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태원 살인사건>은 여러 단점이 눈에 띄는 영화다. 범인을 찾는 과정의 퍼즐식의 장르적 공식을 포기했다는 점이나 둘 중 하나인 범인을 확증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데 머문다는 점, 그리고 곳곳에서 다소 투박한 연출이 엿보인다는 점 등은 ‘보는 이에 따라’ 무시할 수 없는 영화의 결점일 수 있다. 장르적인 구성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대중적 재미를 반감시켰다는 비판을 제외한다면 나 역시도 그러한 지적에 대체로 공감한다. 하지만 <이태원 살인사건>은 그러한 단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미덕을 갖춘 작품이기도 하다. 극장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 미덕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거두절미하고 사건만 파고들다
영화는 그 시작과 함께 변기에서 소변을 보는 한 청년에게 다가가는 누군가의 시점숏을 보여준다. 그 시선의 주체로 가정된 자는 갑작스럽게 청년의 목을 칼로 찌르고 피해자는 화장실 구석에 쓰러져 피를 토한다. 홍기선 감독은 피해자의 피를 따라 수챗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이 장면을 마감한다. 어둠 속으로 도망가버린 시선의 주체.
<이태원 살인사건>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시선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조사하고 재판하는 과정을 꼼꼼하게 써내려 간다. 살인자는 피어슨(장근석)과 알렉스(신승환) 중 하나임에 분명하고, 그 누가 됐든 살인의 이유는 단지 재미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박대진 검사(정진영)는 미군에서 범인으로 지목했던 피어슨 대신 알렉스를 살인죄로 기소하고 법원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항소한 알렉스는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이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남고 둘 중 하나가 살인자임이 분명하지만, 둘 모두가 살인자가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태원 살인사건>처럼 잔가지가 없는 영화는 드물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사건이 있었던 현장으로 돌진하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사건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즉, 흔해빠진 서브플롯의 잔가지 하나 없이 오직 그 사건 자체에만 매달린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영화는 사건조사 일지 혹은 재판 일지 같은 느낌의 영화로 완성되었다. 물론 그 결과는 미스터리 서스펜스를 기대했던 관객에게는 배신감을 안겨주었겠지만, 둘 중 하나가 범인임이 확실한 사건이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된 과정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를 전달하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홍기선의 관심이 장르적인 것이 아니었으니 이를 바탕으로 작품의 성공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사건 조사 및 재판 과정에만 집요하게 달라붙었음에도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 영화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데, 혹은 못한다는 데’ 있다. 즉, 누구의 잘못인가, 라는 질문에 영화는 명확하게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진실의 실체가 어둠 속에 사라진 시대, 혹은 그렇게 묻혀버린 상황이 주는 심리적 혼란만을 보여주려 한 것처럼 보인다.
진실의 목격자가 입을 다무는 혼란의 시대
박 검사는 알렉스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적어도 영화의 초·중반까지는 그렇다. 재판이 거듭되면서 그의 확식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했던 진실이 흐릿해지면서 심리적 혼돈과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이 사건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목격자가 또한 살인 용의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알렉스가 살인자라면 피어슨이 목격자이고, 피어슨이 살인자라면 알렉스가 목격자이니, 이처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목격자는 진실의 담지자가 될 수 없지 않겠는가. 박 검사는 자신이 주장하는 진실을 확신시켜줄 목격자를 원한다. 그는 환영 속에서 자신의 사무실에 나타난 조중필을 만난다. 그는 조중필에게 “알렉스 맞지?”라고 묻지만 조중필은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사라진다. 조중필은 이 사건의 희생자이지만, 또한 (영화 속 법의학 교수의 말처럼) 가장 확실한 목격자이기도 하다. 박 검사가 조중필에게 던진 질문의 의미는 내가 너의 원한을 풀어준 거 맞지, 라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주장하는 진실이 네가 목격한 거 맞지, 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 환영은 박 검사의 심리적 혼란과 무기력이 ‘진실의 담지자로서의 목격자’를 갖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법정이 진실의 담지자일 수 있을지 의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면에서 박 검사는 법정에서의 판결 이전에 자기 자신을 확신시키는 데 실패한 자다. 즉, 박 검사의 사건에 대해 느끼는 심리적 혼란은, 진실이 상대적이어서 어떠한 것도 자신이 진실임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확증해줄 수 있는 ‘진실의 담지자-목격자’를 찾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물론 살인자가 무죄를 선고받는 부조리한 상황을 관객 역시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심리적 혼란과 무력감은 관객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면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렉스가 무죄를 선고받은 이후 박 검사는 그 사건이 발생했던 이태원의 햄버거 가게를 다시 찾는다. 화장실은 벽이 되어 막혀 있다. 카메라는 유령이 되어 그날의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화장실이 어둠 속에서 조금씩 밝아지면 벽에 기댄 채 홀로 죽은 조중필의 모습이 화면에 보인다. 홍기선 감독은 이 장면에서 그의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남성 변기를 마치 ‘사람 해골의 눈’처럼, 그러니까 텅 빈 시선이 우리를 바라보도록 이 장면을 설계해놓았다. 텅 빈 구멍으로서의 응시, 혹은 진실의 담지자로서의 목격자. <이태원 살인사건>은 재판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함으로써 ‘사건의 목격자-진실의 담지자’의 자리에 관객을 초대한다. 관객은 영화를 보던 자신의 시선을 ‘목격자-진실의 담지자’의 자리에서 되돌려 받는다.
<이태원 살인사건>이 극적 재미를 일부분 포기한 채 재판 일지 같은 영화로 구성한 것은 그 자리에 관객이 위치하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박 검사에게 무력감을 경험하게 한 것이 진실의 담지자가 부재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50%가 넘는 확률의 진실이 어둠 속에 묻힌 이유였다면, 누군가는 그 진실의 목격자가 되어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홍기선은 목격자로서의 텅 빈 응시의 자리에 관객을 초대함으로써 그것이 당신들의 역할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죄의식을 떠안는다
알렉스와 피어슨, 둘 중 누가 범인이라 하더라도 그들 사이에 성립되는 관계는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의 관계이다. 관객은 둘 중 누구에게도 깊은 동정심을 느끼기는 힘들다. 이는 무엇보다 그들에게서 어떤 죄의식도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무죄만 주장할 뿐, 조중필에게나 그 가족들에게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러니한 것은 살인과 관련된 자들은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데, 오히려 사건을 조사하는 박 검사만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려 한다는 점이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용의자 모두가 살인의 죄에서 면죄된 사건, 그럼으로써 죄인이 증발된 사건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나 정도는 그 사건에 대해 죄스럽다고 고백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작품이다. 투박한 화법이나 중반 이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동일한 이야기를 제자리에서 반복한다는 점 등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지만, 그것이 영화의 이러한 태도를 압도할 만큼의 결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이태원 살인사건>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