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담배를 찾았다. 장근석도 이제 스물세살이다. 어디에서나 담배를 살 수 있는 나이다. 그래도 장근석의 흡연은 낯설다. 아역배우 출신의 미소년 스타라는 이미지가 가장 큰 이유다. 피부 트러블을 걱정해 흡연과 음주 따위는 멀리할 듯한 선입견도 있을 것이다. 장근석은 <이태원 살인사건>에서도 담배를 피운다. 게다가 살인용의자가 그의 역할이다. <이태원 살인사건>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를 품평하기 전에, 무엇을 고민하는지 묻고 싶었다. 예쁘게 생긴 아이돌, 과감한 의상을 즐겨입는 패셔니스타, 혹은 허세근석으로 불렸던 장근석은 지금 어떤 닉네임을 기대할까.
-배우들, 특히 남자배우들은 왜 그토록 살인범을 선망하는 걸까.
=자기 색깔을 분명히 표현해보고 싶은 배우의 원초적인 욕심이 아닐까. 게다가 남자배우들은 은근히 마초 캐릭터를 원하는 호르몬이 있는 것 같다.
-본인이 <이태원 살인사건>을 선택한 이유인가.
=캐릭터보다는 사건에 흥미가 있었다. 사건이 가진 미스터리에 빨려들어간 것 같다. 그 뒤 피어슨이란 캐릭터를 만나면서 그가 가진 혼란스러움에 매력을 느꼈다. 멕시코인과 한국인 사이의 혼혈아로 미국에서도 미국 사람 대접을 못 받고 한국에서도 이방인이다. 게다가 18살밖에 안됐다. 이유없이 불량아로 치부할 수 없는 아이다.
-그래도 살인범이라는 점에서 기대와 두려움은 있었을 텐데.
= 피어슨은 용의자이기 때문에 촬영하는 동안 살인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방황기 청소년에게 세상이 던지는 칼날 같은 시선을 생각했다. 피어슨이 법정에서 느꼈을 후회, 두려움 등 말이다. 사실 영화의 홍보자료와 실제 내용은 다른 게 많다.
-10대 청소년이라는 점에서 전작의 캐릭터들과 비슷하지만 그래도 가장 센 캐릭터다.
=물론 시도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이전부터 꽃미남 혹은 미소년 등의 수식어를 완전히 깨버릴 수 있는 캐릭터를 찾았다. 대신 천천히 해보고 싶었다. 버젯(예산)이 큰 블록버스터로 시도하기보다는 좀 작은 규모의 영화에서 시도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의도치 않게 영화가 좀 커진 느낌이다. 원래는 스폰지에서 배급하고 스폰지에서 운영하는 극장에서 정말 보고 싶은 관객이 볼 수 있게 하자는 거였는데….
-배급 규모가 커진 가장 큰 이유는 장근석 때문이 아닐까? 의도하지 않아도 당신은 상업적인 배우다.
=그럴까? 사실 나는 이 영화에 거의 막차를 타듯 들어갔다. 나도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 싶기는 하더라. (웃음)
-이미지의 변화 외에 다른 욕심이 있었나.
=배우로 봐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상업적인 아이돌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 다양한 활동을 했다. 사실은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있었다. 연기 잘하는 배우란 타이틀이 목적인데, 정작 내 활동영역은 다르다는 혼란이 있었다.
-20대 초반의 스타에게는 자연스러운 영역이기도 하다.
=생각이 여러 가지다. 지금이 나에게는 과도기다. 구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가 않다.
-본인에게 끊임없이 냉정한 평가를 할 것 같다.
=당연히 해봤다. 나는 아직 배우가 아니라 연기할 줄 아는 연예인인 것 같다. 이준익 감독님이 그러시더라. 스크린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관객을 스크린 안으로 빨아당기는 배우가 있다고. 그러면서 덧붙인 말씀이 “너는 어쩔 수 없어. 서른다섯살까지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였다. (웃음) 나도 계속 비주얼만 생각하는 것보다 그런 공력을 쌓고 싶다. 흡수할 건 흡수하고, 버릴 건 버리고. 단, 너무 조급하지는 않게.
-한때 남자다워 보이려고 무리수를 두는 모습도 있었다. 방금 말한 공력이 부러워서였나.
=그런 것도 있었다. <베토벤 바이러스>를 하면서 설정한 모습이기도 했다. 무척 1차원적인 생각이었지. (웃음) 그때 어떤 영화잡지의 표지를 했었다. 잡지를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어려 보이는 애가 인상을 쓰고 있었거든. (웃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더라. 나로서는 일종의 성장통을 겪는 시기였다.
-개인적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연애상담을 하거나, 연애사를 털어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딘가 나이답지 않게 닳고닳은 모습이랄까.
=하하하 주위에서는 애늙은이 같다고 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어쩔 수 없는 모습이기도 하다. 다른 친구들이 펜 잡고 있을 때, 나는 마이크를 잡고 대본을 보고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촬영장에 가면 애가 아니라 내 능력치를 뽑아줘야 하는 사회구성원이었다. 여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거지.
-스스로 달라졌다고 할 만큼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무엇이었나.
=올해 학교를 다니면서 많이 변한 것 같다. 내가 가진 고정관념들을 없앨 수 있는 시간이었다. 평소에는 대충 입고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웃음) 그런데 같이 어울려보니까 내면의 파워가 엄청나더라. 나보다 더 센 인간들이었다. 내가 닳고닳은 사람이라면 그들은 깨져도 다시 덤빌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들 같은 에너지를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미니홈피도 닫고, 차에 거울도 없앴다. 예전에 작품을 할 때는 거울만 미친 듯이 봤는데, 내 에너지를 위해서는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더라.
-다음 작품은 드라마 <미남이시네요>다. 어떤 캐릭터인가.
=성격에 엣지가 있다고 해야 할까? 말이 안되는 문장인데, 그만큼 맺고 끊는 게 분명하다. 아이돌 그룹 내에서 자기 스타일의 음악만을 고집하는 친구다. 심지어 결벽증도 있다.
-큰 강건우(<베토벤 바이러스>의 김명민)랑 비슷하다.
=안 그래도 걱정이다. 사람들이 저 자식 저거 김명민이 하는 거 보고 똑같이 하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시놉시스를 읽어보니 <꽃보다 남자>(이하 <꽃남>)의 또 다른 버전 같더라. 당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구준표 격이었다.
=그런 말도 듣는다. 그럼 왜 <꽃남> 대신 <베토벤 바이러스>를 선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었냐고 그러더라.
-<꽃남>에서도 구준표 역할을 제의받았었나.
=아니다. 구성단계에서 제안이 왔었다. 어디에는 내가 루이를 하려고 했다가 김현중씨가 캐스팅돼서 빠졌다는 말도 있던데, 그거 소설이다. 나는 단번에 거절했다. 순서를 고민했었다. 그때 <꽃남>을 했으면 마침표를 찍었을 거다. 장근석은 그저 미소년의 20대 배우로 끝나는 거였다. 하지만 <베토벤 바이러스>와 <이태원 살인사건>을 거친 지금의 나는 이제 구준표 같은 옷도 좀더 편안하게, 그리고 잘 입을 수 있다. <꽃남>이 마침표였다면 <베토벤 바이러스>는 쉼표였다.
-피어슨에 대한 평가가 중요한 시점이겠다. 스스로 평가해보면 어떤가.
=이제는 이런 옷도 입어볼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낸 게 아닐까? 만족하는 건 아니다. 천천히 가자고 했지만, 그래도 좀 서둘렀던 것 같고. 아직은 좀더 ‘가봉’을 해야 할 것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