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점프 컷]
[김영진의 점프 컷] 사건만 남고 감정은 휘발되고
2009-10-23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주목할 만한 신인감독 이용주의 <불신지옥>이 2% 부족한 순간

좀 뒷북이지만, 이용주의 데뷔작 <불신지옥>에 대해 쓰려고 한다. 지난여름 창의적인 데뷔작으로 평가받았던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이 영화의 질적 완성도에 비해 왜 그렇게 사람들이 보지 않았는지는 마케팅 당사자들만 알 것이다. 그렇게 외면받을 만한 영화는 아니었는데, 제목이 좀 호감이 덜 가고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너무 옥죄는 구석이 있긴 해도 <불신지옥>은 꽤 잘 연출된 영화였다.

왜 이 영화를 새삼 거론하는고 하니 이용주 감독이 차라리 좀더 세게 밀고 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에게는 장르를 다루는 재능이 상당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만한 구성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어이없는 순간이 한번도 없이 밀고 나가는 건 대단한 연출이다. 그게 대단하다는 것은 신인감독들이 만든 상당수의 한국영화들, 특히 지난 몇년간의 공포영화들이 얼마나 변칙적인 수에 의존했는가를 상기해보면 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영화는 좀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 이유가 뭘까 궁금해하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던 것이다.

일단, 여주인공 희진(남상미)의 우울한 일상을 보여주는 초반부터 <불신지옥>은 ‘삶은 지옥이다’라는 명제를 풀어놓고 시작한다. 가난한 여대생이 약을 먹어가면서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힘겨운 일상을 짧게 보여준 다음에 영화는 엄마(김보연)의 전화를 받고 지방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희진을 보여준다. 그의 엄마는 기독교 광신도로 실종된 둘째딸 소진(심은경)을 찾기 위해 경찰을 부르자는 희진의 제안을 뿌리친다. 소진에게는 어떤 초현실적 능력이 있었던 모양인데 희진의 신고로 온 형사 태환(류승룡)이 마지못해 수사에 나서는 과정에서 이상한 일들이 자꾸 일어난다.

시작부터 지옥도… 일상이 느껴지지 않아

별로 무섭지 않은 상황에서 차근차근 추리기법으로 스토리를 풀어가는 이 영화는 사실 초반부터 너무 서두른다는 인상을 준다. 관객의 관심을 잡아두기 위해 소진의 기이한 행적을 조금씩 주변 이웃의 회상을 통해 보여주면서 서스펜스를 자아내는데 애초에 이렇게 되니까 이들의 일상묘사가 끼어들 틈이 전혀 없다. 영화는 처음부터 그냥 불신지옥 그 자체인 아파트를 무대로 전개되는 것이다. 희진의 엄마는 딸 소진의 초능력을 보고 자기 딸이 구세주라고 여기며, 무당 이웃은 그녀에게 신령이 들어섰다고 믿는다. 흥미로운 테마지만 그걸 끝까지 밀고 나가지는 않는다. 길거리에서 예수 믿어야 천당 간다고 외치는 사람의 모습은 일상적 풍경에 속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일상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광신도라는 모티브 자체가 소재적으로만 흐를 뿐 깊숙이 탐구되진 않기 때문이다. 영화에 분명히 묘사되는, 흔히 신들렸다고 말해지는 희진의 초능력에 대해서도 깊이 들어가진 않는다. 명확하게 벌어진 일로 묘사되지만 역시 소재적으로 차용된 느낌으로 지나간다.

이것들을 제대로 파고들지 않았기 때문에 <불신지옥>은 잘 만든 영화였음에도 뭔가 갑갑한 느낌만 주며 끝나고 만다. 신앙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라는 테마는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인 것이다. 이를 현상적으로만 제시하면 이 영화에서처럼 사건 위주의 뼈대만 남고 감정은 휘발된다.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동조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야기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등장인물에 대한 동일화가 이뤄진다는 것에 감독의 계산이 없을 리 없다. 이 영화에는 애초부터 애정이 아니라 관심있게 지켜봐줘야 할 일상 따위가 없다. 그냥 사건의 연쇄로 휙 내달릴 뿐이다. 혹 감독의 이 세상에 대한 절망이나 불신이 그 정도 수위를 훌쩍 넘었기 때문은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다.

비정상성에 대한 탐구는 다른 한축으로 정상성에 대한 갈망이나 또는 관성적인 집착, 연민 따위가 병행해야 한다. 영화 초반에 제시된 형사 태환의 가족사를 보면 그의 딸 역시 불치병을 앓고 있다. 그가 희진만큼이나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사실상의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위기를 맞은 그의 가정은 희진의 가정과 쌍을 이룰 수 있다. 이것 역시 깊게 탐구되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것들이 계속 의문이었다. 희진은 필사적으로 동생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 와중에 아파트 인간 군상의 뒤틀린 내면만이 차곡차곡 드러날 뿐 애초에 결핍돼 있던 이들 삶의 갈구하는 형태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렇게 건조할 요량이면 차라리 기독교와 무속의 광적인 신앙이라는 사건의 중심축을 더 밀고 나가거나 한쪽에서라도 파고드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내러티브와 스타일의 조화 내지는 상호배분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연출력을 갖고 있는 듯한 신인감독이 소심하게 몸을 움츠린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등장인물 사이의 어떤 화학작용도 없는

<불신지옥>은 왜 처음부터 지옥도 그 자체로 세상을 그려낼 수밖에 없었을까. 물론 실제 세상에 대한 감독의 관점이 그렇기 때문에 그처럼 흘러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등장인물 사이의 어떤 화학작용도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악마에 홀린 가정의 비극이라면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와 같은 영화가 있다. 세상을 지옥도 그 자체로 제시하는 영화라면 윤종찬의 <소름>도 있다. 그 영화들에서 공포가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면 그것은 그들 사이에 분명하게, 또는 희미하게라도 흐르는 감정의 화학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 이용주는 그 대신, 벌어지는 상황에서 구할 수 있는 인상적인 이미지를 곧잘 보여준다. 몇몇 장면들은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으며 심지어 뛰어나다. 괜히 깜짝 놀라게 하는 악취미가 아니라 광기에 이미 침윤된 인물의 내면과 그를 둘러싼 외부 사람들의 모습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부분적으로 뛰어난 장면들과 전체적으로 무리없는 이야기 전개에도 불구하고 <불신지옥>이 다소 초점이 흐려졌다면 역시 감독이 타격할 대상에 대한 의지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된다. 인물들의 광기, 그들간의 초현실적 전이를 그려내더라도 그것이 의탁하거나 대항하는 시스템에 대한 묘사가 없으면 팥없는 찐빵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무력하게 살아가는 계층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시스템의 꼴은 다종다기하다. 이 영화는 종교가 될 수도, 기만적인 공동체가 될 수도 있었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초점을 잃고 방황하는데 그들은 좀더 드셌어도 좋았고 그들을 둘러싼 시스템 역시 더 명확했어도 좋았다.

나는 감독이 그걸 못했다기보다는 안 했다고 본다. 영화 시작 뒤 이미 파김치가 된 상태로 등장한 여주인공 희진과 형사 태환은 그 이후에 아무리 격정적인 상황이 벌어져도 감정 레벨이 그다지 높이 올라가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지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다. 그 모습에 공감이 간다. 그렇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은 대중영화의 주인공으로 적당한 모습은 아니다. 이런 것들이 시대적 징후인지 아니면 우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불신지옥>은 잘 만든 재미있는 영화지만 뼛속 깊이 무력감을 안겨주는 영화이기도 했다. 이용주 감독의 차기작이 궁금하다. 그가 다른 것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시스템을 파고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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