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타란티노 월드는 이렇게 완성되었노라
2009-12-03
글 : 이현경 (영화평론가)
현실보다 그럴듯한 허구를 완성하는 타란티노의 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1992)은 마돈나의 히트곡 <Like a Virgine>에 대한 난삽한 논쟁을 길게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된다. 진짜 처녀에 관한 노래인지 경험 많은 여자에 관한 노래인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다른 인물 이야기가 뒤섞여 드는 이 정신없는 장면에서 타란티노는 자신의 영화 감상법을 제안한다. 수다스러운 잡담이 별다른 의미가 없듯 자신의 영화도 심각하게 보지 말라는 그의 제안은 곧 받아들여졌다. 타란티노 월드가 제공하는 전례없는 작품들은 정체성을 인정받았고 칸은 일찌감치 그에게 황금종려상을 주었다. 타란티노는 데뷔작에서 자신의 창작방식도 보여줬다. 마약 거래에 관한 가짜 시나리오를 구체적인 경험담으로 구성해나가는 화장실 시퀀스는 그가 어떻게 허구의 조각들을 축조해서 하나의 건축물로 완성하는지 보여준다. 단순한 아이디어가 현실보다 더 그럴듯한 허구의 세계로 진화하는 과정을 지극히 영화적 방식으로 재현한 이 장면은 그의 독창성을 입증한다. <펄프 픽션>(1994), <킬 빌> 시리즈(2003, 2004), <데쓰 프루프>(2007) 등은 모두 이 방식대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 2009)은 이 영화들 다음에 오지만 단순한 최근작이 아니라 타란티노 월드의 완공을 알리는 영화다.

그의 영화 취향과 지식에 대한 직설법

<바스터즈>가 전작과 차별되는 이유는 ‘역사’라는 새로운 재료를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역사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비극적 역사와 100년을 조금 넘긴 영화의 역사가 있다. 싸구려로 취급받던 대중문화의 잡동사니를 주재료로 삼은 쿠엔틴 타란티노식 요리가 입맛에 맞는가는 기호의 문제지만 그가 개발한 새로운 미각이 이 시대의 주류 입맛에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바스터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류의 재료까지 자신의 요리에 끌어들인 것이다. 상위문화 ‘역사’가 저급문화의 용광로인 타란티노 월드에 완벽하게 편입되었다. 물론 타란티노 자신이 말했듯, 이 영화는 복수의 우화를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를 차용한 것이지 제2차 세계대전을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는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순 없다. 그의 말처럼 제2차 세계대전을 사실(fact) 차원에서 재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을 해체하고 거기에 역사적 상상력을 덧붙인 이 가상의 역사극은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나치 도살자 알도 레인을 올려다보는 로앵글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역사적 평가의 어려움을 일깨워준다. 나치의 만행은 명백하지만 나치의 머리 가죽을 벗기고 마음대로 처형하는 알도 레인이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비디오 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엄청난 양의 영화를 섭렵한 타란티노가 자신이 매혹됐던 영화들을 자신의 작품에 인용하는 방식이 간접화법이었다면, <바스터즈>는 자신의 영화 취향과 지식에 대한 직설법이다. 제목도 ‘영화 작전’(Operation Kino)이라 붙인 네 번째 챕터에는 영화사가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이 작전에 참여하는 영국군 장교가 입대 전 영화평론가로 활동했다고 다소 뻔뻔한 설정을 해놓고는 1920~30년대 영화산업과 감독, 배우, 작품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마음껏 쏟아낸다. 독일 UPA영화사와 괴벨스를 미국의 루이 B. 메이어나 데이비드 O. 셀즈닉과 비교하고 독일 감독 파브스트를 언급한다. 영국군 장교가 입대 전 쓴 두권의 저서 중 하나는 20년대 독일영화 연구서이고 하나는 파브스트 연구서라는 이야기에서 타란티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괴벨스를 셀즈닉에 견주는 영화 속 대사에서 비약하면 자신은 파브스트에 대응시키고 싶은 것 같다. 매춘부, 사기꾼, 도박꾼 같은 사회악을 표상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킨 영화를 주로 만든 파브스트는 타란티노의 한참 위 선배 격이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된 영화의 구조는 세명의 주요 인물인 쇼산나와 특공대 지휘관 알도 레인, 나치 친위대 대령 한스 란다를 중심으로 축약된다. 전체 서사에서 쇼산나와 알도 레인은 각각 개별적 서사의 한축씩을 담당하고 한스 란다가 두축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첫 챕터는 쇼산나의 이야기였고 두 번째 챕터는 알도 레인의 이야기였다. 세 번째 챕터에서는 쇼산나가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킨 원수 한스 란다와 조우하고, 네 번째 챕터는 연합군이 계획한 ‘영화 작전’에 알도 레인이 참여하게 된다. 대망의 마지막 챕터에서는 쇼산나와 알도 레인, 한스 란다가 한곳에 모이지만 쇼산나와 알도 레인은 마지막까지 서로의 존재를 모른다. 영화가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이는 두개의 이야기 축이 끝까지 자기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부분을 생략하고 나머지 두 챕터만으로 영화를 만드는 게 더 경제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각각의 챕터에는 자기만의 스타일과 주제가 있기 때문에 비경제적인 것은 아니다. <바스터즈>를 감상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챕터마다 제공되는 다른 스타일의 서스펜스를 맛보는 일이다. 서스펜스의 교과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멋진 연출력을 자랑하는 이 신들이야말로 타란티노가 자신의 요리를 빛나게 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준비한 소스다.

각 챕터마다 다른 스타일의 서스펜스

첫 번째 챕터에서 서스펜스는 유대인 사냥꾼 한스 란다와 쇼산나 가족을 숨겨준 라파에트 사이의 대화에서 생겨난다. 소름 돋을 정도로 냉정함을 잃지 않는 한스 란다에게 몰려 점차 두려움이 차오르는 라파에트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관객은 그의 고통을 전달받게 된다. 양심을 포기하고 이웃을 숨겨준 마루 밑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 관객은 마치 자신이 심판받는 기분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 챕터는 알도 레인이 포로로 잡은 독일군 장교를 심문하는 장면에서 서스펜스가 고조된다. ‘곰 유대인’ 도니의 야구방망이 소리가 컴컴한 터널 안쪽에서부터 공명되어 울릴 때 긴장감은 극대화된다. 이건 말하자면 소리의 클로즈업이다. 곧 닥칠 무자비한 학살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소리가 카운트다운하고 있다.

세 번째 챕터의 서스펜스는 음식이 매개가 된다. 쇼산나의 정체를 모르는 한스 란다가 파이를 먹으며 질문을 하고 쇼산나가 위기를 넘겨야 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카메라는 크림이 듬뿍 얹힌 파이를 클로즈업한다. 긴장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달콤한 파이는 쇼산나의 공포와 한스 란다의 잔혹함을 확대시킨다. 네 번째 챕터의 ‘라 루이지안’ 술집 신은 서스펜스의 압권이다. 독일군 장교로 신분을 위장한 연합군 작전팀이 술집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잇따라 벌어진다. 독일어 억양 때문에 신분이 탄로날 위태로운 순간을 넘긴 그때 산통이 깨진다. 이 신은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처럼 절대적인 비극성을 띤다. 모두가 죽는 것 외에는 다른 해답이 없음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마침내 한발의 총성이 울리고 술집은 순식간에 초토화된다. 마지막 챕터의 서스펜스에는 코믹 코드가 가미되어 있다. 이중간첩인 독일 여배우와 함께 작전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극장으로 입장하려는 알도 레인과 두명의 부하가 구사하는 어설픈 이탈리아어는 웃음과 긴장의 줄타기를 한다.

인화성 강한 니트로 필름에 불을 붙여 극장을 태운다는 쇼산나의 계획은 성공한다. 불타는 스크린에 투사된 쇼산나의 얼굴과 아비규환이 된 극장 안 모습은 어떤 잔인한 복수극보다 통쾌하다. 이쯤에서 끝났다면 역사를 끌어들인 타란티노의 재주 정도로 평가하겠으나 마지막 반전에서 재주를 넘어섰다는 걸 느끼게 된다. 충실한 친위대 장교 한스 란다가 패전을 감지하고 배신하는 장면에서부터 진실은 미궁에 빠진다. 한스 란다는 항복 조건으로 자신의 이름을 ‘영화 작전’ 첫 페이지부터 기록해 달라고 요구한다. <바스터즈>는 역사적 상상력으로 쓰인 한편의 우화지만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역사에 이런 아이러니한 일들이 없었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보르헤스의 소설 <배신자와 영웅에 대한 주제>에 나오는 것처럼 배신자가 영웅이 되고 영웅이 배신자가 되는 일이 인류의 역사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역사를 가지고 유희를 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의 핵심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다. <바스터즈>는 보르헤스가 말한 ‘역사의 사각지대’를 건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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