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의 시즌이 지났고 계절의 변화에 때맞춰 세편의 한국영화가 왔다. 같은 주에 개봉한 <내 사랑 내 곁에>와 <불꽃처럼 나비처럼>, 한주 뒤늦게 온 <호우시절>을 멜로영화의 범주로 이해하는 것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혹은 사랑에 관한 애틋한 드라마로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세편의 영화를 맞이하다보니 정작 그들이 표방한 사랑에의 공감보다는 그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욕망에 단상이 닿는다. 이 영화들에는 그들이 밝힌 이야기와는 별개로 우리에게 내밀하게 전해지고 있는 지배적인 욕망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이 세편의 멜로영화를 움직이게 하는 진짜 역학인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멜로영화에서 감정이입이란 중요한 장치일 텐데 이 세편의 영화에는 그 감정이입을 위해 이미 그 이전에 어디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는 강박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들이 빠져나오고자 하는 것은, 대개 현실성인 것 같다.
현실 바깥의 모델, <내 사랑 내 곁에>와 <불꽃처럼 나비처럼>
‘질병’을 계기로 삼은 박진표의 두 영화 <너는 내 운명>과 <내 사랑 내 곁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질병을 통해 행복이라는 궁극점을 묻고 있다. 질병을 지닌 주인공들은 당연히도 불행을 옆에 두고 있지만 그때 박진표는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흔치 않은 현실적 고려 속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순정과 그 부침을 껴안을 때 질병은 중심에 선다. 그렇게 볼 때 두 영화는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내 사랑 내 곁에>는 <너는 내 운명>에 이어지는 영화가 아니라 마주보고 선 영화일 것이다. <너는 내 운명>의 에이즈라는 질병은 그들을 이 사회에 존재하게 해달라는 현실 사회적 호소를 담고 있지만 <내 사랑 내 곁에>의 루게릭병은 현실에서는 있기 어려운 추상의 모델을 가져보려는 욕망이 있다. 앞선 질병은 사회 안으로 주인공들을 소속시키지만 지금의 질병은 그들 스스로 완전체가 되기를 바라며 얻어낸 계기다. 박진표가 두 번째로 질병을 끌어들였을 때 게다가 유사하게 흔치 않은 병을 상정했을 때 현실과의 관계는 오히려 덜 중요해진다. 나는 박진표가 현실 안의 희소성을 끌어안고자 한 것이 아니라 현실 바깥의 완전한 모델을 구현해보기 위해 이번의 질병을 택했다는 쪽에 내기를 걸고 싶어진다.
구체적 전략은 김용균의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엿보이며 적어도 이 영화에서라면 그건 가상적 현실과 실제적 현실의 모티브로 감지된다. 이 점은 또한 시각화와 서사의 전략 양자에서 모두 ‘게임’의 형식으로 구현된다. 먼저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무명과 흥선대원군 호위무사와의 대결장면에서 사용되는 게임 같은 시각화. 김용균은 이 장면을 CG슈퍼바이저와 무술감독에게 일임했으며 <300>을 염두에 두었다고 밝힌다. 갑자기 3차원의 공간처럼 무대화되는 두어번의 대결장면이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때 그들의 대결 공간은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게임의 공간, 가상적 세계로 탈바꿈한다. 인간적 시선이 가능하지 않은 움직임의 각도와 입체성이 주가 된다. 하지만 이 장면은 기술적 실수로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것이기보다, 현실 바깥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무의식에서 선택된 장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게임의 공간을 구축하는 전략보다 실은 더 중요한 전략이 서사 안에 있다. 만약 말해야 한다면 이 점이 더 중요하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는 명성황후가 개방의 개척자로 대원군이 강건한 국수주의자로 등장하고, 영화는 쇄국과 개방 사이에서 개방의 손을 들어준다. 그건 이 영화의 사상이 빚어낸 것은 아닌 것 같고 캐릭터의 구현에서 오는 부차적인 결과인 것 같다. 우리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삼키려 할 때 프랑스가 순수하게 외교의 차원에서만 조력자로 기능했다고 믿기 어렵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우아한 서양의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을 때 영화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비로소 믿도록 요구한다. 그건 역사의 진위와 무관한 영화 속 기호가 도출해내는 믿음의 현혹에 관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서로 마주 선 장기판의 말처럼 서사적으로 대치된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정치 게임에서 명분상 승리자는 명성황후가 된다. 이쯤에서 역사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역사에서 인물들은 이미 탈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명성황후가 명성황후 그녀가 아니어도 이 영화는 크게 타격을 입을 것 같지 않다. 어느 동화 속 위기에 처한 나라의 공주라 해도 될 것이다. 그녀는 자유, 바다로 대변되는 개방성의 욕망을 지닌 인물로 해석되고 있으며 그녀가 사랑의 중심에 있자 역사의 온당성은 하위의 문제가 된다.
덜 치명적인 미래로 건너뛰는 <호우시절>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탈현실적 전략 장치가 구체적으로 이행되고 있다면 <호우시절>은 명확하지 않고 좀더 징후적이다. <청두, 워 아이니>라는 단편 프로젝트를 장편으로 확장한 것이고 풍경에의 사랑이 없는 허진호의 영화는 상상하기가 어려우므로 <호우시절>이 ‘여행’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는 건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 <호우시절>은 그걸 상업적 약속 아래 이행해야 할 의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 엿보이는 건 <호우시절>의 관광 엽서 같은 면모가 아니라 일순간 스쳐지나간 어떤 숏의 욕망이다.
종종 <호우시절>을 본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 허진호의 많아지고 잦아진 컷에 관해 말한다. 일단 인상적으로만 말하면 나는 그것이 허진호의 영화 자체를 크게 변화시켰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컷이 많건 적건 이전의 영화만큼이나 부드러운 느낌으로 리듬을 이어간다. 다만, 한 장면이 흥미롭다. 공항에서 동하와 메이가 함께 커피숍에 앉아 있을 때 국화차에 잡힌 클로즈업 하나만으로도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인다. 그 장면에서 호텔의 로비 장면으로 이어진다 해도 어색할 것 같지 않다. 동하는 한국으로 지금 곧 돌아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한 장면이 더 덧붙여진다. 동하는 공항 로비에 서서 메이에게 자신이 하루 더 머물고 가도 될지를 물어본다. 이 장면은 기술적으로도 다소 허전하게 찍혔으며 결함처럼 보이지만 그건 의지적 결함이며 욕망의 동어반복이다.
나는 오히려 이 장면이 그 어떤 치명성을 일부러 결여하기 위해 배치된 원만한 사족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가령, 이들의 사랑이 치명성이라는 문제를 동반할 가능성에 관하여, 그들이 안아야 할 재회 이전과 이후의 현실적 사건들을 모두 끌어안아야 할 현실적 가능성에 관하여, 이 장면은 무의식적으로 영화적 두려움을 표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무언가 대단하고 결정적인 결단의 순간으로 인식될 만한 클로즈업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평범한 크기의 숏으로 물러나 꼭 하지 않아도 될 만한 대사를 덧붙여 일단의 결정을 완화한다. 그때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져 아름다울 수는 있어도 어떠한 치명과 책임에서는 한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원래부터 장소가 아니라 풍경을 다루어온 허진호의 영화에서 응시와 시선의 조합은 장소가 주는 물질적이며 구체적인 감응지수에 관하여 묘한 긴장관계를 형성해온 것이 사실인데, <호우시절>은 그 선을 더 명확하게 긋는 것에 애쓰는 것 같고, <호우시절>의 잦아진 컷은 혹은 앞서 말한 장면은 그 일례인 것 같다.
지난 한국 멜로와 88만원 세대의 멜로 사이
나는 세편의 영화에 담긴 죽음이 가로막고 선 두 남녀의 기구한 사랑, 조선 말기 황후와 무사의 운명적 사랑, 오래전 연인의 다시 시작되는 사랑을 보았다기보다, 희귀한 질병을 계기로 행복에 닿고 싶어 하는 추상적 역행, 게임화된 인물과 서사 그 양방향으로 역사의 중력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전략, 낯선 여행지에서 얻어진 만남을 계기로 치명적인 현실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다시 덜 치명적인 미래로 건너뛰고 싶어 하는 은밀함을 보았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이 세편의 멜로영화가 지닌, 소재와 주제 이전에 주어진 상급의 구조 또는 내밀한 욕망이다.
한때 한국영화의 멜로드라마는 현실에 지독하게 매어 있었다. 호스티스를 주인공으로 한 70년대 밀실의 멜로드라마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현실이 멜로를 낳고 또 낳았다. 요즈음이라면 88만원 세대라 할 만한 감독들의 영화에서, 그러니까 미처 정식으로 데뷔하지 못한 학생들의 영화에서 끊임없이 편의점 여직원과 고시원 남자 혹은 고시원 여자와 편의점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멜로드라마를 자주 보게 된다. 그들의 멜로가 아직 채 다듬어지지 않은 방식으로 발현되고 있을 때 그들은 아직 전략을 갖고 있지 못하고 그 전략을 상품화할 자본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그건 현실에의 날것이다. 말하자면 지나간 한국영화의 멜로와 아직 중심으로 들어서지 않은 88만원 세대의 멜로, 그 힘들 사이에서 지금 동시대 한국 멜로영화의 욕망은 오히려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성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 향방과 우열을 가늠하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이 가을 세편의 멜로영화가 전해주는 사랑에의 분위기와 탈현실 장치화의 욕망 중, 더 흥미로운 관점을 택하라 할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