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는 행복합니다>는 가상의 꿈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는 남자의 이야기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 도박에 빠진 형에게 온갖 스트레스를 받던 주인공 만수는 상상의 세계로 도피한다. 알프스 산맥의 어느 자락, 부모님이 경영하는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미녀들과 함께 부유함을 즐기는 것이 그의 상상이다. 만수를 연기하는 배우가 현빈이라고 했을 때, 이런 과대망상은 현빈을 새삼스럽게 환기시킨다. 만수가 꿈꾸는 삶은 영락없이 ‘삼식이’의 삶이다.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꿈같던 남자를 연기한 배우가 모든 사람들의 악몽을 연기한 것이다. 그런데 현빈에게는 그 간극을 메우는 또 다른 결이 있다. 능력있는 드라마 PD지만, 일상적인 무게에 짓눌려 있던 <그들이 사는 세상>의 지오, 거친 운명을 살다가 처참히 죽어간 <친구, 우리들의 전설>의 동수. 순서상 가장 먼저 촬영한 <나는 행복합니다>가 뒤늦게 개봉한 덕분일지도 모르지만, 지난 1년 동안 그처럼 다양한 얼굴이 현빈을 통해 살아났다. 게다가 다음 작품은 김태용 감독이 리메이크하는 <만추>다. “내 얼굴은 평범하다”는 발언이 곧 망언이 됐던 이 미남배우가 지금은 어떤 궁리를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미국에 있다가 잠깐 들어온 걸로 알고 있다.
=<만추>를 준비하고 있었다. 탕웨이도 와서 함께 대본 리딩을 하고 있다. 시애틀은 비가 많이 오던데, 한국은 갑자기 추워진 것 같다.
-쉬지 않고 있다. <나는 행복합니다>부터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과 <친구, 우리들의 전설>(이하 <친구>)을 연이어 하고는 바로 미국행이라니.
=의도한 건 아닌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렇게 됐다. <나는 행복합니다>를 하면서 <그들이 사는 세상>을 결정했다. 원래 한 작품을 하고 있을 때는 다른 작품을 안 찾는 편이다. 들어오는 시나리오도 안 본다. 그런데 어쩌다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게 된 거다. <친구>는 <나는 행복합니다> 전에 결정된 작품이었다. 우연히 <그들이 사는 세상>과 연결되더라. 드라마 끝나고 일본에 가서 행사를 했는데, 그곳에서 보람영화사의 이주익 대표님을 만났다. 책을 주시더니, 빨리 결정을 해야 한다더라. 결국 이렇게 된 거다. 올해는 특히 정신없이 살고 있다.
-<나는 행복합니다>는 어떤 점 때문에 선택했나. 현빈이라는 배우에게는 뜻밖의 작품으로 보인다.
=당연히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1%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말인데, 예전에 작품을 선택할 때도 항상 그랬다. 잘할 수 있어서 한 게 아니라 매력 때문에 했다. <나는 행복합니다>는 무척 무거운 이야기인데, 시나리오를 웃으면서 읽었다. 내 웃음에 내가 묘해졌달까. 그런 점 때문에 하고 싶었다.
-어떤 부분에서 웃었을까.
=정확히는 모르겠다. 여러 상황에 웃음 포인트가 있었다. 만수가 느끼는 현실적인 중압감이 병원에 오면서 나아지지 않나. 그런 부분을 희열로 느낀 건 아니지만, 가볍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윤종찬 감독으로서는 당신이 출연한다고 했을 때, 의아해했을 것 같은데.
=감독님도 못 믿으셨다. (웃음) 왜 저 친구가 이 작품을 하려고 하는지 의심스러우셨다더라. 회사에서 연기 트레이닝시키려고 보냈다는 생각도 하셨다고 했다. (웃음) 나는 그저 솔직히 말씀드렸다. 열심히 할 자신은 있다고. 감독님이 어느 정도 내 진심을 봐주신 것 같더라. 그래서 만수를 좀더 젊은 남자로 바꿔주셨다.
-만수가 처한 상황은 즐기면서 찍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힘들다기보다는 괴로울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괴로웠다. 가장 괴로웠던 점은 만수와 내가 아무런 접점이 없다는 거였다. 내 주변에서 볼 수도 없었다. 예전에는 내가 가진 부분들을 부각하거나 포장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 눈빛이든 손동작이든 하나하나 다 만들어야 했다. 틱장애라 그러나? 틱의 종류도 되게 많더라. 그런 것도 다 만들었다. 나중에는 관련 서적도 봤고, 실제 정신병동에 가서 환자를 만나기도 했다.
-실제 환자를 만나보니 어떻던가.
=정신병원이 무서운 곳일 거라 생각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선입견이 있었으니까. 돌발행동도 많은 곳이고. 그래도 갔다. 간호사 분이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환자와 만나게 해놓고는 가버리더라. (웃음) 나이가 좀 있는 여자 분이었다. 만수와 비슷한 병을 갖고 있었다. 만나보니 무섭다기보다 놀랐다. 만수는 어디든 자신이 서명만 하면 수표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역시 ‘금(金)산’을 갖고 있었다. 손목에도 금시계를 차셨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금시계가 아니었다. 내가 놀란 건 그가 이것저것 설명을 하는데, 너무 진지했다는 거다. 조리있고 논리정연하고. 만수를 연기할 때도 미친 척하면 안되겠더라. 병원에 있는 만수에게는 그의 행동이 정말 진심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윤종찬 감독은 배우들에게 몹시 지독한 연출자란 평을 들은 적이 있다.
=지독하시다. (웃음) 감독님 성에 차지 않거나, 표현이 부족하면 원하는 걸 만들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하시더라. 한번은 내 자신을 밑바닥에 끌어내려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내가 카메라 앞에 서 있고, 주변에 많은 스탭들이 있는데도 심한 말을 하시곤 했다. (웃음)
-욕도 하나.
=욕은 아닌데, 상처입을 만한 말들로 속을 삭삭 긁으신다. 배우 입장에서는 안 좋은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악의적인 게 아니라 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이해는 했는데, 속상할 때도 많이 있었다. (웃음)
-멜로 라인이 거의 없는 작품은 <나는 행복합니다>가 유일하지 않나.
=그렇기는 하다. 그런데 거기에 있고 없고는 생각해본 적 없다. 다만 그런 부분을 지키려는 의지는 있었다. 촬영장 분위기가 워낙 극과 극으로 왔다갔다 했는데, 보영씨랑 대화를 하거나, 장난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끝내 만수는 정신병원을 퇴원한다.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이제 만수가 어떻게 살지 걱정이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상상해 봤을 텐데.
=당연히 해봤다. 내 생각에는 다시 정신병원으로 돌아갔을 것 같다. 물론 어떻게든 살려고 하겠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만수는 오토바이를 타고 밤 도로를 달린다. 난 헤드라이트 불빛이 중요하다고 봤다. 작은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삶 같은 거. 만수는 그렇게 살다가 다시 정신병원으로 갔을 거다. 나아진 게 없는 상황이니까.
-극중에서 만수의 과대망상에는 “부모님이 스위스에서 호텔과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다”는 부분이 포함된다. 이건 삼식이의 삶이다. 왠지 윤종찬 감독이 현빈이란 배우를 의식하고 쓴 것이 아닐까 싶더라.
=하하하. 그에 대해 이야기한 건 없다. 감독님이 알아서 쓴 부분이다. 감독님은 단지 최대한 재밌게 묘사하라고 했을 뿐이다.
-그 부분을 보면서 현빈이란 배우가 가진 필모그래피가 다른 동년배 배우에 비해 다양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백만장자의 첫사랑> <눈의 여왕> 같은 대중적인 작품이 있는 가 하면, <그들이 사는 세상>이나 <나는 행복합니다> 같은 작품도 있다. 비율에 신경 쓴 배합처럼 보인다.
=하고 싶은 걸 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다.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건 없다. 같은 작품을 하지 않는 이상, 변신은 당연히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연기력의 차이에 의해 평가도 다른 것 같다. 그런데 작품마다 상업적인 부분을 염두에 두고 결정했다. 결론적으로 수치가 그런 평가를 만든 것 같다. 많은 분들이 보지 않다보니 마니아 드라마가 된 거지. 다양한 선택을 한 것은 맞지만, 작품성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뒀던 것은 아니었다.
-공통점을 찾자면, 내적인 상처를 드러낼 때 느낌이 센 인물들이었다는 거다.
=아픔이 있는 남자가 많이 있었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해서 고른 건 없는데, 나중에 보니 그렇더라.
-비슷한 남자이지만, <친구>의 동수는 의외의 선택이었다.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사실 이제는 너무 전형적인 캐릭터 아닌가.
=꿈에 그리던 기회였기 때문에 한 거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나도 이런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연극을 할 때였는데, 얼마나 막연한 꿈이었겠나. 그런데 몇년이 지난 뒤 기회가 와서 덥석 잡은 거다. 사실 주변에서는 반대가 많았다. 잘해봤자 본전이니까. 다른 작품도 많이 있을 텐데 왜 굳이 <친구>를 하냐고 했다. 결국 시청률이 안좋았지. 하지만 <친구>를 찍으면서 내 얼굴에도 새로운 표정이 있다는 걸 배웠다.
-지난 1년 동안 쉬지 않고 배워 온 걸 이제 <만추>를 통해 보여줘야겠다.
=기대가 크다. 무척 큰 도전이기도 하고. 대사가 100% 영어인데, 영어로 내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작품이 좋아서 선택은 했지만 걱정이 밀려들기에 최대한 빨리 미국을 가려고 했다.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 영어수업도 받고 있다. 지금은 좀 편해지기는 했다.
-탕웨이와 만나보니 어떻던가.
=한국말로 할 수는 없지만, 나름 많은 대화를 하고 있다. (웃음) 리딩할 때 그러더라. 캐스팅이 정해지고 나서 인터넷에 내 이름을 검색해봤다고. 우리 팬들은 상당히 좋아하고 있다.
-리메이크작에서 두 남녀는 어떤 캐릭터인가.
=내 이름은 훈이다. 탕웨이는 애나로 되어 있다. 애나는 원작처럼 모범수인데, 훈은 원작과 좀 다르다. 뭐랄까. 호스트가 직업일까. 사실 호스트라고 하기는 뭐한데, 제비는 아니고 호스트가 맞을 것 같다. 막상 호스트를 전업으로 하는 남자는 아니다.
-원작의 남자는 상당히 능글맞다. 건들거리면서 여자한테 막 들이댄다. 현빈이란 배우가 그런 남자를 연기한다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부분을 많이 걷어내기는 했다. 아마 내 나이에 능글맞은 남자를 연기하면 정말 속빈 놈처럼 보이지 않을까? (웃음) 물론 아예 없지는 않다. 관심을 갖고 접근하는 건 남자다.
-사실 <만추>는 기본 설정상 여성 캐릭터에 초점이 맞춰진 영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금 말한 게 맞다. 어디까지나 휴가 나온 모범수가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기 전까지의 이야기니까. 하지만 나와 감독님은 다르게 이야기한다. “한 여자가 하룻동안 받는 선물에 관한 이야기”라고. 애나에게 훈은 가장 큰 선물인 셈이지.
-지난 1년의 행보를 봐서는 <만추> 이후에도 다른 작품이 결정되어 있을 것만 같다.
=없다. 내년에는 진짜 쉬고 싶다. 이렇게 일한 적이 데뷔 이후 처음이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후 좀 바뀐 것도 있는 것 같다. 작품에 대한 욕심도 더 생겼고, 연기로 표현하는 것의 재미도 더 많이 느끼게 됐다. 혼자만의 질문을 진짜 많이 해본 것 같다. 스스로 몰랐던 게 생기니까 여유가 생겼다. 연타석으로 해도 덜 힘들게 느껴진다. 내년에는 쉬고 싶지만, 정말 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자친구가 너무 서운해하지 않을까. 밖으로만 나돈다고.
=서운하겠지. (웃음) 그런데 뭐 같은 일을 하는 친구니까. 평소에도 이해를 잘해주기 때문에 그런 걸 가지고 트러블이 생기지는 않는다. 물론 나도 100% 이해해준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