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편의 한국영화가 2009년 여름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름은 끝났으나 두 영화를 향한 사람들의 애정은 아직 식지 않은 것 같다. 평문을 작성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다. 다만 그 영화들이 남긴 어떤 잔상을 말하고 싶다. 전형적인 블록버스터, 계산된 기획, 관습적 요소들의 재배치라는 예상 가능한 말들을 뚫고 돌출하는 이미지들. 이 영화들이 사적으로 오래 기억된다면 대중적 성공의 지표들이 아니라 그들 때문일 것이다.
해변의 아이는 무슨 놀이를 벌인 걸까
먼저 <해운대>의 마지막 시퀀스에 나오는 쓰나미 이후의 해변장면. 몇 차례의 쓰나미로 초토화한 해변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화염에 그을린 듯 시커멓게 변한 건물의 잔해들, 무질서하게 솟아오른 철근과 버팀목들의 기괴한 형상, 그들 사이를 서성이는 왜소한 인간 군상들. 이 장면이 잘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SF적인 전쟁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거대한 해일이 밀려왔던 게 아니라 누군가 이 도시를 불태운 것 같다. 전쟁과 쓰나미라는 자연재해가 남긴 풍경의 사실적 차이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해운대>의 마지막 풍경에는 그런 차이도 잊을 만큼 철저한 파괴의 형상이 중요했던 것 같다.
영화 덕으로 쓰나미 경보 체제가 강화되는 외적 효과가 있었다 해도 <해운대>의 재난은 적어도 대다수 관객에게 그것의 지시대상인 쓰나미라는 실제 자연재해와 무관하다. 지금 해운대의 상가들에는 영화 안에서 자신들이 쑥밭이 되는 <해운대>의 성공을 축하하는 문구가 곳곳에 붙어 있다. 모리스 야코워라는 비평가의 말대로 인간은 자신의 안전만 보장이 된다면 자신의 장례식이라도 구경하려는 종족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죽음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믿을 경우에만 우리의 장례식을 즐길 수 있다. 미국인들은 백악관이 외계인의 단 한번 피격으로 산산조각 나는 <인디펜던스 데이>에 환호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놀이의 원형을 알고 있다. ‘포르트/다’로 명명된 놀이에서 프로이트의 한살 반 된 손자는 그것을 자신이 다시 잡아당길 수 있기 때문에 끈 달린 나무실패를 침대 밑으로 굴려 넣고, 그것의 짧은 상실의 고통을 견딘다. 그리고 끈을 당겨 실패가 다시 자기 곁으로 돌아올 때의 기쁨을 즐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엄마의 외출과 귀가를 모방하며, 엄마에 대한 복수를 상상하는 능동적 놀이라고 설명했다.
이 놀이를 떠올린 이유는 앞서 말한 장면에서 폐허가 된 해변을 거니는 아이 때문이다. 뜻밖에 밝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한 여자아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해변을 놀이터 삼아 흉측한 잔해들 사이를 오간다. 놀랍게도 이 아이는 좀전에 눈앞에서 쓰나미로 부모를 잃었던 가련한 존재다. 끔찍한 형상의 처참한 폐허, 최악의 비극을 겪은 아이의 경쾌한 몸짓과 무심한 표정, 그리고 화사한 공기의 그로테스크한 조합. 여기엔 경건한 애도가 잔혹한 무심함과 은밀한 축복과 뒤섞여 있고, 그 가운데 한 여자아이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서 있다. 아이는 무슨 놀이를 벌인 걸까.
폐허 위에 전시된 은밀한 쾌락
한 평론가는 사석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대목이 아이 앞에서 부모를 두번 죽이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아이는 엘리베이터에 갇혀 죽어가던 엄마(엄정화)와 마지막 통화를 한다. 대신 아이에겐 이혼한 아빠(박중훈)가 돌아와 있다. 곧이어 아빠가 엄마를 극적으로 구해온다. 그러나 두 번째 쓰나미가 몰려와 부모를 휩쓸어가고 그 광경을 헬기에 올라탄 아이가 지켜본다. 그 평론가는 이 장면을 비윤리적이라고 느끼고 견디기 힘들어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기에 이 영화의 은밀한 소망이 담겨 있다고 느낀다.
박중훈은 이 영화가 재난영화의 관습에 따랐다면 재난을 예견하고 무능한 시스템을 대신해 사람들을 구하는 전문가/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홀로 재난을 예견했지만 자기 아이를 구하는 일 외엔 어떤 것도 하지 못한다(<해운대>에서 영웅이 되는 인물은 가장 무능하고 게으른 백수건달이다). 엄정화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다른 관료들처럼 박중훈의 예견을 부인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들의 전문가적 자질과 열성이야말로 아이를 고립과 위험에 빠트리는 나쁜 요소다.
나무실패를 침대 밑으로 굴려 넣던 프로이트의 손자는 또한 장난감을 던지며 “전방으로 가버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아이의 아버지는 1차대전 때 전방에 배치된 군인이었다). 그것이 아이의 복수라면 나무실패와 장난감의 상실의 순간이야말로 아이에게 고통이면서 동시에 쾌락의 순간이다. <해운대>의 아이도 지금 그렇게 복수의 제의를 벌이고 있다. 쓰나미를 부른 자 누구인가. 그것은 이 영화의 모든 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민기는 부산 사나이의 기개와 매력을 입증하기 위해, 설경구와 하지원은 역경을 넘어선 로맨스의 성공을 위해, 김인권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송재호는 사회적 아버지 혹은 지역 군주로서의 도덕적 책무를 완성하기 위해 불렀다. 심지어 아이의 부모도 불렀다. 자신들의 사회적 성취가 아이의 행복과 무관함을 알아차린 부모로서의 죄의식, 그것에서 비롯된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부모 되기의 욕망이 불렀다.
누구보다 아이가 불렀다. 자신을 고립과 위험 속에 방치한 부모를 징벌하기 위해 불렀다. 비유컨대 아이에게 이것은 나무실패와 장난감을 모두 박살내 부모에게 복수하는 제의이다. 물론 <해운대>에서 그것은 모두 인간의 (가상) 생명으로 대체되었다. 제의의 마지막 단계인 애도가 기대된 시점에 아이 혼자 명랑하게 뛰어놀 때, 이 기괴한 부조화의 장면은 그리고 아이의 무표정은 테크놀로지의 폭포수와도 같은 이 제의에 스며들지 않고 비스듬히 접합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어른들이 모두 고통의 표현과 애도의 표명이라는 제의의 수순을 따를 때, 아이만이 그 가벼운 몸짓과 무표정으로 그 고통에 동반된 쾌락을 은밀하게 전시한다. 부모의 처참한 죽음, 지독한 폐허 위에서 아이가 그토록 냉담할 때, 전문가 아버지의 성취 혹은 사회적 아버지의 질서는 철저한 파국적 재난의 소동없이는 존재 증명조차 할 수 없는 지푸라기 제국일 뿐이다. 해운대의 폐허에서 잠깐 그러나 강렬하게 들려온 것은 그 냉소이다.
그 <애국가>는 상실의 노래다
<국가대표>를 본 주변 사람들은 영화 전체에 대한 평가에 관계없이 유독 한 장면을 싫어했다. 올림픽이 끝난 뒤 선수 대기실에서 태극기를 걸어놓고 선수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이다. 애국심을 강요하는 신파적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에서 어떤 강요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무언가를 찬미하기보다 애도하고 있다고 느꼈다. 마치 <해운대>의 마지막 장면에 있어야 할 애도가 이 장면에 와 있는 것처럼. 그들 중 누군가가 “<애국가>가 이렇게 슬픈 노래였냐?”라고 울먹이지만 슬픈 건 당연할 것이다. 그들은 지금 상실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들의 노래가 바쳐질 가치가 있는 국가가 이 영화의 어디에 있었던가. 오히려 국가는 그들을 이용하고 곧바로 버리려 하지 않았던가. 억지로 국가대표가 된 그들에게 비행기표라도 제공했던가.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나라, 그 어머니마저 가장 천대받은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어떻게 찬미할 수 있을까(“나 버린 나라에서 다시 국가대표? 그거 웃긴 거 알죠?”). 이들의 딜레마는 국가를 승인하지 않으면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지 인생도 대표를 못하는 놈이 뭔 우리나라를 대표해”라는 아버지의 냉대 앞에서 아들은 국가대표가 되는 것 외에는 자기 인생을 대표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가 방송에서 아버지를 제일 존경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들이 부른 <애국가>와 마찬가지로 부재하거나 사라진 대상을 향한 외침이다.
<국가대표>는 현명하게도 국가라는 기표의 장소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리고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어떤 가상의 기원도 회복의 조짐도 마련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상실의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부재한 대상을 향한 연가이면서 동시에 그 텅 빈 기표로 호명되지 않을 수 없는 자신들을 위한 애가이기도 하다. 기능하지 않는 아버지 혹은 텅 빈 국가를 향해 아이는 은밀히 냉소하고 어른들은 그 부재를 공공연히 슬퍼하며 울먹이고 있다. 지난여름을 떠들썩하게 만든 두편의 한국영화가 사적으로 남긴 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