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영애] 연기로 칭찬받는게 최고다
2009-09-09
글 : 이화정
사진 : 오계옥
<애자> 배우 김영애

“높은 구두 신고 무대에 올라서 있으니 진땀이 다 나더라.” <애자>의 기자시사 날, 평소 맨 얼굴에 운동화 차림의 김영애는 전에 없던 차림새를 했다. 3년 만이다. 대중 앞에 선 것도, 연기를 하기까지도 3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불편한 구두만큼이나 그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간 갑작스레 사업가가 되어 안방극장을 떠났고, 그 사업이 휘청거리는 위기를 겪었고, 개인적으로 가정에도 불화가 찾아왔다. <애자>는 힘든 상황에서 그녀가 잡은 연기자로서의 ‘끈’이었다. 어떤 평가보다도 연기에 대한 평가가 가장 두렵다는 그녀. 그래서 최선을 다했다는 그녀의 지난 시간을 들어본다.

-버라이어티까지 진출했다. 촬영보다 바쁜 홍보 일정 소화하느라 힘들겠다.
=(웃음) 그런 프로그램엔 처음 나가보는 거지만 내가 원래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못한다고 해본 적이 없다. 즐겁게 하고 있다.

- ‘복귀작’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다른 제안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애자>를 택했나.
=<애자>를 제안받았을 때 난 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간 드라마도 몇편 제안받고 했는데, 아직 준비 안됐다고 거절을 했다. 심리 상태나 모든 것이 힘들 때였다. 그럼에도 용기를 낼 만큼 시나리오가 재밌더라. 난 예술성도 좋지만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가 좋다. 출연작 중에서도 서민들 삶을 그린 <형제의 강>이나 <파도> 같은 드라마를 좋아한다. <애자>를 보니 내 일 같기도, 앞집, 옆집 일 같기도 하더라.

-타이틀의 ‘애자’가 주인공일 것 같지만, 사실 영화는 딸 애자와 엄마가 이루는 ‘관계’가 주가 되는 영화다. 공동주연으로서 책임도 컸을 텐데.
=흥행을 걱정할 만큼 내 분량이 많더라. 배우로서 내 연기력에 대한 평가도 너무 걱정됐다.

-한번 익힌 자전거 기술은 몇년이 지나도 몸에 익어 있다고 하지 않나.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을 감안하면 적응도 걱정 없었을 것 같다.
=그건 아니다. 늘 작품 한편 할 때마다 몸살을 앓는다. 연기라는 게 나이 먹는다고 저절로 잘되는 게 아니다. 다른 배우를 보면서 “쟨 왜 저렇게 구닥다리 연기를 하고 있을까” 할 때도 있지만, 정작 나 김영애도 그 안에 포함될 수 있는 거다. 드라마 <황진이>의 백무 역 끝내고 3년 만이니 집중력, 순발력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간 너무 많은 일을 겪고 난 뒤라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현장에서 만났을 때 ‘이 좋은 걸 왜 안 했나 싶었다’라는 말을 하던데, 첫 촬영 땐 부담만큼 감회도 컸겠다.
=사실 그런 기쁨은 좀더 지나고 나서야 왔다. 촬영 한달이 지나도록 너무 힘들더라. 스트레스를 하도 받아서 계속 체하고 잠도 못 자고, 그러다보니 눈 모세혈관이 터져서 고생했다. 내가 나를 너무 볶아대니 그럴 수밖에.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기훈 감독은 김영애씨의 노련함과 배려 때문에 현장에서 큰 도움이 됐다더라. 촬영 내내 모두들 ‘엄마’라고 부르던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마침 감독님 엄마랑 나도 나이 차가 별로 없었다. 우리 감독님, 내가 ‘여우’라고 부르는데, 나를 잘 컨트롤해줬다. 오랜만에 하는데도 현장에서 감을 찾을 수 있도록, 구닥다리 배우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독려해줬다.

-딸 역할의 최강희와 장면이 많다. 상대 배우로 평가가 궁금하다.
=친구 같았다. 나이가 조금 손아래 친구인 정도. 우린 많이 통한다. 코드도 참 비슷하다. 둘 다 엉뚱한 구석도 많고 어떤 틀 안에 들어가는 걸 참지 못한다. 그리고 의외로 사람도 잘 사귀지 못한다.

-연기 활동 연수로 보나, 사업가로 보나 사람을 못 사귄다는 게 선뜻 이해가 안 간다.
=난 옷 살 때 옷을 골라 사는 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친구가 옮겨다니는 데로 계속 옮겨다닌다. 머리 해주는 선생님은 28살 때 만났다. 사람 쫓아다니다 보니 네일, 메이크업하는 이들이 모두 다 다르다. 그게 시간도 오래 걸리고 번거로운데 난 사람을 버리지는 못하겠더라. 한 사람과 만나면 계속 그 관계를 유지하는 거다.

-그런 사람이 진짜 무서운 사람이다.
=일할 땐 모든 게 착착 진행되고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스스로 내 자신한테 내기를 많이 걸고 볶아댄다. 같이 일하는 사람도 완벽해야 한다. 물론 실수는 괜찮다. 그런데 상대가 나를 무시하거나 그런 일은 못 참는다. 왜냐, 난 최선을 다하니까. 어떤 일이든 내게 주어진 건 죽기 살기로 한다. 그래서 깐깐하단 소리도 많이 듣는다. 그래도 내 딴엔 아주 심각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황진이>의 ‘백무’가 너무 지독하고 완벽해서 지긋지긋했으니까. 근데 어느 날 그걸 본 아들이 ‘엄마랑 너무 닮았어’라고 하더라. (웃음) 스스로 완벽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도 모르게 내 자식에게도 요구해왔나 보다.

-그러고보니 <애자>의 엄마 ‘최영희’가 참 어울린다. 올곧은 소신, 원칙주의자라는 점에서 김영애라는 자연인과 겹친다.
=나와 참 비슷한 부분이 많은 사람이다. 후반부 내소사 장면이나 딸과 함께 이야기하는 버스장면, 꽃길장면에서는 이미 최영희가 내 속에 들어왔다.

-시사 보고나서 갑자기 엄마에게 전화하는 분들 많았다고 하더라. 직접 연기하는 배우로서도 작품 외의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을 것 같다.
=엄마 역을 했지만 연기하는 내내 딸의 입장에서 자꾸 나를 돌아보게 되더라. 엄마가 몇년 전, 79살 나이로 돌아가셨다. 20년 가까이 병치레를 해오셨는데도 엄마의 죽음이 내겐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정말 그렇게 갑자기 가실 줄 몰랐다. 엄마는 늘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엄마랑 통화하면서 가장 많이 한 소리가 “엄마, 나 지금 바빠, 빨리 이야기하고 끊어”더라.

-어릴 땐 분명 주변을 떠들썩하게 했을 미모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동네 아이들이 ‘아이노꾸’ 하면서 막대기 들고 막 쫓아다녔다. 그게 혼혈아라는 사투리인데 60년대 초 이럴 때니까 굉장히 부정적인 단어였다. 얼굴이 하얀데다 굉장히 작고, 이마는 톡 튀어나오고. 게다가 눈동자가 아주 갈색이었으니 그렇게도 보였나보다. 우리 아버지가 진짜 엄하셨는데 당시에 남학생들이 집에 쫓아오면, ‘니가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니기에 이런 일이 생기냐’며 오히려 내가 혼났다.

-배우 생활을 허락받긴 더 힘들었겠다.
=내가 원래 좀 당돌했다. 공부하기 싫어서 상업학교 원서를 몰래 내고 혼날까봐 한달 동안 집에 안 들어갔다. 그렇게 엄한 아버지 밑에서 그런 짓을 했으니 엄마가 나 때문에 많이도 힘드셨다. 반항심이 굉장히 심한 아이였다. 연기할 때 정도 돼서는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셔서 이 빠진 호랑이셨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 있다 돌아가셨다.

-배우의 꿈은 원래 가지고 있었나. 그 미모 때문에도 연기자 권유를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옛날은 좀 예쁘면 애들한테 연기해봐라 권유하던 시절이었다. 집이 부산인데 그때 서울에 우연히 다니러 올 일이 있었다. 그때 주위에서 ‘시험 한번 봐라’ 해서 MBC 공채시험에 응모했다. 배우가 뭔지도 모르고 월급받으니까 좋겠다 싶어서 내봤다. 운 좋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배우가 안됐으면 어떤 모습일까, 다른 모습은 상상이 되질 않는다. 내 장래희망은 그냥 현모양처였다.

-언제부터 연기자라는 책임의식을 느끼게 됐나.
=고모님이 서울 사셨는데, ‘내가 데리고 있어보겠다. 맡겨봐라’ 하셔서 배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바스트숏이 뭔지 모르면서도 현장에서 그걸 배우자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장녀 체면에 못하겠다고 중간에 내려가면 너무 창피하니까 이를 꽉 물고 죽기 살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건 오기와 자존심이었던 것 같다. 스물다섯살 때쯤, 주연 맡으면서 ‘아, 이 일이 재밌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김자옥과 나, 그리고 좀 뒤에 고두심씨가 나오고 그럴 때였다.

-부산 출신이란 점은 조금 의외다. ‘서울 깍쟁이’ 같은 도회적인 이미지가 강하고 그런 역할들만 소화했는데. 이번엔 부산 지역색을 드러냈다.
=이미지가 그래서 다들 내가 부산 출신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사투리 연기도 많지 않았다. 드라마 <형제의 강> 때 밀양 배경이라 경상도 사투리 쓰고, 드라마 <파도> 때 군산 배경이라 전라도 사투리 쓴 게 거의 전부다. 부산에서 20년 살았지만, 배우가 되고부터는 쭉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울 생활이 더 길다. 집안 형제들은 다 부산 사투리 쓰는데도 이젠 급하면 난 서울말이 먼저 나온다.

-70년대엔 영화배우로 더 많이 활동했는데, 그 뒤엔 TV드라마로 이적했다.
=그땐 다양한 영화 많이 찍었다. 그런데 사람을 원체 못 사귀는 성격이니 촬영 기간 동안 새로운 사람 만나고 금방 헤어지는 현장이 나한테 잘 안 맞더라. 야한 영화도 더러 있었는데, 아들이 2∼3살 때쯤 만화영화 빌리러 비디오숍엘 갔는데, 문득 나중에 이 아이가 커서 엄마가 야한 영화 나온 거 보면 안되겠다 싶더라. 그땐 그게 굉장히 큰 문제여서 갑자기 영화를 뚝 끊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습다. 그러고도 좋은 엄마가 되지는 않았으니까. TV 일 하면서 너무 바빠서 전화로 숙제했냐 이런 것만 체크하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 같으면 일 좀 덜하고 아이들하고 시간을 더 보냈을 텐데 말이다.

-사업문제가 시끄러웠다.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최근 이혼문제까지 겹치면서 고통이 컸다.
=연기 생활보다 사업은 내게 더 중압감이었다. 80~90명 생계를 책임진 사람으로 사슬에 묶인 개 같았다. 사건이 터지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싶더라. 졸지에 파렴치범이 돼버렸으니. 내가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건, 죽어버리면 사람들이 ‘죽을 짓 했겠지’ 하고 생각할까봐서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이 있었나.
=그 어떤 것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남편과의 감정도 거기까지 가진 않았을 것 같다. 서로에게 위안을 주지 못하고 관계가 피폐해졌다. 난 전부 아니면 무, 다. 적당히 넘어가고 참는 게 안된다. 다른 사람에겐 너그러울 수 있지만, 그게 내 남편의 문제, 자식의 문제라면 되질 않는다. 한편으론 그게 나인데 어쩌겠냐 싶다. 지금까지 그런 원칙을 지키면서 살 수 있었다.

-<애자>야말로 그런 모든 걸 벗고 ‘배우’로서 김영애를 불러올 수 있는 매개체다.
=딴짓하고 오더니 연기 녹슬었네, 낼모레면 60인데 연기 깊이가 저 정도인가 소리 들을까 걱정이다. 배우는 연기로 칭찬받는 게 최고다. 김영애가 최고다라는 말을 원하는 게 아니라, <황진이>의 백무는 김영애가 최고다라는 소릴 듣고 싶은 거다. 그걸 위해서 안달복달하면서 살았다.

-‘나이가 드는’ 여배우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늙는다는 건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언제까지 아름다울 수는 없으니까. 단, 나이에 맞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메릴 스트립의 주름은 아름다운데 내 주름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배우가 아닌 자연인으로만 살았다면 주름도 없애고 가꾸었을 것 같다. 그런데 난 예쁜 배우보단 좋은 연기자 소리가 더 듣고 싶고 그래서 늙는 걸 받아들일 수 있다. 내 역할에 맞는 얼굴, 표정을 갖는 게 결국 배우로서 내가 자존심을 지키는 방식이다.

-앞으로 그럼 연기는 계속하는 건가.
=그럼, 물론이다. 지금까지 내가 스타라고 생각하고 살지 않았는데. 활동 안 할 때도 모두들 보면 반갑게 웃으면서 언제 작품하냐고 말해주더라. 고마웠다. 내가 그동안 연기를 많이 하긴 했나보다. 나도 기억 못하는 작품을 참 많이 했고, 덕분에 넘치게 사랑받았다. 이제 연기로 보답하고 싶다. 단,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를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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