더 주목받고 있는 거 같아요.
=그 칭찬에 (김)인권이 형이랑 몸 둘 바를 모르다 합의점을 찾은 것이. 다른 분들이야 워낙 잘하고 이미 검증이 됐으니까. 돋보이는 게 아니라 이제 좀 보이는 게 맞는 거죠. (웃음)
-형식이 역할이 잘 어울렸던 것도 있어요.
=근데 개인적으로는 <해운대>를 하면서 진짜 연기를 잘했다, 이제 연기 알겠다, 이런 거 없었어요. 매번 열심히 하듯 했고. 그냥 내가 잘했다기보다는 모든 게 잘 맞아서 칭찬을 듣는 게 아닌가 싶은데.
-실제로는 얼마나 형식 같아요.
=형식 같은 면 있는데. 아닌 면도 많고. 그런 거예요. 남이 날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날 바라보는 당신과 나는 똑같다는 거지. 모든 사람이 복합적이잖아요. 근데 그 복합적인 면 중에 하나의 성향이 극대화돼서 캐릭터로 만들어지니까.
-김해 출신이라 사투리엔 문제가 없었겠어요.
=그죠. 저는 무슨 말을 하든 사투리로 할 수 있으니까. 이를테면 칠성사이다도 사투리로 할 수 있어요. 칠승 싸~다. (웃음) 근데 대신 한순간 어긋나버리면 크죠. 실제 사투리하는 분들도 TV 같은 데서 하면 어색하게 들릴 때가 있거든요. 대본에 ‘그라면 내 좀 보고 가지요’라고 써 있어요. 근데 그게 뭔가 어색한 거 같아. 그래서 나는 ‘감 내 좀 보고 가지요’로 했던 거 같아요. 느낌으로는 더 맞잖아요. 사소한 거 하나하나 고민했고. 그래서 지금 서울말이 잘 안되고. (웃음) 아~. 진짜 걱정이야.
-실제로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를 보니 평소 말할 때도 사투리 억양이 조금 묻어 나오던데요.
=장난 아니죠. 진짜. 그거 <10억> 팀이랑 같이 봤거든요. 방송 한 시간 하나? 혼자 소주 두병 깠어요. 하~씨. 옆에 해일이 형이 앉아 있었는데 <놀러와>에 자기 출연 안 했잖아요. 내가 하자고 했는데. 도저히 형은 버라이어티 안된다고. 형은 또 형대로 미안했던 거야. 나는 내 자신이 그래서 마신 건데. 형은 얘가 많이 힘들었나. 계속 자작하니까. 따라주고. 아~. 그래도 또 해낼 거라 믿는 건 서울 사람 역할 맡으면 그렇게 하겠지. 뭐.
-역할에 깊이 빠지고 영향도 많이 받나봐요.
=<해운대>는 촬영 기간이 유난히 길었고요. 어떻게 보면 언어문제에서는 좀 오버하기도 했는데. 제가 연기가 되는 사람이 아니라서. 사실 말을 좋게 해서 역할에 빠졌다고 하는데. 그 정도도 하지 않으면 못해요. 지금까지는 제 상대 배우 분들이 다 좋은 분들이었거든요. 근데 소문에 들리는 몇몇 나쁜 분들 있잖아요. (웃음) 자기 것만 찍고 들어가서 허공에 대고 연기해야 한다고. 그럼 저는 진짜 끝나는 거예요. (웃음)
# 음악에 빠져있는 시간
-앨범 <<No Kidding>> 발표했잖아요. 언제부터 기획한 건가요.
=싱글 작업할 때부터 나왔던 얘기예요. 근데 누군 그런 얘기해. 난 상상도 못했는데. 너 임마 이제 떴다고 앨범까지 내냐. 아 그렇게 또 되는구나. 그럼 반대로 <해운대>가 안됐다면 쟤 이제 안되니까 앨범이라도 해서 먹고살려나보다 했겠죠. 그러니까 이 일 하면서 느끼는 건 내가 하는 거와 상관없이 주위에서 만들어지는 게 너무 많은 거 같아서.
-감당은 되나요.
=일단 신경은 안 쓰는데. 그게 뭔가 제 삶의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면 다르겠죠. 얼마 전에도 길 가는데 애들이 뺀질뺀질거려요. 고등학생 같은데. 눈이 마주쳤어요. 그땐 아무 얘기없고. 20m 가니까 뒤에서 그런 거 있잖아요. 느낌 전달 되려나. 이민기다~. 이민기~. 아 짜증. 확 돌아봤어요. 생각을 하죠. 내가 가서 쟤를 한대 쥐어박았다. 걔가 인터넷에 글써서 폭행 어쩌고 된다. 그런 거에 신경 쓰느냐. 나 자신은 안 쓰거든요. 근데 만약에 걔가 억울해서 등 뒤에서 나를 칼로 찔렀다. 그럼 직접적으로 내 삶에 영향을 주니까.
-앨범을 들은 첫인상은 솔직 담백하다는 거였어요. 무엇을 하고 싶다는 느낌이 가장 컸나요.
=첫째 즐겁고 싶었고. 제가 좋아하는 것이고. 그냥 사람들은 민기라는 애가 음악을 되게 좋아하는구나,만 알면 되는 것 같고. 내가 하는 음악이 사람들의 감정에 변화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가 음악을 하는 이유가 그거거든요.
-가사는 어떤 식으로 쓴 건가요.
=제가 직접 쓰진 않고. 녹음실에서 같이 써가면서 했어요. 이건 너무 유치하다, 그럼 빼자. 뭐 이런 식으로.
-<영원한 여름>의 너바나 대목처럼요.
=그건 상징적이니까. 너바나라는 게.
-재킷 사진은 누구의 아이디어예요.
=회의를 통해 결정한 건데. 뭔가 노 키딩이라는 말과 연관있는 것 같고. 뭐 깊이 생각하는 사람 잘 없겠지만. 그냥 벗었네 이러겠지만. 그냥 봤을 때 얘가 뭘 벗으려는지. 이를테면 여기 이민기가 있죠. 연기하는 애라고 생각하잖아요. 제가 지금부터 연기를 벗습니다, 가 될 수도 있는 거고. 당신도 나에 대한 선입견을 벗어던지고 음악을 들어주십쇼. 뭔가 상징적인 의미도 되는 거 같고. 사진 컨셉도 예쁘고.
-밴드도 하고 있죠.
=밴드라기보다 합주팀이죠. 제가 기타 학원을 다닐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타만 치니까 친구들이 심심해진 거야. 한놈 두놈 놀러오더라고요. 그러다 내가 하는 거 보고 신기한 거지. 이야 씨 나도 할란다. 한명이 베이스친다고 하고 다른 놈은 보컬한다고 하고. 생각해보니까 우리 밴드 해도 되겠다. 그냥 한 거죠.
# … 그리고 지금 나는
-시작은 모델이잖아요.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했어요?
=그냥 남들 관심있는 만큼. 좋아서 했다기보다는 하다보니 좋아진 거고. 하다보니 좋아서 힘들어진 것 같고. 그래도 모델과 면접 보러 갈 때는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당시에 지오지아에서 양복도 한벌 사고. 그랬죠.
-얼마 전 테리 리처드슨이 국내에서 촬영을 했잖아요. 유일하게 웃으며 작업한 스타라고 쓴 기사를 봤어요.
=그니까 말이 안 통하니까 편하니까. (웃음) 아버지뻘인가. 나이 되게 많든데요. 나도 몰라. 이상하게 이게 버릇인데 외국인한테 자꾸 반말을 하게 돼. 그냥 이런 거 있잖아요. 뭐? 형님. 근데 이러면 안되지. 나 이렇게 하라고? (웃음) 계속 한국말로 물어보고. 걔는 영어로 대답하는데 그냥 하는 거. 거리낌 없었고. 테리 사진이 또 약간 이거잖아요. 한국에선 형님 앞에서 벗으면 조금 그런데. 또 그런 생각 있었죠. 에이. 두번 볼 일 있겠어? (웃음)
-평소엔 옷 어떻게 입어요.
=툭. 그냥 툭. 쇼핑도 지난해에는 즐겼는데 지지난해엔 안 즐겼고. 또 그전엔 즐겼고. 기타도 매일 열심히 치는 게 아니고 한두달, 하루에 다섯, 여섯 시간씩 치다가 반년 안 치고.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게 다른 거죠.
-그럼 지금은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좀 부끄러운데 곡 쓰고 있었어요. 집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렸어요. 근데 너무 웃긴 게 집 안에서 잃어버려서. 다시 사기도 그렇고. 배터리가 없으니 소리로 찾을 수도 없고. 아. 이 참에 잘됐다. 은둔생활 한번 하자. 곡을 쓰자 그랬는데. 저한테는 은둔생활 없는 거죠. 작업하려고 하면 띠띠띠띠 애들 막 들어와. 야 니는 왜 전화를 안 받노. 전화 잃어버렸어. 뭐하는데? 곡 쓴다. 뭐? 곡을. 마 나온나. 밥 묵자. 아, 좀 있어봐. (웃음)
-곡은 언제부터 쓴 거예요.
=저번주인데. 음. 써봤죠. 1집 낸 뒤에 느낀 건데. 너무 많은 거 배웠고 한데. 더 오버를 안 해보면. 음. 다른 사람한테 곡 받아서 하는 것도 좋은 작업인데. 한끗 차이로 내가 다 한 것처럼 하고 다닌다고, 그런 시선으로 보는 분이 있다면 거기에 내가 할 말이 없잖아요. 내가 연기자란 이유로 깎아내리겠다면. 그럼 내가 곡을 쓸 수 있나. 한번 써보자. 세곡 정도 러프하게 썼는데. 조금 더 작업해서. 형님 한번 들어보세요. 곡으로 만들어주실래요. 민기야, 그냥 너 연기해라 그러면. 넹~. (웃음) 그리고 괜찮은데. 그러면 좋은 작업 될 거 같고. 근데 이렇게 하는 거 같아요. 하나하나.
-장난감이 술이라 할 정도로 음주를 즐긴다 들었어요.
=좋아한다기보다는 놀 게 없어요. 계속 친구들이랑 살았으니까. 그러니까 오늘 술 먹지 말고 영화보자. 영화 보러 갔는데 영화가 너무 좋아. 와. 영화 너무 좋아. 소주 한잔하러 가자. 영화가 너무 짜증나. 야, 무슨 저러냐. 또 술 먹고. 같이 합주 연습을 해요. 야 끝났다. 수고했다. 한잔하자. 계속 이렇게 되니까. 못 벗어나. 못 벗어나. (웃음)
-실수도 해요?
=오, 실수하죠. 이거. (왼쪽 팔꿈치를 가리키며) 아까 취미생활하다가 그랬다고 했잖아요. 얼마 전에. 근데 같이 있던 사람들 아무도 몰라. 심지어 나도 몰랐어요. 한참 있다가 보니 피가 나서. 어 이거 언제 그랬지. 어디 이동한 것도 아니고. 아직도 미스터리야. 미스터리.
-집에 가면 혼자 뭐해요. 이전이랑 일상이 바뀐 것 같나요.
=별거 안 해요. 책 보고 TV 보고. 그런데 요즘엔 작품이나 뭔가 내가 할 것 없이는 삶의 의미를 못 찾겠는 거 있잖아요. 예전엔 책을 그냥 읽었던 것 같은데. 이젠 의미를 모르는 거지. 내가 이 책을 왜 읽고 있나. 하고 싶은 게 없나. 책은 재밌네. 작가 누구야. 이런 식. 내가 사이코패스 역할을 해야 해서 사이코패스 책을 막 읽죠. 그럼 정말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고. 지금은 계속 목적이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거 같아요. 운동도 내가 왜 운동을 하나. 건강하고 싶나. 그렇고.
-별명이 산꼴의 모글리예요?
=아. 서울 와서 얼마 안됐을 때 그러더라고요. 실제 모글리 같은 사람 있었잖아요. 늑대 소년이라고. 말 못하고. 처음엔 놀린다고 서울말 해라. 막 그러면 말 안 했거든. 와~ 떠들다 너 서울말 해. 그럼 말 안 하게 되는 거야. 그럼 모글리라고. 그래서 산꼴의 모글리됐다가.
-좌우명 같은 거 있어요.
=음. 있어요? 없는 거 같아요. 그냥 지금 생각나는 거 얘기한다면. 빨리 연애하자. 더 늦기 전에. (웃음) 계속 없었죠.
-8월8일 부산에서 공연도 했죠.
=이번 앨범으론 첫 공연이었어요. 음악방송도 출연할까 싶은데. 그럼 또 얘기가 너무 많아서. 너무 설치지 마라부터. 근데 나 떳떳하게 곡 만들고 앨범 냈는데 듣고 좋은 분들만 좋으면 되고 강요할 마음도 없는데. 난 그만큼 솔직하게 하는 거니까. 방송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 같아 하자는 생각하는데.
-이후 스케줄이 어떻게 돼요.
=일단 내일 중국 가고요(<해운대> 중국 개봉 행사차). 물놀이를 한번도 못해서. 풀을 한번 가볼까. 저 안 바쁘다니까요. 근데 이거(상처) 때문에. 물에 못 들어갈 것 같아.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