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감독은 언제나 감독의 세계관 안에서 숨쉬고 사고하는 자이다. 자신의 전문성을 이용해 감독의 비전을 표현하며 그러한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즐길 줄 아는 자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장인의 손, 예술가의 마음, 디자이너의 머리가 필요하다”는 로버트 보일(히치콕 영화 <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마니> <도주자> <의혹의 그림자>의 미술감독·AFI 교수)의 말을 몇번이나 가슴 아프게 되뇌였는지 모른다. 고국에 돌아와 처음 맡게 된 영화 <꽃섬>에서 류성희(33살)는 감독과 하나 되지 못하는 상황이 꼭 자신의 무능 탓인 것만 같아 끊임없이 스스로를 책망했다.
물론 감독이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스탭들에게도 똑같이 무신경하다는 걸 알았지만, 스승이었던 밥(로버트의 애칭)이 이런 꼴을 본다면 틀림없이 한소리했을 거라는 생각이 그녀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만큼 <꽃섬>은 정신적으로 힘든 영화였다. 사실 <꽃섬>은 그녀에게나 송일곤 감독에게나 ‘첫’ 영화가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송 감독이 2년 동안이나 매달린 <칼>이 그녀의 데뷔작이 돼야 했다.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칼>이 엎어지고, 송 감독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심정으로 <꽃섬>에 매달렸다. 시간과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고, <칼>에서는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눴던 그였지만, <꽃섬>에서는 처음 몇 마디 나눈 게 고작이었다. 그것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자 우화”라는 한줄짜리 단서였다. 그때 문득 그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렸다. 그녀가 아는 유일한 ‘어른용’ 동화이기도 했다. 동화라면 으레 가지는 유아적 환상과 더불어 소름 돋는 현실이 공존하는 ‘이상한 나라’야말로, 혜나와 옥남과 유진이 발딛고 선 영화 속 세상이 아닌가 하고. 그래서 그녀는 앨리스의 눈을 가졌다. 그것은 감독과 소통하기 위한 그녀의 눈물나는 몸부림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류승완 감독은 송 감독과는 매우 달랐다. 꼼꼼한 성격이라는 점은 같은데, 훨씬 급했다. 마치 머릿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든 생각들에 실체를 부여하려는 듯 내내 분주했다. 머리가 발보다 열 걸음은 먼저 뻗어나가 있는 형상이랄까. 송 감독의 영화가 사변적이고 관념적이라면, 류 감독의 영화는 좀더 육감적이고 현란했다. 세트없이 현장의 느낌을 최대한 살린 <꽃섬>의 작업이 정신적 순발력을 요구했다면, 철저하게 계산된 세트 촬영이 대부분인 <피도 눈물도…>는 육체적 능동성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류 감독은 상대를 능동적으로 만드는 데 타고난 사람이었다. 비결은 따로 없었다. 그 스스로가 능동적인 에너지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게 비결의 전부였다. 그 에너지의 근원은, 다름 아닌 고민이었다. 뭔가를 시작하는 사람이 가지게 되는, 틀림없이 어딘가에 희망의 냄새를 풍기는 고민. 그 대목에서 그녀는 강한 동류의식을 느꼈다. 송일곤, 류승완, 그리고 자신은 매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라는. 두 번째 영화를 끝낸 지금, 그녀는 좀더 자신을 채찍질할 채비를 하고 있다. 아무 이력도 없는 자신을 믿고 일을 맡긴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이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글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프로필
69년생
홍익대 도예과 87학번 동대학원 91학번
98년 AFI(American Film Institute) 입학
미국서 20여편의 단편과 3편의 장편 작업
<꽃섬>, <피도 눈물도 없이> 미술감독