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는 시나리오]
[뒤집는 시나리오] <이태원 살인사건>
2009-09-23
글 : 길윤형 (한겨레 기자)
의정부의 할머니는 누가…

“김 병장님, 일어나세요. 사람이 죽었어요.”

2000년 3월11일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미군부대 ‘캠프 스탠리’ 앞. 대학교 2학년에 벼락치기로 토익 고득점자의 반열에 오른 까닭에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카투사로 입대한 김중필 병장은 졸린 눈을 부비며 ‘후임’ 이 일병의 재촉에 눈을 떴다.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일이야?” 부대에서 헌병으로 배치받은 그는 주말 밤마다 미군을 상대로 한 술집들을 돌아다니며 술 취한 미군들이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업무를 담당해야 했다.

“그 아줌마, 락시에서 얼굴 화장 진하게 하던 그 아줌마가 죽었대요.”

“뭐라고?”

김 병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군복으로 갈아입고 내려간 부대 앞은 이미 소란해져 있었다. 부대 앞 유흥가에 흑인들이 자주 출입하는 ‘Roxy’란 클럽이 있었다. 김 병장은 그곳에서 짙은 화장에 40대로 보이는 ‘그 아줌마’와 자주 마주쳐야 했다. 2년 전 제대한 박 병장은 그 아줌마를 보며 “내 선임이었던 조 병장 때도 있었다는데 언제부터 여기 다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김 병장은 그 아줌마를 볼 때마다 ‘저 나이에 여기서 뭐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어 경멸어린 눈초리를 보내왔던 터였다.

미군범죄수사대(CID)와 함께 현장을 찾은 김 병장은 비로소 그 ‘아줌마’의 신원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은 서정만, 숨질 때 나이는 68살이었고, 청각장애인이라고 했다. 갑자기 무언가에 가슴이 콱 찔리는 듯한 통각이 느껴졌다.

“그 아줌마 완전 할머니였네요.” 이 일병이 조용히 말을 받았다.

서씨는 양눈과 입가가 심하게 멍들어 있었고, 치아 두개가 부러져 있었다. 주민들은 “전날 밤 11시50분께 서씨가 키 180cm의 보통 체격인 한 흑인과 팔짱을 끼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소리를 듣지 못해 생계 대책이 없었던 그는 술 취한 미군들을 집으로 데려가 싼값에 유사성행위를 제공한 대가로 살고 있었다. 팬티 바람으로 침대에 옆으로 누운 채 발견된 주검을 바라보며 김 병장은 1992년 윤금이의 이름을 떠올렸다.

예상대로 미군은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한 채 사건은 미군수사대를 거쳐 한국 검찰로 넘어갔다. 미제로 남은 ‘이태원 살인사건’ 때문에 의정부지청으로 좌천돼 있던 박 검사(정진영)가 사건을 맡았다.

“검사님, 범인은 잡을 수 있을까요?”

박 검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국 경찰은 사건의 용의자를 한번도 직접 심문하지 못했고, CID는 “핵심 용의자를 본국으로 빼돌렸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때로는 그저 현실에 눈을 감는 게 더 좋을 때도 있어. 다들 그러고 살잖아.” 술에 취한 박 검사는 김 병장에게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그런데 가장 슬픈 게 뭔지 알아? 이 모든 비극이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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