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여배우들> 이토록 아찔하게 솔직한 순간이라니
2009-11-12
글 : 장미
사진 : 오계옥
이재용 감독의 신작 <여배우들> 촬영현장에서 여섯명의 여배우를 엿보다

여배우들이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여섯,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이다. 출연진의 이름을 받아적는 것만으로 유혹적인 <여배우들>은 배우들이 자기 자신으로 캐스팅된, 즉, 윤여정이 윤여정을, 이미숙이 이미숙을, 고현정이 고현정을 연기하는 영화다. 여섯 여배우들이 패션지 <보그>의 화보를 촬영하고자 한자리에 모인다는 가상의 설정 아래 성격이며 사생활 따위, 즉, 그들의 실체가 셀레브리티들의 삶을 염탐하고 싶어 안달인 21세기의 관객 앞에 노골적으로 전시된다. 게다가 이 폭로전의 얼굴들을 찬찬히 곱씹어보라. 브라운관에서 무르익고 스크린에 나이테를 새긴 걸출한 배우들이요, 결혼과 이혼, 스캔들로 각종 미디어를 뒤흔든 곡절 많은 여인들 아닌가. 여배우들과 영화, 연기와 실제, 영상매체와 인쇄매체, 그리고 패션의 동거를 둘러싼 이 흥미로운 프로젝트는 이재용 감독의 신작이다. 질문이 목까지 차올랐다. 필모그래피를 도전하듯 확장시킨 <다세포 소녀> 이후 3년 만의 신작인 이 영화에서 그는 또 어떤 새로운 재미를 찾았을까. 다음은 6월25일과 30일 이틀간 <여배우들> 촬영장을 방문해 여배우들의 수다 몇막을 훔쳐본 기록이다. 10월이 가도록 후반작업에 열중인 이재용 감독의 인터뷰도 곁들었다.


6월25일 오후 3시30경. 청담동 스튜디오. “빨리 나오세요.” 최지우의 외침에 떠밀리듯 의상이 줄줄이 늘어선 스튜디오 한편에서 윤여정, 이미숙, 김민희가 화기애애하게 등장한다. “샴페인 딸까요?” 김옥빈이 예의 투명한 음성으로 묻는다. 테이블 앞에 모여든 여배우들이 핑크빛 샴페인을 따면서 환호하는데, 이상하게 한 자리가 허전하다. 고현정이다. 샴페인을 터뜨리기 직전, 누군가 “우리끼리 시작해도 될까?” 물은 듯도 싶다. 파티에 어울릴 안줏거리를 조달하러 고현정은 잠시 집으로 돌아간 상태. 부재를 틈타 여배우들이 은근슬쩍 그녀의 태도를 품평한다. 분장실에서부터 고현정이 시비조였다고, 안 그래도 부은 얼굴을 마구 잡아당기기까지 했다고, 최지우가 애교 섞인 어조로 고현정을 비방한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이미숙이 불쑥 “한류가 못 된 게 한이 됐나 보다”, “같은 또래인데 얘가 예뻐서 그런 게 아니겠냐”며 맞장구친다. 우아한 미소 아래 은근한 공모의 쾌감이 스민다.

아찔하다. 놀랍도록 적나라한 뒷담화의 현장을 생중계로 목도하는 영광을 차지한 입장에서 말하자면, 체면 불구하고 깔깔 웃음을 터뜨리고 싶다가도 절로 무릎이 후들거린다. 생애 이런 진풍경을 언제 다시 볼까마는 나란히 앉아 호기롭게 샴페인 잔을 부딪치는 여배우들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덜컥 겁이 날 지경이다. 무림으로 치자면 절대지존들의 회합이다. 시대를 풍미한 팜므파탈과 사랑을 조롱하고 사회마저 냉소하던 서슬 퍼런 귀족 부인, 자존심 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내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직접 왕이 되련다 선언하는 여장부. 그녀들을 좁은 방 안에 몰아넣고 음흉하게 다툼을 조장한다고 생각해보라. 이재용 감독 역시 “실제로 첫날 촬영이 끝나고 맥주 한잔 하는데 머리가 하얘졌다”고 말했다. “안 해본 것, 낯선 것을 작업하다보니 신났지만 동시에 두렵고 불안했다. 최지우, 여려 보이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한류 스타 아닌가. 그 위치까지 왔으면 예사 사람들이 아닌 거다. 내가 단순한 호기심과 욕심, 기대감에서 모아놨다고 생각하니 부담감에 등골이 서늘하더라.”

진실과 연기가 마구 뒤섞인

크리스마스이브. 여배우들이 어쩌면 가장 한가하고도 가장 외로운 날. <보그>가 제안한 ‘세대를 아우르는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들’이라는 컨셉의 화보 촬영에 응한 여섯 배우들이 차례로 스튜디오에 발을 들인다. 촬영장에 들이닥친 방식부터 그들의 개성을 존중하듯 각양각색이다. 가장 먼저 당도한 김옥빈은 주차된 차 안에 머무르고, 윤여정은 자기가 혹여나 땜방 섭외는 아니었는지 알고 싶은 눈치이며, 김민희는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하는가 하면, 고현정은 집이 가까워 걸어왔는데, 분장실에서 최지우와 시작부터 한판 신경전을 벌인 모양이다. 다른 여배우의 의상도 견제 대상이다. 티끌만한 실수도 재앙 수준으로 변하기 십상인데, 전장에서 그러하듯 여기서도 돌발적인 변수 하나가 대군의 사기를 꺾는다. 협찬품 목록에 포함된 티파니 액세서리의 도착이 늦어진 사건이 그것이다. 기세등등한 여배우들을 대기시켜야 하는 상황이니 <보그> 에디터들은 속이 탈 지경이다.

계절의 마법인지 우연찮게 거리엔 눈이 나린다. 창밖을 넘겨보던 이미숙이 문득 여배우들에게 샴페인이나 마시자 권한다. 연말의 낭만이 불현듯 스튜디오를 감싸고, 그녀들의 입에서 사적인 토로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사담의 비밀스러움을 외피로 두르고 있지만 <여배우들>은 본질적으로 ‘여배우들’이 ‘자신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영화다. 이재용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이 얼마나 진실을 이야기하고 연기로 그걸 보여줬을지는 관객도, 나도 모르고, 서로들 모를 수 있다.” “여배우가 여배우를 연기한다는 영화적인 컨셉이 흥미로웠다. 그동안 쌓아온 연륜과 연기와 삶 안에서 여배우가 여배우를 연기할 때 자기 자신과 연기적인 부분이 동시에 드러날 텐데, 그런 데서 오는 생생함을 담았으면 했다. 예를 들어, 이미숙씨의 발언은 즉흥적인 자기 생각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내가 남겨놓은 어떤 여백의 일부인 거고.” 기본 갈등 구조는 감독의 설정이지만 대사는 “배우들과 같이 쓰다시피 했”으니 각본 크레딧에 배우들의 이름이 나란히 함께 오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누가 제일 예쁘냐”는 질문에 남자는…

‘여인천하’의 화룡점정, 안주를 조달하러 나간 고현정이 뒤늦게 합류했다. 떠날 때는 혼자였는데 돌아올 땐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한 청년과 함께다. “남자친구 아냐?” 최지우가 선제 공격을 펼치자 고현정이 방어적으로 남자를 인사시킨다. “우리 회사 신인이야.” 의심과 냉소와 야유가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온다. “진짜요?”(김민희) ,“우리가 남자 처음 봐? 여기가 감옥이야?”(윤여정), “신인이 한명밖에 없었어? 짝수를 채워야지. 한명만 달랑 데리고오면 어떡해”(이미숙). 고현정이 짐짓 아무렇지 않게 이 청년의 이름은 에밀이요, 독일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연기 활동을 하다 한국에 왔다는 식의 소개를 덧붙인다. 영악한 그녀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여행을 많이 다녀봤지만 한국 여자들이 제일 예쁜 것 같다”는 남자의 말이 화근이었다. “여기서 누가 제일 예쁘냐”는 다소 난감한 질문에, 남자가 용감하게 두명을 지목하고 만다. 윤여정과 김옥빈이다. 두 여인의 눈동자에 승리의 기쁨이 깃든다. “약속시간에 늦었다”며 남자가 도망치듯 일어서고, 고현정이 그를 배웅하려 일어선 사이 여배우들이 비아냥댄다. 남자는 더 있고 싶어 하더라느니, 전화번호 딴대니까 바로 퇴장한다느니.

“NG는 없어. 무조건 가는 거야.” 고현정의 말대로 촬영은 거의 일사천리다. 이재용 감독이 “조금 더 활기차게” 등의 주문을 던지긴 해도 열쇠는 여배우들이 매 순간 얼마나 도발적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영화이니, 최종 버전이 어떻게 완성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약간의 취기가 용기를 부추기는 듯 우려와 걱정에도 촬영은 순탄하게 흘러간다. 여배우들이 샴페인 잔을 흔들면서 잡담을 이어간다. 고현정과 윤여정이 귓속말을 주고받고, 스탭들은 자연스럽게 배경을 채운다. 김옥빈의 4차원스러움이 화제로 떠오른다. 고현정이 “(4차원이면) 남자들이 싫어한다”고 주장하자 이미숙이 “그럼 남자들이 뭘 좋아하는데?” 맞불을 놓는다. “자꾸 어른들이 먼저 이야기하니까. 너네들이 먼저 해야 해.” 윤여정이 빈틈없는 음성으로 후배들을 독려하지만 주도하는 쪽은 아무래도 그녀와 이미숙, 고현정이다. 윤여정이 결벽증과 관련된 체험담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자, 고현정이 몇 마디 덧붙이는데 그게 또 압권이다. “고기 구을 때 지 입에 들어간 젓가락으로 다 찌르고. 그러고도 드시라고….” 막차를 타러 뛰어내려가면서도 이후 이야기가 궁금해서 온몸이 저릿하다.

이 시대 트렌드의 기묘한 하이브리드

30일 오후 5시. 다시 청담동 스튜디오. 메이크업을 마친 이미숙이 촬영을 준비한다. “자기들끼리 예쁘다 그러고. 내가 그래서 <보그>를 싫어해. 난 완전 펭귄이야, 펭귄.” 이미숙의 붉은 입술이 애정 어린 불만을 토로한다. 김용호 포토그래퍼가 셔터를 누르기 시작하자 촬영감독과 스탭들이 우르르 동선을 바꾼다. 카메라가 여러 각도에서 달라붙는 통에 붐마이크를 든 스탭의 노고가 많아 보인다. 레드원 세대, 소니 EX3 한대 등 카메라가 기본 네대요, 메이킹 카메라까지 도합 다섯대가 한꺼번에 돌아갈 때도 있으니, 취재랍시고 주변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면 렌즈를 피해다니는 기술부터 익혀야 한다. 이재용 감독은 한술 더 떠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카메라로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생생하고 리얼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어쨌든 카메라 한대라면 어떤 면에서 롱테이크 외엔 조작이기도 하잖나. 배우들도 자꾸 끊어가거나 꾸며서 하지 않으려면 그걸 다 잡아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개인적으론 디지털 작업에서 오는 이질감보다 편리함이 더 많았는데, 이건 필름으로 찍으면 불가능한 영화니까. 나는 편했다. 일단 마음껏 찍어놓을 수 있어서.”

촬영 중엔 냉방기구를 꺼야 하니 안 그래도 더운데, 배경이 겨울이어서 배우들의 의상마저 두텁다. 핸드헬드로 그녀들의 움직임을 따라잡아야 하는 홍경표 촬영감독도 온통 땀에 젖어 있다. 메이크업을 고치고 사진을 중간 점검하고 촬영을 재개하고 에디터가 배우에게 조언을 던지는 지난한 과정이 계속됐다. 지금 시점에서야 과거형이지만 극중 김용호 포토그래퍼가 촬영하는 사진들은 <보그>에 실릴 예정이었고, 실제로 8월호에 게재됐다. 자기 이름을 걸고 출연한 김지수 피처 디렉터는 틈틈히 배우들을 인터뷰했고, 이 역시 해당 지면에 반영됐다. 화보의 컨셉,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 등은 <보그>에 일임한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여배우들>은 여배우들과 영화, 연기와 실제, 한편으로 영상매체와 인쇄매체, 혹은 패션지, 아니, 패션 그 자체, 어쩌면 지금 이 시대 가장 트렌디한 것들의 총집합, 그들의 기묘한 하이브리드인 셈이다. <정사> <순애보>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다세포소녀> 등 드라마를 위압하지 않는 선에서 이와 긴밀히 조응하되 매혹적인 비주얼을 선사한 스타일리스트의 아이디어답다.

2시간쯤 지났을까. 이젠 검은 토끼 귀를 단 김민희가 사진을 찍을 차례다. 모델 출신답게 능숙하게 포즈를 취하는데, 컵케이크처럼 생긴 아이스크림이 문제다. “이걸 내려놔도 될까, 언니?” 이지아 패션 디렉터가 김민희의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조금 닦아낸다. “먹어도 돼. 먹어도 돼.” 소파에선 김지수 피처 디렉터가 이미숙을 인터뷰하는 중이다. SEP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비롯해 이 모든 프로페셔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자기 일을 완수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다음 장면은 이미숙의 인터뷰신. 화보 촬영 중 진행되는 인터뷰로 삽입돼 질문은 자막처리될 테지만 실질적인 인터뷰어는 이재용 감독이다. “내가 궁금했던 것 위주로 목록을 작성했는데, 대개 공통된 질문이었다. 한국 여배우를 대표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배우라면 느낄 만한 부분들을 주로 물었다.” 그는 “수많은 인터뷰를 하면서 한번쯤은 걸렸을 법한 질문”들로 “아주 당황스럽거나 새롭지는 않으리”라고 설명했지만 예상보다 수위가 높다. 어제 윤여정, 최지우, 김옥빈 역시 인터뷰 장면을 찍었다는데, 마찬가지였을 성싶다.

쇼프로 출연한 뒤 펑펑 울었다는 그녀

초록색 소파에 기대앉은 이미숙에게 쏟아지는 질문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왜 배우가 됐는가. 배우를 그만두지 않은 이유는 뭔가. 다른 배우를 질투한 적은 없나.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콤플렉스는 뭔가. 스캔들에는 어떻게 대처하나. 그렇다면 우울증에는. 고현정과 최지우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톤 낮아진 이미숙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린다. “배우가 안됐다면, 글쎄, 할 게 없었을 것 같다. 현모양처처럼 살 성격도 못 됐을 것 같다”거나 “질투도 배우가 자기 색깔을 나타낼 수 있는 부분 중 하나다”, “시작이 배우면 끝까지 배우여야 한다”거나 “나는 지극히 남자를 좋아한다. 소문은 우리 직업에 항상 붙어다니는 것이니 해명은 필요치 않다”, “나이라는 건 누구나 먹는 거잖나.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게 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 중 하나다” 등의 대답이 뒤따른다. 몇 차례 촬영을 중단하고 재개한다. “우울증이지. 우울해! (웃음) 어느 한순간에 엄습해오는 것 같아. 지난해가 심하게 괴로웠던 것 같아.” 가장 격렬하게 마음을 두드렸던 대답은 이것이었다. “이렇게 자아가 강하다 보면 90살, 100살까지도 살 것 같아….”

김민희의 인터뷰는 의상들이 걸린 맞은편을 배경으로 이뤄졌다. 패셔니스타로 칭송받는 여배우가 단연 편애할 만한 장소다. 질문은 비슷한데 김민희의 목소리가 워낙 수줍고 작아 잘 들리지 않는다. 연애와 악플, 노출 연기 등이 화두로 오른다. “(배우가 안됐으면) 해변에서 집시처럼 살았을 것 같다”니, 엉뚱하면서도 귀엽다. “왠지 모르게 나는 희망이 있어요. 항상 탈출구가 생기는 것 같아요. 우울증 같은 데 빠져도 어느 순간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 같아요. 저도 막 자살하고 싶고, 너무 힘들었던 때도 있었는데….” 그녀의 이야기에 물기가 서린다. “남자친구를 사귀고 그러면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요즘엔 이상하게 행복하다”는 김민희가 쇼프로그램 출연경험을 입에 올린다. “쇼프로 나가면 잘 못하거든요. 사람들이 재미있는 말 많이 하잖아요. 전 잘 못하겠어요. 얼버무리게 되고. 바보 같이 보이고. 그런 모습이 싫어서 집에 와서 엉엉 울기도 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거기가.” 솔직하고 용감하다. 인터뷰를 끝낸, 아니, 무엇보다 출연을 결심한 그녀들에게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남은 건 고현정의 화보 촬영과 인터뷰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동시 출연 중인 그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럼에도 하얗게 빛난다. 김용호 포토그래퍼가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스튜디오에 울려 퍼지고, 홍경표 촬영감독의 그것을 비롯해 카메라들이 그 주변을 휘돈다. 한 무리의 구경꾼이 촬영감독을 위해 길을 튼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가서는 이 공간이다 싶어 바로 결정해버렸다”(이재용 감독)는 김용호 포토그래퍼의 스튜디오가 스탭들의 숨 죽인 발자국 소리로 들썩인다. 가죽 소파에 누웠던 고현정이 팔걸이 양쪽을 밟고 일어선다. 블라우스 깃을 여미는가 하면, 둘러쓴 재킷으로 머리를 감싼다. 어떤 도전적인 컨셉에도 여배우의 위엄은 손상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고현정의 인터뷰를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안타깝다. 다음날 새벽, 몰아치듯 밀어붙인 12회차의 촬영은 모두 끝났다. 허기진 시선을 거두고 <여배우들>이 개봉할 12월을 고대하는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선물이 남았다면 여섯 여배우들이 한꺼번에 도열할 <보그> 12월호의 표지다. 이 특별한 영화와 잡지, 패션의 콜라보레이션을 맞이하기에 12월은 참으로 어울리는 달이다.

이재용 감독 인터뷰/ 여배우의 불안한 매력에 끌렸다

-후반작업 중인 걸로 아는데, 원활히 진행되는가.
=생각보다. 촬영기간에 비해 후반작업이 상대적으로 긴 것 같다.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많은 부분이 즉흥적이었고, 그러니까 편집을 하면서 다시 또 이야기를 재구성해야 한다. 나로서도 처음인 작업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도 많았다.

-<보그> 인터뷰를 보니 고현정, 윤여정과 함께 와인을 마시던 중 프랑수와 오종의 <8명의 여인들> 이야기를 하다가 이번 영화를 떠올리게 됐다고.
=어느 일면에선 맞다. 그분들과 지난해에 자주 만날 일이 있었다. 여배우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다보니 그 자리에 그냥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계기가 된 건 두 사람을 만나면서였고, 그걸 포함해 그 매력적인 여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러니까 10년 전 이야기인데, 여자들이 나오는 액션누아르 같은 걸 생각한 적도 있다.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심리적인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고.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처음엔 여배우들과 함께 뮤지컬을 해보고 싶었다. 뮤지컬을 올리기 위해 배우들이 모인 첫날의 풍경에서 출발했다. 그 모임 자체가 조금 단조로울 수 있겠다 싶어서 더 볼거리가 있고 더 어울리는 패션과 결합시킨 거다. 여배우라는 직종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면서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러면서 여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맞물린 셈이지.

-여배우라는 존재에 매력을 느낀 이유라면.
=<순애보>나 <다세포소녀>의 맥락에서 보면 나는 비주류적인 감성, 비주류적인 사람들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남자배우에 비해 여배우들이 더 쉽게 지탄받지만 한편으로 더 많은 걸 떠올리게 하잖나. 그만큼 불안하기도 하고 매력있기도 하고. 최근에 찾은 건데,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여배우가 있다’는 말을 누군가 했더라고. 영화에 인용하고 싶은데 누구의 말인지 모르겠다. (웃음) 공교롭게도 첫 영화부터 여성들 이야기, 여성 주인공을 그리다보니 그들의 섬세함을 다루는 게 개인적으로 재미있더라.

-염두에 뒀던 잡지는 <보그>가 유일했나.
=그렇다. <보그>가 가장 상징적이지 않을까 싶더라.

-에디터들의 캐스팅도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겠다.
=아니, 쉽지는 않았다. 그들도 처음엔 못한다고 하지. 하지만 리얼함을 위해 그분들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고현정이라는 역할을 고현정이 제일 잘 연기할 것 아닌가. 컨셉이 컨셉이다 보니 밀어붙인 거고. 이건 비하인드일 수도 있는데, <보그>에선 내가 영화를 조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웃음) 실제 <보그>와 상관없는 영화를 만들 수도 있는 거잖나. 패션 피플이 우스꽝스러워지는 걸 좌시할 수 없어서 심어놓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게 <보그>의 자존심이고, 패션계의 자존심이기도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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